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이재춘 부대: x 참전 시기: x 키워드: #아버지 #고엽제 #역사공부
이재춘의 아버지는 참전군인이다. 석미화의 삼촌 또한 참전군인이기도 하다. 2023년 8월 10일, 구술자 이재춘과 면담자 석미화는 광주에 위치한 이재춘의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
비존재(非存在) 이재춘

#직업군인 아버지
나는 1978년 10월, 광주광역시에 있는 31사단 관사(官舍), 군인아파트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이문옥은 직업군인이었지요. 그때 31사단장은 김재명 씨였고요. 그는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어요. 어릴 적에 나는 그를 ‘관사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명절 때면 인사드리러 갔던 기억이 있어요.
1980년, 아버지는 보안사령부로 전출 예정이었어요. 영관(領官)급으로는 특이한 사례였던 걸로 알아요. 1973년 가을, 서울로 진입하려던 무장 탈영병을 아버지가 저지했던 일이 있거든요. 신문에는 짧게 ‘사살됐다’는 단신으로 처리되었지만, 탈영병에 의한 사상자들이 발생했고 장성급의 인사 이동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요. 이후, 아버지는 관련 장성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어요.. 김재명 씨도 직접 헬기 타고 와서 소개해 준 사단장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왜 하필 전라도 놈이냐’라고 해서 전출이 취소되었다고 들었어요.
"나는 군인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예민함
저는 아버지에 비해 키도 작고요. 왜소한 체격을 가졌어요. 어릴 때부터 잦은 두통으로 인해 신경질적이었고, 두통용 아스피린을 늘 갖고 다녔어요. 불안도가 높았고, 갑자기 누구를 만나게되거나, 뭐 작은 일이라도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그런 상황이 닥칠 것 같으면 미리 피해버렸어요. 피하지 못했을 때도 있었죠. 그런 때는 일종의 해리(解離, dissociation) 증상이 있었어요. 그곳에 있지만, ‘나’는 그곳에 있지 않은 것처럼 되는 거예요. 누군가와 같이 있거나 친밀해 지는 게 힘들었어요.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이 나에게 강제되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나고 무엇보다 불안이 컸죠.
예민했기에 조용조용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지냈어요. 군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어찌 다녀왔어요.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파병(1969-1970)갔던 백마부대에서 2년 2개월을 견뎠어요. 군대 안의 구조적 폭력들에 많이 시달렸고, 욕설들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있었지만 전보다는 두꺼워진 낯으로 돌아왔어요. 제대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친구들은 내가 군대에서 자살할 타입이라고 생각했대요.
"예민했기에 조용조용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지냈다"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는 60세였던, 2003년 6월 30일 정년퇴직 후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자신과 많이 다른 성향의 아들에 대해,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나인데, 너는 왜?’ 라며 한탄 섞인 걱정을 하긴 했지만 말이에요.
2004년 겨울부터였어요. 아버지의 체중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지요. 매일 새벽 유산소운동과 무산소운동을 거르지 않던 그가 약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추위에 강했던 아버지는 그해 겨울, 너무나 추워했어요. 그때는 왜 그러시는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기억이 아프게 남아있어요. 좀 더 빨리 진단받을 수 있었더라면... 평소 혈압이나 당뇨같은 기저질환이 없었던 아버지는, 2005년 5월, 병원을 찾아다닌지 약 3개월 만에, 호지킨스병 판정을 받았어요. 키 173cm, 몸무게 70kg이 넘었던 체중이 55kg미만이 되고 난 이후였지요. 아버지의 병세는 임파선암(림프종) 3기를 지나 4기에 가깝다고 했어요.
암이 없었던 가족력에 반해 아버지의 림프종은 갑자기 나타났어요. 누나는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던 것에서, 혈액암류인 림프종이 고엽제후유증이라는 것을 찾아냈어요. 보훈처에서 고엽제후유증으로 인정받은 건 2005년 11월이죠. 아버지는 6차 항암에 들어갔어요. 항암부작용으로 폐와 신장에 문제가 생겼어요. 쇼크가 왔고 심폐소생술로 겨우 위기를 넘기기도 했어요.
폐포가 섬유화되어 굳는 폐섬유화증이 찾아왔고, 투석을 계속 받아야 했어요. 담당 의사는 신약을 써본다고 했지만, 더 악화만 되었어요. 4주차부터 아버지는 급속히 무너져 갔어요. 희망을 걸어보았던, 검증되지 않은 신약의 부작용 때문인 것 같았어요. 아버지 곁에 나 혼자 있었어요. 아버지 몸에서 마지막 기계 장치들을 제거하고 마지막 호흡을 하실 때까지 그렇게 혼자였어요.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얘기했어요. 아버지와의 마지막 1시간 30분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혈액암류인 림프종이 고엽제후유증이라는 것을 찾아냈어요"
#이후 삶
집에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생각났지요. 마지막 호흡을 하실 때까지, 돌아가시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 각인되어, 머릿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再現)됐어요. 강한 두통, 폭음, 블랙아웃이 반복되었어요. 그때의 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던, 사회에서 말하는 ‘삶’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자주 떠났어요. 대전현충원 장교2묘역 6544 묘비번호로, 243519라는 군번으로 남은 아버지에게 들렀다가 계룡산에 올랐어요. 10월 어느 날에는 태백산에서 홀로 밤을 지내기도 했어요. 한겨울 제주도에서 그렇게 혼자 계속 걸었어요.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어요. 2012년 여름, 이모·이모부와 사촌동생, 어머니와 푸켓 휴양을 떠났어요. 푸켓 카타타니 해변 휴양지에서 아침에 산책을 하다가 참전군인이었던 미국인 할아버지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 거예요. 그는 엔지니어로 은퇴 후 예전 베트남전 참전 당시 휴가를 보냈던 태국에 다시 와본 것이라고 했어요. 미묘했어요. 아버지와 베트남전쟁, 아버지의 죽음, 나와 아버지. 내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역사에 아버지와 나, 이야기의 어떤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지, 아파하기만 하던 삶에서 뭔가 유의미함을 찾고 싶었어요.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아파하기만 하던 삶에서 뭔가 유의미함을 찾고 싶었어요"
#다시 삶
2015년, 메르스로 시끄러웠던 해, 내 나이 서른 여덟이 되는 해였어요. 지속적인 수면장애와 기절, 고열 지속, 왼쪽다리 마비가 찾아왔어요. 저는 10년 전 부친이 떠났던 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어요. 처음엔 다리, 다음엔 허리 MRI를 2번 정도 찍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결국 늦은 저녁 시간, 입원실에 있던 내게 간호사가 다시 MRI를 찍어야 한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머리 MRI를 찍었어요. 원인은 뇌였어요. 4.2×4.8×4.0cm 우뇌 뇌종양이 발견된 거예요. 이미 운동신경세포가 많이 손상되어 다리의 장애상태를 돌릴 수 없다고 했어요. 종양은 10세 전후에 생겨 너무 커져 있었어요.
내게 남은 건, 결핍된 신체, 그리고 각인된 상흔들 뿐이었어요. 나를 돌봐주는 이모는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용기를 냈어요. 이모의 보살핌 속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사학과 석사 과정을 다시 시작했어요. 다른 곳에서 역사학 석사 과정을 수료한 덕분에, 5과목의 대학원 과목만 수강하면 논문 제출 자격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러나 나의 신체는,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주위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들 덕분에 요양하며, 천천히 다시 책을 볼 수 있었어요.
석사 졸업 후, 광주에서 사학과 박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박사 과정에 들어가고 첫 학기인 2019년 3월, 뇌종양 재발이 확인됐어요. 나는 광주에서 한 학기라도 마치고 싶었어요. 다시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2019년 8월로 수술을 미뤘어요. 모험이었지만, 다시 공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했어요.
그 뒤로 나는 전쟁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고 있어요. 박사 수료 후 현재까지 지적 자극을 받으며 지도교수님의 ‘사유들’에 매료되어 영향받고 있어요. 2023년부터 베트남전쟁과 고엽제, 참전군인의 신체, 그 양가성(兩價性)을 담아보려 노력 중이에요.
"베트남전쟁과 고엽제, 참전군인의 신체, 그 양가성(兩價性)을 담아보려 노력 중이에요"
#나, ‘非―존재’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던 참전군인들은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참전군인의 신체에 대량 침투되었던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의 부생성물, 다이옥신(Dioxin)에 의한 고엽제후유증에 대해서 국가는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해 놓았다. 미국, 한국, 뉴질랜드, 호주의 참전군인들의 신체는 동일한 법률에 결박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에 직접 대량 침투되었을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참전군인들이 발병률과 죽음들로 증명해야 비로소 법률이 되는 구조다. 합리적으로 잘 밝혀진 것처럼 규정해 놓았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이옥신에 의해 ‘임상시험’의 대상이 되어버린 1세대들의 형해화(形骸化)된 신체는 숫자화되어 있을 뿐이다. ‘잘싸운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국가 서사와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흘린 피’라는 레토릭에 파묻혀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참전군인들의 삶과 2세들의 존재는 은폐되어 있다. 그들의 존재는, ‘非―존재’화 된다.
‘非―존재’인 나의 역사 공부는, 전쟁을 공부한다는 것의 무거움에서 시작하려 한다, 전쟁을 정의내리고 단순화시키는 순간 탈각되어 버리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자료들 사이를 유동하며 들여다보면 정말 다층적이고 다양한 전쟁들이 있다. 개인 단위, 가족 단위, 어떤 작은 공동체 단위 등.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마이클 하워드, 2015, 『유럽사 속의 전쟁』, 글항아리. 343쪽.)이라는 관점에 유의하며, 전쟁의 역사는 단순히 군사 작전의 역사가 아닌 사회 혹은 공동체로 상상되어진 것과 개개인들의 삶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왜 그러한 방식으로 싸웠는지, 어떤 것이 믿어졌고, 어떤 것이 소거되었는지. 누가 왜 무슨 의도로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그 기록이 현재 왜 믿어지는지, 그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내재적 맥락과 사람들의 흔적들을 같이 봐야 하지 않을까.
"전쟁을 정의내리고 단순화시키는 순간 탈각되어 버리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재춘과의 만남

나는 이재춘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왜 억울한지 물었다. 아버지의 1년, 베트남전쟁에 갔던 그 1년이 더 살 수도 있었던 아버지의 20년 삶을 빼앗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 후 같은 병원에서 자신의 몸도 그로 인해 병들었음을 알게 되지 않았냐며 말끝을 흐린다. 이재춘은 이 사회가 자신과 같은 이들을 ‘비존재’로 만들고, 그런 삶을 그냥 내버려둔다고 여긴다.
“저는 제가 어떤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사회에서 제 정체성은 그냥 장애를 담지한 사람인 거죠. 제가 하는 시도나 어떤 연결 지점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거든요. 예컨대 저는 노동력을 잃었잖아요.”
“전쟁이 무엇인지 말할 때는 균형 있게 말해야 해요. 치우치지 않게.”
그 대목에서 이재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균형'에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전쟁과 학살에 대해 아주 좁은 정의를 내리고 그 아래 몇 가지 잔인한 장면만을 가지고 의미화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재춘은 열을 내며 근대 전쟁이 갖는 잔인함에 대해 연달아 말했다.
“그러니까 ‘민간인학살’이라고 더블 쿼테이션을 붙이든 하나를 붙이든 해가지고 요거를 할 때 항상 총격전이 벌어지고 묘사되는 학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것만 이야기해선 안된다는 거. ‘균형’을 맞추라고. 다른 게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죠. 버튼 하나로, 폭격으로, 세균과 화학전으로 벌인 학살도 이야기해야죠. 안익순 참전군인이 기억하는 스펙타클이 있어요. 포를 밤에 그렇게 난사해서 계속 때려 박아서 사람 죽이는 게 더 잔인한 거 아닌가요?”
그는 근대 전쟁의 잔인함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학살의 현장에 있지 않은 존재들, 드러나지 않은 존재들, 비존재들에 대한 학살도 학살이라고, 이재춘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비존재들에 대한 학살도 학살이라고, 이재춘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석미화
이름: 이재춘
부대: x
참전 시기: x
키워드: #아버지 #고엽제 #역사공부
이재춘의 아버지는 참전군인이다. 석미화의 삼촌 또한 참전군인이기도 하다. 2023년 8월 10일, 구술자 이재춘과 면담자 석미화는 광주에 위치한 이재춘의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비존재(非存在) 이재춘
#직업군인 아버지
나는 1978년 10월, 광주광역시에 있는 31사단 관사(官舍), 군인아파트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이문옥은 직업군인이었지요. 그때 31사단장은 김재명 씨였고요. 그는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어요. 어릴 적에 나는 그를 ‘관사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명절 때면 인사드리러 갔던 기억이 있어요.
1980년, 아버지는 보안사령부로 전출 예정이었어요. 영관(領官)급으로는 특이한 사례였던 걸로 알아요. 1973년 가을, 서울로 진입하려던 무장 탈영병을 아버지가 저지했던 일이 있거든요. 신문에는 짧게 ‘사살됐다’는 단신으로 처리되었지만, 탈영병에 의한 사상자들이 발생했고 장성급의 인사 이동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요. 이후, 아버지는 관련 장성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어요.. 김재명 씨도 직접 헬기 타고 와서 소개해 준 사단장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왜 하필 전라도 놈이냐’라고 해서 전출이 취소되었다고 들었어요.
"나는 군인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저는 아버지에 비해 키도 작고요. 왜소한 체격을 가졌어요. 어릴 때부터 잦은 두통으로 인해 신경질적이었고, 두통용 아스피린을 늘 갖고 다녔어요. 불안도가 높았고, 갑자기 누구를 만나게되거나, 뭐 작은 일이라도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그런 상황이 닥칠 것 같으면 미리 피해버렸어요. 피하지 못했을 때도 있었죠. 그런 때는 일종의 해리(解離, dissociation) 증상이 있었어요. 그곳에 있지만, ‘나’는 그곳에 있지 않은 것처럼 되는 거예요. 누군가와 같이 있거나 친밀해 지는 게 힘들었어요.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이 나에게 강제되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나고 무엇보다 불안이 컸죠.
예민했기에 조용조용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지냈어요. 군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어찌 다녀왔어요.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파병(1969-1970)갔던 백마부대에서 2년 2개월을 견뎠어요. 군대 안의 구조적 폭력들에 많이 시달렸고, 욕설들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있었지만 전보다는 두꺼워진 낯으로 돌아왔어요. 제대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친구들은 내가 군대에서 자살할 타입이라고 생각했대요.
"예민했기에 조용조용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지냈다"
아버지는 60세였던, 2003년 6월 30일 정년퇴직 후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자신과 많이 다른 성향의 아들에 대해,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나인데, 너는 왜?’ 라며 한탄 섞인 걱정을 하긴 했지만 말이에요.
2004년 겨울부터였어요. 아버지의 체중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지요. 매일 새벽 유산소운동과 무산소운동을 거르지 않던 그가 약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추위에 강했던 아버지는 그해 겨울, 너무나 추워했어요. 그때는 왜 그러시는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기억이 아프게 남아있어요. 좀 더 빨리 진단받을 수 있었더라면... 평소 혈압이나 당뇨같은 기저질환이 없었던 아버지는, 2005년 5월, 병원을 찾아다닌지 약 3개월 만에, 호지킨스병 판정을 받았어요. 키 173cm, 몸무게 70kg이 넘었던 체중이 55kg미만이 되고 난 이후였지요. 아버지의 병세는 임파선암(림프종) 3기를 지나 4기에 가깝다고 했어요.
암이 없었던 가족력에 반해 아버지의 림프종은 갑자기 나타났어요. 누나는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던 것에서, 혈액암류인 림프종이 고엽제후유증이라는 것을 찾아냈어요. 보훈처에서 고엽제후유증으로 인정받은 건 2005년 11월이죠. 아버지는 6차 항암에 들어갔어요. 항암부작용으로 폐와 신장에 문제가 생겼어요. 쇼크가 왔고 심폐소생술로 겨우 위기를 넘기기도 했어요.
폐포가 섬유화되어 굳는 폐섬유화증이 찾아왔고, 투석을 계속 받아야 했어요. 담당 의사는 신약을 써본다고 했지만, 더 악화만 되었어요. 4주차부터 아버지는 급속히 무너져 갔어요. 희망을 걸어보았던, 검증되지 않은 신약의 부작용 때문인 것 같았어요. 아버지 곁에 나 혼자 있었어요. 아버지 몸에서 마지막 기계 장치들을 제거하고 마지막 호흡을 하실 때까지 그렇게 혼자였어요.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얘기했어요. 아버지와의 마지막 1시간 30분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혈액암류인 림프종이 고엽제후유증이라는 것을 찾아냈어요"
집에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생각났지요. 마지막 호흡을 하실 때까지, 돌아가시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 각인되어, 머릿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再現)됐어요. 강한 두통, 폭음, 블랙아웃이 반복되었어요. 그때의 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던, 사회에서 말하는 ‘삶’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자주 떠났어요. 대전현충원 장교2묘역 6544 묘비번호로, 243519라는 군번으로 남은 아버지에게 들렀다가 계룡산에 올랐어요. 10월 어느 날에는 태백산에서 홀로 밤을 지내기도 했어요. 한겨울 제주도에서 그렇게 혼자 계속 걸었어요.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어요. 2012년 여름, 이모·이모부와 사촌동생, 어머니와 푸켓 휴양을 떠났어요. 푸켓 카타타니 해변 휴양지에서 아침에 산책을 하다가 참전군인이었던 미국인 할아버지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 거예요. 그는 엔지니어로 은퇴 후 예전 베트남전 참전 당시 휴가를 보냈던 태국에 다시 와본 것이라고 했어요. 미묘했어요. 아버지와 베트남전쟁, 아버지의 죽음, 나와 아버지. 내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역사에 아버지와 나, 이야기의 어떤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지, 아파하기만 하던 삶에서 뭔가 유의미함을 찾고 싶었어요.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아파하기만 하던 삶에서 뭔가 유의미함을 찾고 싶었어요"
2015년, 메르스로 시끄러웠던 해, 내 나이 서른 여덟이 되는 해였어요. 지속적인 수면장애와 기절, 고열 지속, 왼쪽다리 마비가 찾아왔어요. 저는 10년 전 부친이 떠났던 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어요. 처음엔 다리, 다음엔 허리 MRI를 2번 정도 찍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결국 늦은 저녁 시간, 입원실에 있던 내게 간호사가 다시 MRI를 찍어야 한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머리 MRI를 찍었어요. 원인은 뇌였어요. 4.2×4.8×4.0cm 우뇌 뇌종양이 발견된 거예요. 이미 운동신경세포가 많이 손상되어 다리의 장애상태를 돌릴 수 없다고 했어요. 종양은 10세 전후에 생겨 너무 커져 있었어요.
내게 남은 건, 결핍된 신체, 그리고 각인된 상흔들 뿐이었어요. 나를 돌봐주는 이모는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용기를 냈어요. 이모의 보살핌 속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사학과 석사 과정을 다시 시작했어요. 다른 곳에서 역사학 석사 과정을 수료한 덕분에, 5과목의 대학원 과목만 수강하면 논문 제출 자격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러나 나의 신체는,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주위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들 덕분에 요양하며, 천천히 다시 책을 볼 수 있었어요.
석사 졸업 후, 광주에서 사학과 박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박사 과정에 들어가고 첫 학기인 2019년 3월, 뇌종양 재발이 확인됐어요. 나는 광주에서 한 학기라도 마치고 싶었어요. 다시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2019년 8월로 수술을 미뤘어요. 모험이었지만, 다시 공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했어요.
그 뒤로 나는 전쟁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고 있어요. 박사 수료 후 현재까지 지적 자극을 받으며 지도교수님의 ‘사유들’에 매료되어 영향받고 있어요. 2023년부터 베트남전쟁과 고엽제, 참전군인의 신체, 그 양가성(兩價性)을 담아보려 노력 중이에요.
"베트남전쟁과 고엽제, 참전군인의 신체, 그 양가성(兩價性)을 담아보려 노력 중이에요"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던 참전군인들은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참전군인의 신체에 대량 침투되었던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의 부생성물, 다이옥신(Dioxin)에 의한 고엽제후유증에 대해서 국가는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해 놓았다. 미국, 한국, 뉴질랜드, 호주의 참전군인들의 신체는 동일한 법률에 결박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에 직접 대량 침투되었을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참전군인들이 발병률과 죽음들로 증명해야 비로소 법률이 되는 구조다. 합리적으로 잘 밝혀진 것처럼 규정해 놓았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이옥신에 의해 ‘임상시험’의 대상이 되어버린 1세대들의 형해화(形骸化)된 신체는 숫자화되어 있을 뿐이다. ‘잘싸운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국가 서사와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흘린 피’라는 레토릭에 파묻혀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참전군인들의 삶과 2세들의 존재는 은폐되어 있다. 그들의 존재는, ‘非―존재’화 된다.
‘非―존재’인 나의 역사 공부는, 전쟁을 공부한다는 것의 무거움에서 시작하려 한다, 전쟁을 정의내리고 단순화시키는 순간 탈각되어 버리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자료들 사이를 유동하며 들여다보면 정말 다층적이고 다양한 전쟁들이 있다. 개인 단위, 가족 단위, 어떤 작은 공동체 단위 등.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마이클 하워드, 2015, 『유럽사 속의 전쟁』, 글항아리. 343쪽.)이라는 관점에 유의하며, 전쟁의 역사는 단순히 군사 작전의 역사가 아닌 사회 혹은 공동체로 상상되어진 것과 개개인들의 삶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왜 그러한 방식으로 싸웠는지, 어떤 것이 믿어졌고, 어떤 것이 소거되었는지. 누가 왜 무슨 의도로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그 기록이 현재 왜 믿어지는지, 그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내재적 맥락과 사람들의 흔적들을 같이 봐야 하지 않을까.
"전쟁을 정의내리고 단순화시키는 순간 탈각되어 버리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재춘과의 만남
나는 이재춘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왜 억울한지 물었다. 아버지의 1년, 베트남전쟁에 갔던 그 1년이 더 살 수도 있었던 아버지의 20년 삶을 빼앗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 후 같은 병원에서 자신의 몸도 그로 인해 병들었음을 알게 되지 않았냐며 말끝을 흐린다. 이재춘은 이 사회가 자신과 같은 이들을 ‘비존재’로 만들고, 그런 삶을 그냥 내버려둔다고 여긴다.
“저는 제가 어떤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사회에서 제 정체성은 그냥 장애를 담지한 사람인 거죠. 제가 하는 시도나 어떤 연결 지점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거든요. 예컨대 저는 노동력을 잃었잖아요.”
“전쟁이 무엇인지 말할 때는 균형 있게 말해야 해요. 치우치지 않게.”
그 대목에서 이재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균형'에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전쟁과 학살에 대해 아주 좁은 정의를 내리고 그 아래 몇 가지 잔인한 장면만을 가지고 의미화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재춘은 열을 내며 근대 전쟁이 갖는 잔인함에 대해 연달아 말했다.
“그러니까 ‘민간인학살’이라고 더블 쿼테이션을 붙이든 하나를 붙이든 해가지고 요거를 할 때 항상 총격전이 벌어지고 묘사되는 학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것만 이야기해선 안된다는 거. ‘균형’을 맞추라고. 다른 게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죠. 버튼 하나로, 폭격으로, 세균과 화학전으로 벌인 학살도 이야기해야죠. 안익순 참전군인이 기억하는 스펙타클이 있어요. 포를 밤에 그렇게 난사해서 계속 때려 박아서 사람 죽이는 게 더 잔인한 거 아닌가요?”
그는 근대 전쟁의 잔인함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학살의 현장에 있지 않은 존재들, 드러나지 않은 존재들, 비존재들에 대한 학살도 학살이라고, 이재춘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비존재들에 대한 학살도 학살이라고, 이재춘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석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