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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성오

키워드: #전사통지서 #편지와 어머니 #전사금 #50년 동안의 현충원


구술자 강성오와 면담자 석미화, 이현주, 강서희는 두차례 만남을 가졌다. 첫 만남은 2023년 9월 4일, 현충원 만남의 광장이었다. 이후 2023년 09월 14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강성오는 참전군인의 형이자, 면담자 강서희의 아버지이다.



50년 동안의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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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통지서


그날 작전 중이었는데 비가 엄청 많이 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저녁때가 되어 텐트 안에 앉아 있었대요. 그런데 포가 떨어졌는지 지뢰가 터졌는지 구별이 안 된대요. 하여튼 갑자기 꽝 했대요. 옆을 보니까 거의 다 쓰러져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제 동생 그 바로 옆에 있던 동료는 즉사했고 제 동생은 큰 부상을 당한 채 살아 있었대요. 그리고 3일 동안인가를 죽여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집에 선물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거 준비해 놨는데 나 죽으면 이것 좀 꼭 보내달라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이제 전사 통지가 오고, 며칠 안장식을 한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가 전날 저희 집에 오시고. 지금 현충원 만남의 집 자리가 원래 안장식을 하는 자리예요. 거기 이름을 제가 잊었는데 안장식만 전용으로 하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전국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모아서 했어요. 특히 이제 베트남전에는 아마 1주일에 한 번씩 하지 않았을까? 전사자가 계속 오는데 배가 이제 여기서 뭐 물자나 또는 군인이 이제 교대하면서 이렇게 들어가고 나가고 할 때마다 전사자도 한꺼번에 오는 거죠. 유해가 오는 게 아니라, 아예 거기에서 전부 화장해서 오니까 화장해서 와서 이제 그 그때 온 사람들을 안장식을 따로 하죠. 그러면은 저희 동생은 제가 볼 때 한 20명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그 저희 줄, 그 앞줄까지가 전부 쭈~욱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냥 안장식하고, 가서 이제 묻고, 그냥 임시로 나무 기둥으로 이렇게 이제 누구 묘 하는 글씨 써서 이렇게 꽂고, 지금도 그렇게 하더라고요. 따로 하지 않고 묻어야 할 곳에 이렇게 이제 묻힐 준비를 다 해 놓고, 그날 이렇게 네 분인가 왔었는데. 네 자리가 한 자리씩 나무 푯말 미리 써서 준비해 놓고, 헌병이라고 합니까? 예식을 하는 헌병들이 네 명인가 와서 서고 자리에서 약식 안장식처럼, 묵념하고. 그 추념 총 쏘는 거 있잖아요. 총 한 두 방인가 이렇게 딱 쏘고 그다음에 바로 묻고 그냥 나무에 팻말 꽂고. 그리고 끝나더라고. 아주 간단하게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누가 와서 ‘뭐 어떻습니다’ 이런 얘기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이제 그게 그러는 것 같아요. 전쟁터에 가서 전사하면 부모나 가족들이 받는 충격이 아주 클 거 아니에요. 왜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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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와 어머니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앞이 캄캄하다는 생각? 어른들은 그냥 울고 계시고 집에 울음소리와 정적만 흘렀죠. 저한테 가장 괴로웠던 경우는 베트남에서 동생이 편지를 하면 거의 한 달 후에 집에 도착하곤 했는데, 동생이 죽어서 안장식까지 끝났는데도 계속 한 달 동안 편지가 오는 거예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도 동생 편지를 받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은 어머니는 서울까지 가서 아들을 묻고 왔는데 “야, 니 동생, 안 죽은 거 아니냐?” 계속 이러시는 거죠. 그런데 그때 동생한테서 편지와 함께 사진이 한 장 왔어요. 철모를 벗고 팔을 걷은 채 서서 찍은 사진이…. 월남에서 사진이 온 것은 저한테는 동생이 죽고 나서 딱 한 번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계신 시골에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나 봐요. 어머니는 늘 “그 녀석, 보고 싶다!” 그러셔서 제가 동생 사진을 갖다드렸어요. 그랬더니 보고 우시고, 보고 우시고 하시면서 그걸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더라고요. 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충일이면 동생 비석을 안고 우시기만 했어요.


"동생이 죽어서 안장식까지 끝났는데도 계속 한 달 동안 편지가 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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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금


아버지는 동생 죽은 이후로 거의 술로만 사셨어요. 아버지는 막걸리 두 말은 무거워서는 못 들고 가도 마시고는 가는 분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어요. 평소에도 술은 조금씩 드시기는 드셨는데, 그때 이후로 거의 술만 드셨어요. 집이 거덜 날 정도로. 날마다 술집에 앉아서 술만 드시니까 자식들은 저녁밥 먹을 때 되면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 찾으러 다니고 아무리 모시고 오려 해도 본인이 가야겠다. 생각하기 전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그 술 때문에 황달이다, 졸도다, 하혈이다, 이런 것 때문에 맨날 병원에 다니셨어요. 한번은 술로 병이 나서 병원에 갔었는데 아버지 진료 차례가 되었는데 자리에 안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았더니 병원 건너편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들고 계시더래요.

 

동생이 죽은 후 아버지께서 전사금을 신청하러 서울에 오셨어요. 원호처에 가셔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그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도 몰랐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삼각지에 있는 국방부에 갔어요. 그랬더니 국방부 근처에 있는 원호처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가서 아버지가 준비해 오신 서류를 내미니까 “이제 됐어요. 가 있으면 입금될 거예요” 그랬어요. 아버지는 그 돈으로 죽은 자식을 기억하기 위해 읍내 가까운 쪽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논을 사셨어요. 그리고 그 녀석이 생각나면 논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시더라고요.


"아버지는 그 돈으로 죽은 자식을 기억하기 위해 읍내 가까운 쪽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논을 사셨어요. 그리고 그 녀석이 생각나면 논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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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의 현충원


행사에 참여하는 인원 그 이제 동작동 현충원으로 말하면은 앞에 광장 전체가 행사장이기 때문에 거기에 앉는 사람만도 뭐 한 천여 명 될 거 아니에요, 굉장히 다르죠. 그럼 거기에 따르는 무슨 자원봉사자들이라든가 또는 뭐 경비요원이라든가 이런 인원수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오면은 거의 사람이 밀려다녀 다니다시피 하고 동선이 한 두배로 늘어나죠.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다 막고 돌아가라고 하니까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전부 사람이 못 다닙니다. 어느 경우에는 아예 정문을 폐쇄를 하기 때문에 후문으로 들어가서 그 제 동생 묘지까지 도착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는 한 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아요. 돌아오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시골에서 이제 저희 어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오면은 정말 고생을 하는 거죠. 근데 그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제가 볼 때는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큰 애 돌날 카메라를 샀는데 그 이후로는 현충일마다 사진을 꼭 찍었어요. 우리 집 상자에 가득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부터 사진을 찍어 현상을 다 해서 동생 근처 묘역에 오신 분들 사진까지 현충일 날 나누어 드렸어요. 현충일에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안부도 묻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른 얘기는 안 해요. 왜 죽었는지 군대 얘기는 일절 안 하죠. 일 년에 한 번씩 보니까 반갑기는 하지만 속 이야기는 안 하죠. 그런데 거기에 오시는 부모님들은 다 건강이 안 좋아요. 자식 잃은 충격 때문인지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참배객들도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줄어들다가 결국은 끊어져요, 우리 집만 보더라도 어른들이 돌아가신 후 자식들 외에는 아무도 안 와요. 형제들도 일부러 시간 내서 오지는 않고요. 6.25 전사자 묘역은 현충일에도 사람을 보기가 어렵죠. 현충일에 묘역을 보면 저분은 언제쯤 돌아가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죠. 사람이 많을수록 훨씬 나중에 돌아가신 묘역이에요.


"제가 큰 애 돌날 카메라를 샀는데 그 이후로는 현충일마다 사진을 꼭 찍었어요" 


 

강성오와의 만남

5602770f94481.jpg“우리도 저거 하자. 내 아들에게도 비석 해 주고 싶다.” 예전엔 현충원 묘비 앞에 자비(自費)로 상석을 만들어(지금도 고위직에게는 해준다.) 가족들의 애틋한 마음과 오래 기억될 글귀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고 강성기 병장의 어머님은 바로 옆 묘비 앞에 있는 상석(이 상석은 지금도 그 자리 땅속에 묻혀 윗부분은 그대로 노출되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별다른 안내도 없이 상석을 할 수 없게 되었다)을 보며 죽은 자식에게도 그렇게 해주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한참 후 그것을 만들고자 마음먹었을 때는 지금은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가유공자나 유가족들을 위한 현충원의 운영이 행정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비석 옆에 일률적으로 꽂혀 있는 먼지 쌓인 조화(造花)를 보며 국가 예우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것도 참으로 씁쓸했다. 문득 ‘보훈’이란 무얼까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에는 ‘보훈’이란 ‘국가의 존립과 주권 수호를 위해서 신체적, 정신적 희생을 당하거나 뚜렷한 공훈을 세운 사람 또는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국가를 위해, 혹은 국가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가족 누군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였다는 것에 대해 국가로부터 위로받고 있을까. 특히 부모 형제, 남편 등 가족들의 희생이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고 오래오래 미래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되는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을 국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물질적 보상이 끝나면 보훈이란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로만 남는 것일까. 현충원에서 겪는 직위와 계급에 따른 묘소의 위치나 크기를 보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등등. 국가에서는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죽음들을 명예롭게 이야기하고, 국가가 예우를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현충원에 안장된 베트남전 전사자의 가족은 국가로부터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위로할 만한 가슴 찡한 정신적 예우라든가 물질적 보상, 슬픔에 공감하는 위로를 충분하게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故 강성기 병장의 가족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현충원에서 겪는 직위와 계급에 따른 묘소의 위치나 크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이현주


66cb57b177d42.jpg나는 왜 당연하게 현충원에 갔는가? 

나는 왜 참전군인 동생을 둔 아버지에게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한 적이 없는가?

유년시절 상황과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떠한 것을 배우고 느꼈는가?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 죽음을 애도할 것인가?

3대를 고찰하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수많은 질문을 남기게 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 죽음을 애도할 것인가?"

강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