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송금술
부대: 백마부대 의무중대
참전 시기: 1969~1970년 (1년 3개월)
키워드: #대민지원 #직업군인 #전쟁서사 


구술자 송금술과 면담자 이응, 솔, 석미화는 세 차례 만남을 가졌다. 이응과 솔은 성미산학교 학생으로 2023년 7월 24일, 2023년 08월 29일, 2023년 9월 26일의 세 번의 만남 모두 송시원의 자택에 방문하여 구술을 진행했다. 



일주일에 한 번 월남 마을로 갔지

#직업 군인


그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누님 집에서 주로 어머니하고 살았고, 형님은 그 당시에 군대 가고 그래 가지고, 우리가 제대하고 또 뭐 형편이 안 풀리니까 누님 집에서 많이 살았지. 밑에서 살고. 그래 가지고 내가 이렇게 이 일 저 일 하다가 동사무소에서, 옛날에는 급사라 그랬지. 동사무소에서 보조일 같은 거 하다가 67년도 5월 달에 하사관으로 입대한 거예요. 영장도 안 받고 자원 입대했어.

내가 군대에서 치과 기술 배웠어요. 나는 원래, 지금 부사관이라 해가지고 부사관 그 지원해서 입대하면서 치과 보조 교육을 받았지. 그래 가지고 대구에서 이제... 군의학교 치과 위생 교육받고, 처음에 이제 마치자마자 청주에 있는 23육군병원이라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거기서 근무를 했지.


"영장도 안 받고 자원 입대했어"


#대민지원


그니까 저는 이 솔직히 얘기하면 나는 괜찮은, 베트남을 가도 뭐 작전은 별로 안 나가봐 가지고. 근데 나는 주로 대민지원, 그걸 많이 나왔거든. 대민지원 치과 몰라 지금 치과 위생 교육을 받고 그냥 와서 해 주는데, 이 베트남 사람들은 인간 자체가 열대지방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좀 약간 긴장감이라는 건 별로 없어요.

백마 9사단 의무중대 치과에 있었으니까 마을에 찾아가서, 우리가 마을로 찾아가서 이빨, 치아 뽑아주고. 발치 해주고. 그, 월남 사람들은 대부분 치아가 나빠요. 이를 제대로 안 닦는지 몸 자체에서 냄새가 많이 나요. 그게 왜냐면 거기는 완전 주로 여름이라, 더운 나라라.

응. 그때(한국전쟁 때) 우리나라가 제일 가난할 때 아니었어. 그리고 월남 갈 때가 (아내: 가난해서 전쟁터로 가? 죽으러?) 도와주러 (아내: 총 맞으러 가는 거지. 보병으로 가면 죽지. 목숨 걸고 가는 거지) 뭐 나는 대민지원밖에 안 했어요.


"나는 대민지원밖에 안 했어요"


#해외출장으로서의 월남


호기심 반 (아내: 무슨 호기심이야. 군대 가는데) 왜냐면은 국외여행 한 번도 안 가봤잖아요. 그래서 간 거지. 또 군 경력 쌓으러 가는 거고. 난 더군다나 치과 병과라서 베트남 가기가 힘들었어요. 왔다 갔다 하다가 TO 나면 갔지. 가기 힘들어요. 치과는 이제 충원이 많이 안 내려오기 때문에. 그때 인제 초기에 여튼 뭐 말기쯤 되고 그래가지고 70년도 다 돼 갔을 때거든요. 내 69년도 갔으니까.

가보니까 베트남전쟁이 65년도에 났거든요. 나는 69년에 갔는데 거의 다 평정되고 미군들도 뭐 거의 빠져 나오고. 나는 주로 대민지원을 많이 나갔어요. 대민지원으로 치과 지원 많이 나오고 해가지고. 별로 재미가 없었지. 남들 뭐 돈 벌러 간다고 하는데 난 돈 벌러 가고 그런 것도 아니지만.

왜냐하면, 당시에는 내가 하사 때 갔는데 진급이 힘들었거든. 그래가지고 갔다 와서도 하사에 돌아 와가지고 전방에 가가지고 중사 달았어. (아내: 갔다 와서 중사 달았지) 갔다 와서 달은 거야.


"월남 갔다 와서 중사 달은 거야"



#고엽제

그 고엽제 많이 걸리지는 안 했지만은 의증 비슷한, 비슷한 거야. 지금까지 고통받는 사람 있을 거야. 난 나는 크게 걸려보진 않아. 작전 지역에 안 들어가기 때문에. (아내: 당신 암 걸렸잖아. 간접적으로 된 거죠. 근데 증거가 확실하게 없어요. 응. 이게 보병으로 나왔으면은 그게 직접적인 거기 때문에 증거인데 이이는 간접적이기 때문에.)


#평화에 대해


물론, 물론 이제 군인 출신, 나는 군인 출신이었는데. 물론 무기를 만들고 그건 그건데, 어떻게 하면 국민들 잘 해 가지고 평화적으로 해서 또 그 어느 뒤쳐진 사람들한테 가서 대민진료로 이거 뭐 치과 진료를 해주면서 친해져 가지고, 전쟁을 억제하는 그런 힘을 길러주잖아. 나는 그걸 얘기하고 싶어요. 베트남 가서 이것도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고, 계속 그거 하면 절대로 평화가 안 이루어지는 거야.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고, 계속 그거 하면 절대로 평화가 안 이루어지는 거야"


#귀국 이후 군생활


15사단 별로 생각나지를 않아. 전방 골짜기에서 뭐 (아내: 아니 그러니까 군대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나 그거 어려운 일 그런 거 좋은 일 그런 거 생각나는 걸 얘기를 하라고요.) 근데 거기에서 크게 어려운 일이 없었는데, 뭐 철책부대 안 갔으니까. 나중에 가가지고 철책선 부대 가서 파견근무 나가가지고 근무하고 그랬는데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는데. 철책선부대 마을하고 고립돼 가지고 그게 어려움이 있었지. 근무하는 거는 그렇게 어려움 없었어.


"근무하는 거는 그렇게 어려움 없었어"


송금술과의 만남

수많은 전쟁 서사에서 이야기 되는 전쟁은 공포스럽고, 잔혹하고, 폭력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송금술 참전군인의 이야기 속에서 전쟁터는 그리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그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입대한 군에서 진급을 하고자, 해외에 나가보고자 월남에 자원했다. 의무대였지만 치과 치료를 하는 보직을 맡았기에 큰 부상을 입은 이들을 가까이서 마주할 일이 없었고, 전투를 목격할 일이나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에 놓일 일도 없었다. 항상 부대로 찾아온 월남 사람들과 한국군의 치아를 치료해 주는 반복적인 업무를 하였고 지루할 때가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민지원을 나갈 때면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재미있었다. 

참전 당시를 묘사하는 송금술의 표현들은 ‘전쟁’에 참여했다기보다 군 생활 중 잠시 타지로 출장을 다녀왔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전쟁은 평범한 것이 되었다. 어떻게 전쟁이 이리 평범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떤 작은 한 부분에 종사하는 개인이 체감하는 ‘전쟁’에서는 고통이나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 어떤 전투병의 이야기 속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죄책감과 트라우마 등을 가져다주는 반면, 송금술과 같은 경우 평범한 일상에서 지나갔던 일이기에 특별하지 않은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누군가의 미시적인 전쟁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며, 그저 업무의 연장선이자 일상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다면적인 구성과 개개인의 경험 사이에서는 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전쟁에 참여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러한 복잡함 사이에 가려진 폭력을 인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전쟁과 군사주의와 같은 것들은 국가 시스템을 통해 쉽게 개인의 일상에 침투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경계하기는 어렵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전쟁’(물론 참전군인 당사자가 경험한 전쟁의 맥락과 동일시 할 수는 없겠지만)은 무엇이 있을까? 또 알게 된다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송시원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중 하나인 것 같다.


"만약 내가 전쟁에 참여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가려진 폭력을 인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응


송금술 참전군인과의 구술작업에는 항상 아내분이 동참했다. 송금술 참전군인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에서 청자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해석이 개입되었다. 송금술 참전군인은 구술작업 중 기억을 떠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거나, 문장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거나, 청자의 질문에 계속해서 단순하고 반복되는 답변만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때 송금술 참전군인의 아내가 대신해서 답을 내거나, 본인이 송금술 참전군인에게서 전해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이렇게 말씀했잖아요. 맞죠?”라는 형식으로 송금술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대신해서 이야기하고 송금술 참전군인에게 단순 확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송금술 참전군인의 이야기가 타인의 해석을 통해 전달될 때에는 그의 고유한 목소리와 경험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항상 의식해야 했다. 생애사적 구술작업을 진행하며 가장 중요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이야기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전의 경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왜곡되고, 편집되기도 한다. 그러한 해석 역시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화자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과거의 경험이나 가치관 등을 파악하여 본인의 이야기를 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지 분석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타인의 해석에 대해 경계와 주의를 다하는 한편 화자 스스로가 온전한 이야기를 구성해낼 수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개입 역시 불가피하다는 한계성을 마주하기도 했다. 송시원 참전군인과의 구술작업은 타자 개입의 필요성과 그로인한 이야기의 변질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우리가 그들에게서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어떻게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어떻게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