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최홍희 부대: 백마부대52 포병대대 B포대 참전 시기: 1972년 6월 ~1973년 3월 키워드: #파란군복 #참전단체 #세대차이
구술자 최홍희와 면담자 석미화, 노예주, 박정원, 노랭은 두차례 만남을 가졌다. 첫 만남은 2023년 8월 16일, 최홍희가 활동하고 있는 전쟁기념관 대한국방교육진흥회의 사무실이었다. 이후 2023년 08월 29일, 삼각지의 한 회의실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
나는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나 봐
#가부장제
제일 큰 형님하고 지금 뭐 우리 둘째 형이 미국 가 있었는데, 차이가 꽤 많지. 한 십몇 년 되지. 그래도 뭐, 우리 집은 그래도 좀, 우리 동네에서 잘 사는 편 쪽에 돼가지고. 큰 무리 없이. 이제 우리 집에서 나만 고등학교 나오고, 형님은 중학교. 동생은 이제 중학교도 안 나왔지. 중학교 나오기 어려웠지. 내가 이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우리 집에 둘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초등학교로 다 땡 한 거야. 내 동생도 초등학교 땡이고. 이제 딸 너이 아들 너인데, 중학교 나온 거는 둘째, 미국 가 있는 형님 하나고. 내 동생도 초등학교 땡이고. 우리 여자 동기들은 한 명도 안 갔고, 중학교. 우리 동기들도 두 명인가 세 명 갔나.
"집에서 나만 고등학교 나오고, 형님은 중학교. 동생은 이제 중학교도 안 나왔지"

#포병 #관측장교
72년도 6월 11일 날인가 갔다가, 이제 원래 왜 그렇게 됐냐면 보병들은 1년씩 있었는데, 포병은 정부에서 많이 이제 적들한테 가서 관측해가지고 쏘는 걸 연구를 하기 위해서, 장교를 많이 보내기 위해서 6개월을 시켰어. 6개월. 나 같은 경우는 왜 8개월 했냐면, 가가지고 휴전협정이 된 거야. 그러니까 휴전했다 하니까 교대할 일이 없으니까, 걍 보따리 다 싸들고 온 거지. 그 바람에 한 8개월, 2개월 더 하면 8개월 됐지. 우리는 모르고 갔는데, 우리가 배 내리고 다른 사람들 철수하잖아. 그 사람들이 그러는 거야. 이제서 뭐하러 오냐고. 이미 월남전 다 끝났는데 뭐 하러 오냐 이거지. 나는 뭐, 경험 쌓는다고 난 좋다고 따라간 거지. 아무래도 전쟁 때 갔다 온 놈하고 안 갔다 온 놈하고 [진급이] 틀릴 거 아니야. 전과를 올리고 뭐 훈장도 받고 하면 아무래도 유리한데, 우리야 그냥 갔다가 참전만 했고, 이건 또 포병은 또 틀려. 보병들은 병사들 끌고 다니면서 작전을 하잖아. 우리는 남을 지원해주다가 온 거 아니야. 보병대 가는데 포탑 띄워주는 거지 우리가. 내가 병력을 지원할 일은 별로 없지. 보병들 같으면 좀 얘네들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야 월남을 갈까 말까" 할수도 있었는데 포병은. 왜냐하면, 월남에는 장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야 나는 그래도 군대 경험을 위해서 한번 가야겠다" 해가지고.
주로 위험한 거는, 매복을 서면 좀 위험할 여지는 있는데, 매복도 이제 우리는 보병들 하면 따라가야 해. 따라가는데, 하여튼 V.C는 내가 얼굴 쳐다본 놈은 한 놈도 없어. 그러니까 쫌, 좋긴 뭐하지만, 나는 혜택 본 거야. 적군 얼굴도 안 보고 왔다면, 뭐, 누가 보면 "저 자식이 월남 갔다 온 거 맞아?" 하는데, 조금은 이제, 병사들하곤 조금 틀리지. 그리고 포병은 직접 V.C들 보고 포 때릴 수는 없잖아.
"이미 월남전 다 끝났는데 뭐 하러 오냐 이거지"

#참전수당
우리는 그때 장교니까 수당을 많이 받았어. 얼마를 받았나면, 내가 인제 내 갈 때 중위 16500원 줄 때야. 주는데, 우리 거 수당을 135불 줬어. 135불이면 얼마냐 63000원인가 돼. 그러면 중위 봉급 한 두 석 달 되잖아. 그래서 난 대위 안 올라가고 중위 봉급 주고 평생 거기 있으면 된다고 그랬어.
규정상에, 70프로는 집으로 보내줘. 왜냐하면, 이제 자기가 쓸 돈이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30프로는 주고, 나머지 70프로는 이제 집으로 보내주고. 그런데 집에 와가지고 돈에 대해서 묻질 못하겠더라고. 근데 내 생각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시골 집을 다시 지었어. 아마 내가 보낸 돈일 건데, 형수한테, 그 돈은 형님이나 아버지나 알 거 아니야. 근데 나는 이제 군대에서 밥 먹고 살고 이제 하면서, 그 돈 지금도 아무나한테도 못 물어봤어. 또 물어보면 " 저 자식 그것도 욕심이 있어 가지고 그런갑다" 할까 봐, 안 물어봤지. 다른 사람들은 뭐 돈 가지고 땅을 샀다, 뭘 했다, 하는데. 나는 내가 봤을 때 집 짓는 데 썼을 것 같은데, 뭐 안 그러면 그 돈이 어디 갈 데도 없거든. 그러니까 지금도 안 물어봤지. 안 물어봤고 뭐, 형님이라도 형님한테 물어보고 하기도 그러거든. 그런데 뭐 형님 인제 돌아갔고. (웃음) .얘기는 않더라고요. 한 번도, 그 돈을 얼마가 와가지고 얼마 썼다, 그런 얘긴. 나는 그래서 그 돈이 집으로 가기나 갔는가. 갔으면 얘기할텐데 얘기를 안 하더라고. 아직까지 내가 한 번도 안 물어봤고.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안 그러면, 시골에서 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잖아.
"난 대위 안 올라가고 중위 봉급 주고 평생 거기 있으면 된다고 그랬어"

#운명
세월이 흐르고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날, 참 그게 난 운명이라고 딱 생각하는 게, 형님이 인제 나중에 퇴근하고 오면서 뭘 봤냐면, 3사관학교 인원 모집하는 걸 보고 왔어. 그때 3사 생긴 지가 얼마 안 됐지. 그래가지고 형님이 전단지를 갖고 와서 "야 니 이거 함 시험 봐볼래" 그러더라고. 근데 노는 놈이 또 안 본다고 할 수 없잖아. 봐 가지고 떨어져도 관계없지만. 그래 가지고 인제 시험을 봤어. 그러고 인제 좀 쉬는데, 시골 갔다가 올라왔더니 합격했다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얘를 군대 넣을라고 했던 거잖아. 그런데 안 됐던 거를 다시 아들이 이렇게 엮어가지고 가는구나, 그래서 '야 나는 결국은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구나.' 맞잖아요. 지금도 내가 군복 입고, 어제도 내가 군복 입고 어디야, 광화문을 갔다 왔지만. 광화문이 아니야. 시청 앞에.
(중략) 아이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인제 살아보고서 사람들한테 그래. 오늘, 우리가 만난 것도 다 정해져 있으니까, 그냥 웃으면서 만나라, 이거지. 운명으로 만나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뭐 마음 편하더라고. 그러니까 누가 그건 나약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했는데, 나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편해. 노력한다고 다 잘되면 누가 안 할 사람이 어딨냐고.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버글버글 하잖아. 노력 안 해도 생각도 안 하는 놈이 국회의원 되기도 하듯이. 그래서 사람이 노력하되 안 되는 건 그냥 빨리 인정하고, 우선 살다 보면 또 더 좋은 날 오겠다- 그랬더니, 누가 그래. "맨날 좋은 날 온다는데 언제가 좋은 날 오냐." 그럼 내가 “가만히 있어봐. 아직 덜 됐나 봐.”라고 해. (웃음)
"야 나는 결국은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구나"
최홍희와의 만남

베트남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세대로서 내게 최홍희와의 만남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비전형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구술자의 기억을 통해 만나는 역사가 국가적, 전형적 역사를 벗어난, 확장된 기록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서로 이해할 수 없게된 지점들을 만남을 통해 드러내고, 충돌하면서 서로의 세계에 균열을 내기를 바란다.
"만남을 통해 드러내고, 충돌하면서 서로의 세계에 균열을 내기를 바란다"
노예주

구술 활동을 진행하며 마주한 소통의 단절 앞에서, 나는 ‘전쟁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단절 역시도 전쟁이라는 폭력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며, 그 영향이 서로 다른 세대 간의 관계맺기에도 스며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단절에도 불구하고 참전군인이 나누어 준 이야기의 구조적인 기원을 끊임없이 파악하는 시도를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의 현재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지금, 참전군인과의 이러한 듣기와 관계 맺기는 전쟁의 역사를 현재와 분리시키는 것이 아닌, 전쟁 경험자 개인의 역사를 현 세대의 역사와 하나로 잇는 시도가 될 것이다.
"단절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기원을 끊임없이 파악하는 시도를 계속해나가야 한다"
박정원
관련 글:
[회원 인터뷰] 참전군인 최홍희 : 카톡이는 세상, 카톡으로 만든 인연
이름: 최홍희
부대: 백마부대52 포병대대 B포대
참전 시기: 1972년 6월 ~1973년 3월
키워드: #파란군복 #참전단체 #세대차이
구술자 최홍희와 면담자 석미화, 노예주, 박정원, 노랭은 두차례 만남을 가졌다. 첫 만남은 2023년 8월 16일, 최홍희가 활동하고 있는 전쟁기념관 대한국방교육진흥회의 사무실이었다. 이후 2023년 08월 29일, 삼각지의 한 회의실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나는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나 봐
제일 큰 형님하고 지금 뭐 우리 둘째 형이 미국 가 있었는데, 차이가 꽤 많지. 한 십몇 년 되지. 그래도 뭐, 우리 집은 그래도 좀, 우리 동네에서 잘 사는 편 쪽에 돼가지고. 큰 무리 없이. 이제 우리 집에서 나만 고등학교 나오고, 형님은 중학교. 동생은 이제 중학교도 안 나왔지. 중학교 나오기 어려웠지. 내가 이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우리 집에 둘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초등학교로 다 땡 한 거야. 내 동생도 초등학교 땡이고. 이제 딸 너이 아들 너인데, 중학교 나온 거는 둘째, 미국 가 있는 형님 하나고. 내 동생도 초등학교 땡이고. 우리 여자 동기들은 한 명도 안 갔고, 중학교. 우리 동기들도 두 명인가 세 명 갔나.
"집에서 나만 고등학교 나오고, 형님은 중학교. 동생은 이제 중학교도 안 나왔지"
#포병 #관측장교
72년도 6월 11일 날인가 갔다가, 이제 원래 왜 그렇게 됐냐면 보병들은 1년씩 있었는데, 포병은 정부에서 많이 이제 적들한테 가서 관측해가지고 쏘는 걸 연구를 하기 위해서, 장교를 많이 보내기 위해서 6개월을 시켰어. 6개월. 나 같은 경우는 왜 8개월 했냐면, 가가지고 휴전협정이 된 거야. 그러니까 휴전했다 하니까 교대할 일이 없으니까, 걍 보따리 다 싸들고 온 거지. 그 바람에 한 8개월, 2개월 더 하면 8개월 됐지. 우리는 모르고 갔는데, 우리가 배 내리고 다른 사람들 철수하잖아. 그 사람들이 그러는 거야. 이제서 뭐하러 오냐고. 이미 월남전 다 끝났는데 뭐 하러 오냐 이거지. 나는 뭐, 경험 쌓는다고 난 좋다고 따라간 거지. 아무래도 전쟁 때 갔다 온 놈하고 안 갔다 온 놈하고 [진급이] 틀릴 거 아니야. 전과를 올리고 뭐 훈장도 받고 하면 아무래도 유리한데, 우리야 그냥 갔다가 참전만 했고, 이건 또 포병은 또 틀려. 보병들은 병사들 끌고 다니면서 작전을 하잖아. 우리는 남을 지원해주다가 온 거 아니야. 보병대 가는데 포탑 띄워주는 거지 우리가. 내가 병력을 지원할 일은 별로 없지. 보병들 같으면 좀 얘네들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야 월남을 갈까 말까" 할수도 있었는데 포병은. 왜냐하면, 월남에는 장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야 나는 그래도 군대 경험을 위해서 한번 가야겠다" 해가지고.
주로 위험한 거는, 매복을 서면 좀 위험할 여지는 있는데, 매복도 이제 우리는 보병들 하면 따라가야 해. 따라가는데, 하여튼 V.C는 내가 얼굴 쳐다본 놈은 한 놈도 없어. 그러니까 쫌, 좋긴 뭐하지만, 나는 혜택 본 거야. 적군 얼굴도 안 보고 왔다면, 뭐, 누가 보면 "저 자식이 월남 갔다 온 거 맞아?" 하는데, 조금은 이제, 병사들하곤 조금 틀리지. 그리고 포병은 직접 V.C들 보고 포 때릴 수는 없잖아.
"이미 월남전 다 끝났는데 뭐 하러 오냐 이거지"
#참전수당
우리는 그때 장교니까 수당을 많이 받았어. 얼마를 받았나면, 내가 인제 내 갈 때 중위 16500원 줄 때야. 주는데, 우리 거 수당을 135불 줬어. 135불이면 얼마냐 63000원인가 돼. 그러면 중위 봉급 한 두 석 달 되잖아. 그래서 난 대위 안 올라가고 중위 봉급 주고 평생 거기 있으면 된다고 그랬어.
규정상에, 70프로는 집으로 보내줘. 왜냐하면, 이제 자기가 쓸 돈이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30프로는 주고, 나머지 70프로는 이제 집으로 보내주고. 그런데 집에 와가지고 돈에 대해서 묻질 못하겠더라고. 근데 내 생각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시골 집을 다시 지었어. 아마 내가 보낸 돈일 건데, 형수한테, 그 돈은 형님이나 아버지나 알 거 아니야. 근데 나는 이제 군대에서 밥 먹고 살고 이제 하면서, 그 돈 지금도 아무나한테도 못 물어봤어. 또 물어보면 " 저 자식 그것도 욕심이 있어 가지고 그런갑다" 할까 봐, 안 물어봤지. 다른 사람들은 뭐 돈 가지고 땅을 샀다, 뭘 했다, 하는데. 나는 내가 봤을 때 집 짓는 데 썼을 것 같은데, 뭐 안 그러면 그 돈이 어디 갈 데도 없거든. 그러니까 지금도 안 물어봤지. 안 물어봤고 뭐, 형님이라도 형님한테 물어보고 하기도 그러거든. 그런데 뭐 형님 인제 돌아갔고. (웃음) .얘기는 않더라고요. 한 번도, 그 돈을 얼마가 와가지고 얼마 썼다, 그런 얘긴. 나는 그래서 그 돈이 집으로 가기나 갔는가. 갔으면 얘기할텐데 얘기를 안 하더라고. 아직까지 내가 한 번도 안 물어봤고.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안 그러면, 시골에서 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잖아.
"난 대위 안 올라가고 중위 봉급 주고 평생 거기 있으면 된다고 그랬어"
#운명
세월이 흐르고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날, 참 그게 난 운명이라고 딱 생각하는 게, 형님이 인제 나중에 퇴근하고 오면서 뭘 봤냐면, 3사관학교 인원 모집하는 걸 보고 왔어. 그때 3사 생긴 지가 얼마 안 됐지. 그래가지고 형님이 전단지를 갖고 와서 "야 니 이거 함 시험 봐볼래" 그러더라고. 근데 노는 놈이 또 안 본다고 할 수 없잖아. 봐 가지고 떨어져도 관계없지만. 그래 가지고 인제 시험을 봤어. 그러고 인제 좀 쉬는데, 시골 갔다가 올라왔더니 합격했다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얘를 군대 넣을라고 했던 거잖아. 그런데 안 됐던 거를 다시 아들이 이렇게 엮어가지고 가는구나, 그래서 '야 나는 결국은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구나.' 맞잖아요. 지금도 내가 군복 입고, 어제도 내가 군복 입고 어디야, 광화문을 갔다 왔지만. 광화문이 아니야. 시청 앞에.
(중략) 아이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인제 살아보고서 사람들한테 그래. 오늘, 우리가 만난 것도 다 정해져 있으니까, 그냥 웃으면서 만나라, 이거지. 운명으로 만나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뭐 마음 편하더라고. 그러니까 누가 그건 나약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했는데, 나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편해. 노력한다고 다 잘되면 누가 안 할 사람이 어딨냐고.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버글버글 하잖아. 노력 안 해도 생각도 안 하는 놈이 국회의원 되기도 하듯이. 그래서 사람이 노력하되 안 되는 건 그냥 빨리 인정하고, 우선 살다 보면 또 더 좋은 날 오겠다- 그랬더니, 누가 그래. "맨날 좋은 날 온다는데 언제가 좋은 날 오냐." 그럼 내가 “가만히 있어봐. 아직 덜 됐나 봐.”라고 해. (웃음)
"야 나는 결국은 군복을 입고 살아갈 운명이었구나"
최홍희와의 만남
베트남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세대로서 내게 최홍희와의 만남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비전형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구술자의 기억을 통해 만나는 역사가 국가적, 전형적 역사를 벗어난, 확장된 기록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서로 이해할 수 없게된 지점들을 만남을 통해 드러내고, 충돌하면서 서로의 세계에 균열을 내기를 바란다.
"만남을 통해 드러내고, 충돌하면서 서로의 세계에 균열을 내기를 바란다"
노예주
구술 활동을 진행하며 마주한 소통의 단절 앞에서, 나는 ‘전쟁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단절 역시도 전쟁이라는 폭력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일 것이며, 그 영향이 서로 다른 세대 간의 관계맺기에도 스며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단절에도 불구하고 참전군인이 나누어 준 이야기의 구조적인 기원을 끊임없이 파악하는 시도를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의 현재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지금, 참전군인과의 이러한 듣기와 관계 맺기는 전쟁의 역사를 현재와 분리시키는 것이 아닌, 전쟁 경험자 개인의 역사를 현 세대의 역사와 하나로 잇는 시도가 될 것이다.
"단절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기원을 끊임없이 파악하는 시도를 계속해나가야 한다"
박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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