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유성원(가명)

부대: 주월한국군사령부 예하 야전사령부 원호근무대 

참전 시기: 1972년 02월 ~ 1973년 3월 23일 

키워드: #원호근무대 #전쟁인식 #교련선생님


구술자 유성원과 면담자 이재춘, 석미화는 세차례의 만남을 가졌다. 2023년 4월 5일, 자택 부근 카페에서 사전 만남을 진행한 후 2023년 6월 22일, 2023년 7월 12일, 이재춘의 자택과 근처 카페에서 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



병참장교가 본 처참한 월남전

#짧았던 대학 생활


조선대 다른 과는 학생들이 사실은 미달이었어요. 조선대는 그때만 해도 의대가 없었고, 약학대학만 있었죠. 전남대는 의대가 있었고. 그런데 전남대 비율하고 조선대 약대 비율이 거의 비슷했죠. 약학대에서 2학년 등록금을 못 내니까. 출석을 안 잡아주니까. 학교를 그만뒀죠.


"약학대에서 2학년 등록금을 못 내니까. 학교를 그만뒀죠"


#파병


간부후보생 시험을 초등학교 선배들 대여섯 명이 나보고 같이 가자고 그래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따라가서 시험을 봤고 저만 합격했어요. 군대를 가니까 봉급이라도 나오잖아요. 그때부터 집안이 좀 나아졌죠. 그런 시골 집안에, 집에 보내주면 얼마나 보내줬겠어요. 부족했겠죠. 그냥 집안에서 편지만 오면 불안하죠. 이거 돈 보내주란 말을 안 해도 집안이 어쩐다 하면 그냥 난 애가 타지요. 나는 쓰는 것보다도 집에 붙여주기 바쁘니까. 그런 가정의 어려움에 파병을 결정했죠. 내가 갔다오면 가정이 풀리겠다 생각을 하니까, ‘죽지는 않겠지. 죽지는 않겠지.’ 그렇게..

 

"가정의 어려움에 파병을 결정했죠. 내가 갔다오면 가정이 풀리겠다"


#원호근무대


‘원호’는 국내에서 월남 파병된 군인을 위해서 보내준 물품. 원호품이라는 것이 있어요. 편지... 또 위문품. 위문품이 들어올 때는 그냥 트럭으로 한두 대가 아니라 20대 30대가 한꺼번에 들어와요. 배로 하나를 싣고 들어오니까. 그걸 각 부대에 나눠주는 거. 큰 박스로 배분해요. 이건 백마. 요건 맹호. 트럭으로 한 트럭씩 편지도 트럭으로 보내요. 트럭으로.

그 다음에 신문. 잡지. 월간지나 주간지. 매주 들어와. 전투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봐요. 이게 그 십자성부대에 102병원이 있었거든요. 야전병원이죠. 환자도 많고, 간호원들도 한 몇 백 명 될거예요. 그 사람들이 월간지나 주간지를 좋아해요. 그거 갖다 주고 그랬어요.

저는 뭐 또 했냐 하면, 인솔 장교. 한국에서 월남으로 위문 간 위문공연단. 한국에서도 월남을 갔다 오지 않는 연예인들은 출연을 안 시켰어요. 다 월남 갔다 오라고. 현미 부부, 나훈아, 코메디안들. 그 사람들 이동하려면 무대도 있고 해야 하니까 트럭으로 몇 대 그러면 헌병들이 콘보이하고 장교 하나가 인솔을 해야 돼요.

나트랑에 있는 102병원 위문도 하고. 또 맹호부대 중대 단위까지 쭉 위문을. 그때는 이제 갈 때 소대가 이렇게 전투를 나가면 꼭 그 부대는 위문을 해줘요. 내일 전투 나간다고 그러면 나가기 전에 위문을 가줘. 가서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같이 맥주도 한 잔씩 같이 마시게 해주고. 그 다음에 이제 전투에 나가죠. 근데 그대로 놔두면, 전투에 나갈때 여자들 팬티를 가지고 가면 안 죽는다고 그래서. 연예인들 팬티를 저녁에 빨아놓으면 팬티가 싹 없어져 버린다고. 원망들이. 원망들 해요. 제일 많이 온 것이 여자 댄서들. 그 다음에 여자 가수. 미리서 얘기해. 팬티 좀 많이 늘어놓고. 일부러 얘기해. 그 사람들도 살고 싶어서 그러는데... 살아 와야죠. 죽으면 안 되죠.


"살아 와야죠. 죽으면 안 되죠"


#전쟁인식


에∼휴∼(깊은 한숨) 전쟁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전쟁이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지긋지긋합니다. 그냥. 지긋지긋해. 나는 가장 많이 느낀 것이 102병원(한국군 야전병원)에 가서 많이 느꼈거든요. 그 부비트랩(booby trap)이라는 것이 있어요. 건들면 터져버리는 것. 그런 것이 있어서 두 다리가 그냥 끊어져 버린 사람도 있었고. 위문 공연을 한다니까 간호장교들이 휠체어에다 끌고 나왔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남 나주 사람이었던 것 같애.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 근데 두 다리가 끊어져 버려가지고. 사고 나서도 많이 다쳤어. 전투하다가 다친 사람들. 총상입은 사람들. 102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많았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전쟁이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지긋지긋합니다"


#교련교사


우연치 않게 화장실에 가서 신문을 보다가 ‘교련 교사 자격시험’이 있다고 신문에서 봤어요. 퇴역장교들 중위·대위·소령까지. 그래서 저는 이제 그때부터 3개월 간 공부하기 시작했죠.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교련교사는 군사학하고 교육학. 시험에 합격했죠. 75년에 공립 고교 모교로 바로 발령이 났죠.

‘교련 교사 협회 회장’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운영도 하고 연구도 하고. 그때부터 이제 지도안도 새로. 교련 지도안도 새로 만들기도 하고. 거의 해년마다 임용고사, 제가 주로 임용 고사 시험반 출제 교사로 상당히 오랫동안 출제를 했어요. 그래서 임용시켰어요.

 

"‘교련 교사 자격시험’이 있다고 신문에서 봤어요"


#5·18


5·18 그때는 나는 교사였기 때문에. 애들이 잘 따른다고 그래서. 학생과에 근무했어요. 학생과장. 이 학생과장 하니까. 매일 도청 앞으로 나갔어요. 우리 애들 집으로 돌려보내느라고. 피해 없이 한다고. 처참했어요. 그 얘기는 너무나 얘기들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잘 아는 것 같아요.


"매일 도청 앞으로 나갔어요. 우리 애들 집으로 돌려보내느라고"



유성원과의 만남

유성원은 10년 남짓의 장교로서의 군 생활이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폭력이 만연한 조직에서 혼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 지휘관에게는 하위 계급의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며 대들게 된다. 당시는 장교들과 사병들 사이뿐 아니라 장교들 사이에서도 위계에 따른 폭력이 존재했다. 심지어 그는 장교 부인들 사이에서도 그 위계가 작동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제대 후에야 늦은 혼인을 했다.

그는 2023년 늦가을 만남에서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직업군인을 안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맞다. 그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직업군인을 선택하지도 월남전 파병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군인으로서도 그렇고 교사로서도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삶을 살았다.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애초 그가 진학했던 약학대학을 나온 ‘약사(藥師)’가 되어 꾸준히 연구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직업군인을 선택하지도 월남전 파병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재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