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오경열과 면담자 석미화, 이응, 솔, 황윤희, 노랭은 두차례 만남을 가졌다. 2023년 07월 13일, 2023년 08월 31일 모두 삼각지의 한 회의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꿈을 깨는 총소리
# 어린 병사
훈련소를 마치고 통신학교 교육 4주를 받고 나서 자대배치 받은 지 3개월 만에 육본에서 베트남 차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갑자기 차출되니까 당시에는 상당히 두려웠어요. 그래서 중대장한테 가서 지금 전쟁터 가기엔 군대 경험도 없고 어린나이인데 빼주시면 안 되겠냐고 얘기했더니 육본에서 명령이 내려와 안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안 가겠다고 거부를 하니까 고참들이 보기에 참 안타까운 거죠. 거부할 일이 아니라서 할 수 없이 다음날 집결지로 갔어요. 헤어지기 싫고, 이제 막 정이 들었는데.
"갑자기 차출되니까 당시에는 상당히 두려웠어요"
# 고엽제
베트남에서 벙커 생활을 한 사람들은 거의 8-90%가 고엽제에 노출돼 있어요. 동그랗게 기지를 만들어 놓으면 이 주변에 전부 고엽제를 이만큼 뿌려 놨는데 이게 전부 안으로 넘어가요. 바람이 어디서 불든지 전 벙커가 다 이렇게 걸레로 이렇게 닦아 놓으면 가루가 하얗게 모아져요. 그걸 모아서 밖에 쓰레기장이나 똥 태우는 데 가서 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이걸 그냥 밖에다 또 버리면 또 밖에 기지에 있는 그 고엽제 가루가 다시 들어와요.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기지 전체가 고엽제 밭이에요.
그 깡통, 사진 속에 그게 전부 고엽제 통이에요. 맥주 마시는 뒤에 새카만 통 그게 고엽제 통이고 다른 통은 휘발유 통이고 그러니까 휘발유통하고 고엽제 통하고는 달라요. 에이전트오렌지라고 이게 전부 고엽제 통이에요. 그게 미국에서 와가지고 기지에 엄청나게 통이 많아요. 그러니까 통으로 거기다 흙 채워서 벙커를 쌓고 그랬거든요.
"기지 전체가 고엽제 밭이에요"
# 전쟁터의 병사
그러니까 다른 사람 감정은 몰라요. 거기서는 다른 사람 감정은 없어요. 그냥 살아가겠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라는 절박함만 있지. 전쟁하기 전에 조용한 평화로운 마을을 우리가 공격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때 그런 마음이 들어요. 즉 평화로운 마을, 닭소리가 꼬꼬꼬 나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럴 때, 그때 우리들이 그걸 보고 있는 적막감이 무섭고 두려워요. 거기에서 이제 가장 큰 바람은 아무도 안 죽기를 바라는 거죠. 작전마다 매번 그런 생각을 해요. 그때 보던 아름다운 광경들은 진짜 평화를, 이렇게 뭐랄까 그 염원했어요. 이런 게 굉장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장갑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바깥 풍경들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정말 아름다운 이국의 모습이에요. 그 아름다운 마을들이 이렇게 평화하고 딱 이렇게 오버랩 되는 거죠.
그니까 이게 전쟁 상황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전쟁만 없었으면 이렇게 안 다녀도 되는데 그리고 이렇게 두려워하지도 않아도 되는데 그런 아주 극과 극의 생각들이 교차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 꿈이 탁 깨지는 거예요. 깨지고 현실이 직시되고 그때는 인제 어떻게 하면 나를 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그런 잠깐의 내가 바랐던 평화의 감정들이 순간 깨지고 전쟁이 주는 공포가 몰려와요. 막상 당하거나 죽어버리면 몰라요. 근데 당하기 전 상황들이 사람을 미치게 해요. 전쟁터에 가면은 군인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이 미쳐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 상황에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해서 전쟁 후유증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전장에서 너무 그 뭐랄까 극으로 모든 저기가 극으로 치닫았을 때 정신을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거죠. 젊은 사람의 감정이 그만큼 연약한데 극도의 공포감은 사람이 감당할수록 더.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 꿈이 탁 깨지는 거예요 깨지고 현실이 직시되고"
#귀환병사
한국 군대 생활의 현실이 너무 열악했고, 또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중대장부터 소대장까지 다 따돌림하고. 그런 상황에서 총기사고가 안 날 수가 없었고. 저도 역시 귀국하고 나서 대대장한테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대장이 자기 부대원을 총살하겠다고 권총 빼서 설치는 상황을 보면서 정말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추운 겨울인지, 늦봄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베트남에서 와서 몇 개월 있다가 이런 상황이 있었고, 그 후 몇 개월 있다가 제대를 했으니까.
영창을 갔는데 베트남 갔다 온 놈이라고, 뭐랄까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헌병들도. 그런데 이제 베트남에서 오면서 제가 미제 야전잠바를 입고 왔어요. 거기 선임하사가 그 옷을 빼앗아 가려고 해서, 정당하게 가져가면 주겠는데 내 옷을 너한테 왜 주느냐. 그래가지고 거기서 엄청나게 많이 맞았죠. 1주일 동안 아주 지겹게 영창에서 맞으면서 살았죠, 뭐. 그렇게 나와서 부대를 나오는 날 이제 머리를 싹 밀어버리더라고. 독종이라고 하면서, 난 제대가 몇 개월 안 남아서 이제 머리 기르고 싶었거든. 근데 이제 머리를 빡빡 깎으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반감도 더 생기고.
연대 영창에서 부대로 돌아갔는데 부대에서 사람들이 다 피하더라고요. 사고 치고 온 걸 아니까. 누구도 간섭을 안 하고 대대장도 간섭을 안 하고 열외가 됐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뭐라고 하면 폭발하고, 그리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튼 누구든지 건들면 그때 난 총기사고 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에요. 그럴 정도로 한국 군대 생활이 너무너무 우리한테는 안 맞았고, 열악했고, 인권유린이 다반사였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견디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와서 보니까 계속 뭐랄까 군대에서 싸운 생각, 그다음에 동료들이 죽어가는 생각, 그리고 사회가 나를 볼 때, 굉장히 나를 이렇게 뭐랄까, 굉장히 위협하고 있는 그런 이질감을 내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성찰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자의든 타의든 저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해요. 저는 제 가족에게도 베트남 갔다 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제 아내도 몰랐어요. 제가 이제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수배당하고, 도망을 다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 자취방이나 이런 데는 책이나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 내 기록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제 기록을 제 형님 집에다가 숨겨놓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형님 집에 꽂아 놓은 사이에 앨범 하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앨범을 보고 내가 기억을 한 거죠. 월남이라는 곳을 내가 다녀왔구나.
저한테는 잊힌 전쟁이고 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악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어요. 베트남 전쟁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면서부터, 내가 이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여를 하게 되고 하나의 구성원이 됐었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로 너무 부끄러운 거죠. 우리가 어찌 됐든 침략병이잖아요. 남의 나라 전쟁하는데 우리나라가 간 거잖아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 가지고 미군은 오만 명 죽고, 우리는 10분의 1인 오천 명 죽고. 근데 젊은이 오천 명이 사회의 일꾼이 됐다면 사회 곳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서 그런 부채 의식 때문에 베트남에 가서 내가 뭐라도 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 그러니까 다른 참전군인들도 대부분 그런 마음들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지난번에 퐁니퐁넛 학살 사건에서 정부가 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었던 판례가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어떤 위로금이라도 반드시 전달됐으면 하는 게 인제 소망이고.
또 저는 전투에서 뭐 민간인이 희생되고 이런 것들은 보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면 전투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얘기해 줄 때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 과장되게 얘기는 사람들이 하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근데 그 전투 현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이렇게 들어보면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게 더러 있다는 얘기를 제가 들었어요.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이제 귀를 잘라가지고 씨레이션 소금으로 절여서 배낭에다 끼워가지고 말리고 작전 끝나면 전과 보고한다고. 그렇게 했던 상황을 직접 배낭에 메고 온 장병 장병한테 들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자의든 타의든 저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해요"
# 다시 베트남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어떤 성취도 이루어 내고 했지만, 늘 정신적으로 쫓겨 다녔어요 항상. 내가 수배당하면 아내 학교 부근에서 아내를 미행하고 그러니까 굉장히 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입어요. 그런 상황에서 인제 베트남이라는 곳이 떠올라요. 그 어떤 것하고 베트남 당시 상황하고 오버랩 될 때가 있어요.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베트남으로 들어가 봤지. 혼자 배낭여행으로. 우리하고 전투를 했는데 이 사람들을 어떤 상황에서 전투를 했는지 그런 상황들을 비교해 보고 싶었어. 수교 당시까지도 현장감이 살아있었는데 그 이후로 베트남을 가보니까 많은 것들이 바뀌었더라고.
라이따이한 문제가 그때 심각하게 대두되고 또 한국 아이들이 거기서 많이 역차별당하고 엄마는 한국 애를 낳았다고 해가지고 국가로부터도 굉장히 많은 차별을 받고 그래서 그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수교도 됐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거기를 더 갔던 거 같아. 호치민 한인회를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없을까. 국내에서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시켜서 아이들이 여기에서 차별받지 않게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부분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많이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부채 의식으로 많이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오경열과의 만남
어떤 이들에게 베트남 전쟁의 기억은 영웅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소환되기도 하며, 젊은 시 절 “남자라면 한 번쯤”의 호기로 치러진 추억이야기 이거나, “자유 수호”를 위한 “국가의 부 름"에 충성스런 선택을 한 '자랑스런'이야기로 회자된다. 하지만 오경열 참전군인의 전쟁은 참혹함, 두려움, 무서움이라는 감정을 겪어내야 했던 순간의 연속이었고 그런 고통의 감정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의 이야기에는 어려서부터 경험한 폭력적 상황들 초등학교 4학년 폭력 교사, 군대 내 폭력, 고문 피해, 고엽제 피해 - 이 일관되게 주요한 서 술 맥락으로 차지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억울함, 고통, 저항은 전장의 기억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중요 분기점에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폭력과 부조리에 대해 말할 때 드러낸 분노들은 두려움을 숨기려는 회피가 아니라 고통을 감정을 대면하려는 그의 내적 부딪 힘의 목소리였다. 그러한 분노는 시간이 흐른 지금, 전쟁을 밀어내는 마음, 즉 평화에 대한 자 기 성찰의 의지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경열 참전군인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정말 사람답게 좀 살아보고 싶다”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베트남 에 대한 트라우마들이 어느 정도 잊혀진 계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국위선양, 국익을 위한 참전은 국가의 파병논리와 겹친다. 개인의 참전 경험과 국가의 파병 논리는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사후 보상을 '잘' 충분히 한다고 전쟁 파병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가 동원의 '피해자’이자, 고엽제 피해자인 참전군인의 명예회복이 다시 국가와 의 관계로 환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여기 우리의 듣기의 자리에는 참전군인의 전장의 기억과 연결될 실천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의 참전 이야기와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말 되어지지 못한' 참전군인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오랜 부정과 억압의 요소가 무엇 인지 또 '널리 알려진' 참전군인의 이야기에서 드리워진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전형성이 가지 는 왜곡과 함정은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의 참전 이야기와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황윤희
전쟁의 기억은 총과 포가 오가는 전장의 기억만이 아니다. 우리는 오경열의 배를 처음 탄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었고, 그가 작전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맥주와 음식을 배 터지게 마시고 먹었던 기억을 듣기도 했다. 그는 월남의 기억을 전부 끔찍하게 기억하지만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총을 드는 선택을 한 이유는 그들이 유난히 나쁘다거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차출되어서, 입 하나 덜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등 그들을 전쟁터로 이끄는 이유는 매우 다양했고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다양한 이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전장 안에서도 다양한 삶과 하루하루를 만들어 갔다. 총 끝은 결국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 구조를 유지하는 이들은 작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들이 너무 일상적이라는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그들의 입으로 듣는 전쟁이 너무 멀게 느껴지면서도, sns만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는 전쟁 소식에 ‘현재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구나’를 느끼며 살아간다. 인터넷 스크롤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접할 수 있게 된 지금, 참전군인의 표정과 언어를 통해 전쟁을 전해 듣는다는 것은 생소한 동시에 새롭다. 전쟁 당사국을 따지며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것에 심취하고, 연민을 콘텐츠로 삼는 사회에서 참전군인의 구술은 나 또한 전쟁을 일으키는 구조 그 어딘가에 속해있진 않은지 묻는다. 우리는 폭력의 구조를 상쇄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에 오경열은 현재의 자신의 삶을 ‘자연인’으로 소개했다. 그는 16년간 판소리 명창의 아들로 자랐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방황하는 마음 속에서 군에 입대했다. 군 입대를 계기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민주화운동을 거쳐 다시 국악예술을 전공하는 소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멈추고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주변에 관계하는 이들의 영향이 분명 존재한다. 오경열의 삶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회고’, ‘성찰’의 키워드가 아른거린다. 그의 삶을 성찰하고 흐르게 한 힘은 무엇일까. 소리일까. 평화일까.
이름: 오경열
부대: 맹호부대 26연대(혜산진부대) 3대대 9중대
참전 시기: 1970~1972년 참전 (1년 7개월)
키워드: #어린병사 #귀환병사 #성찰
구술자 오경열과 면담자 석미화, 이응, 솔, 황윤희, 노랭은 두차례 만남을 가졌다. 2023년 07월 13일, 2023년 08월 31일 모두 삼각지의 한 회의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꿈을 깨는 총소리
# 어린 병사
훈련소를 마치고 통신학교 교육 4주를 받고 나서 자대배치 받은 지 3개월 만에 육본에서 베트남 차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갑자기 차출되니까 당시에는 상당히 두려웠어요. 그래서 중대장한테 가서 지금 전쟁터 가기엔 군대 경험도 없고 어린나이인데 빼주시면 안 되겠냐고 얘기했더니 육본에서 명령이 내려와 안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안 가겠다고 거부를 하니까 고참들이 보기에 참 안타까운 거죠. 거부할 일이 아니라서 할 수 없이 다음날 집결지로 갔어요. 헤어지기 싫고, 이제 막 정이 들었는데.
"갑자기 차출되니까 당시에는 상당히 두려웠어요"
# 고엽제
베트남에서 벙커 생활을 한 사람들은 거의 8-90%가 고엽제에 노출돼 있어요. 동그랗게 기지를 만들어 놓으면 이 주변에 전부 고엽제를 이만큼 뿌려 놨는데 이게 전부 안으로 넘어가요. 바람이 어디서 불든지 전 벙커가 다 이렇게 걸레로 이렇게 닦아 놓으면 가루가 하얗게 모아져요. 그걸 모아서 밖에 쓰레기장이나 똥 태우는 데 가서 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이걸 그냥 밖에다 또 버리면 또 밖에 기지에 있는 그 고엽제 가루가 다시 들어와요.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기지 전체가 고엽제 밭이에요.
그 깡통, 사진 속에 그게 전부 고엽제 통이에요. 맥주 마시는 뒤에 새카만 통 그게 고엽제 통이고 다른 통은 휘발유 통이고 그러니까 휘발유통하고 고엽제 통하고는 달라요. 에이전트오렌지라고 이게 전부 고엽제 통이에요. 그게 미국에서 와가지고 기지에 엄청나게 통이 많아요. 그러니까 통으로 거기다 흙 채워서 벙커를 쌓고 그랬거든요.
"기지 전체가 고엽제 밭이에요"
# 전쟁터의 병사
그러니까 다른 사람 감정은 몰라요. 거기서는 다른 사람 감정은 없어요. 그냥 살아가겠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라는 절박함만 있지. 전쟁하기 전에 조용한 평화로운 마을을 우리가 공격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때 그런 마음이 들어요. 즉 평화로운 마을, 닭소리가 꼬꼬꼬 나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럴 때, 그때 우리들이 그걸 보고 있는 적막감이 무섭고 두려워요. 거기에서 이제 가장 큰 바람은 아무도 안 죽기를 바라는 거죠. 작전마다 매번 그런 생각을 해요. 그때 보던 아름다운 광경들은 진짜 평화를, 이렇게 뭐랄까 그 염원했어요. 이런 게 굉장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장갑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바깥 풍경들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정말 아름다운 이국의 모습이에요. 그 아름다운 마을들이 이렇게 평화하고 딱 이렇게 오버랩 되는 거죠.
그니까 이게 전쟁 상황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전쟁만 없었으면 이렇게 안 다녀도 되는데 그리고 이렇게 두려워하지도 않아도 되는데 그런 아주 극과 극의 생각들이 교차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 꿈이 탁 깨지는 거예요. 깨지고 현실이 직시되고 그때는 인제 어떻게 하면 나를 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그런 잠깐의 내가 바랐던 평화의 감정들이 순간 깨지고 전쟁이 주는 공포가 몰려와요. 막상 당하거나 죽어버리면 몰라요. 근데 당하기 전 상황들이 사람을 미치게 해요. 전쟁터에 가면은 군인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이 미쳐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 상황에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해서 전쟁 후유증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전장에서 너무 그 뭐랄까 극으로 모든 저기가 극으로 치닫았을 때 정신을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거죠. 젊은 사람의 감정이 그만큼 연약한데 극도의 공포감은 사람이 감당할수록 더.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 꿈이 탁 깨지는 거예요 깨지고 현실이 직시되고"
한국 군대 생활의 현실이 너무 열악했고, 또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중대장부터 소대장까지 다 따돌림하고. 그런 상황에서 총기사고가 안 날 수가 없었고. 저도 역시 귀국하고 나서 대대장한테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대장이 자기 부대원을 총살하겠다고 권총 빼서 설치는 상황을 보면서 정말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추운 겨울인지, 늦봄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베트남에서 와서 몇 개월 있다가 이런 상황이 있었고, 그 후 몇 개월 있다가 제대를 했으니까.
영창을 갔는데 베트남 갔다 온 놈이라고, 뭐랄까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헌병들도. 그런데 이제 베트남에서 오면서 제가 미제 야전잠바를 입고 왔어요. 거기 선임하사가 그 옷을 빼앗아 가려고 해서, 정당하게 가져가면 주겠는데 내 옷을 너한테 왜 주느냐. 그래가지고 거기서 엄청나게 많이 맞았죠. 1주일 동안 아주 지겹게 영창에서 맞으면서 살았죠, 뭐. 그렇게 나와서 부대를 나오는 날 이제 머리를 싹 밀어버리더라고. 독종이라고 하면서, 난 제대가 몇 개월 안 남아서 이제 머리 기르고 싶었거든. 근데 이제 머리를 빡빡 깎으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반감도 더 생기고.
연대 영창에서 부대로 돌아갔는데 부대에서 사람들이 다 피하더라고요. 사고 치고 온 걸 아니까. 누구도 간섭을 안 하고 대대장도 간섭을 안 하고 열외가 됐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뭐라고 하면 폭발하고, 그리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튼 누구든지 건들면 그때 난 총기사고 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에요. 그럴 정도로 한국 군대 생활이 너무너무 우리한테는 안 맞았고, 열악했고, 인권유린이 다반사였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견디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와서 보니까 계속 뭐랄까 군대에서 싸운 생각, 그다음에 동료들이 죽어가는 생각, 그리고 사회가 나를 볼 때, 굉장히 나를 이렇게 뭐랄까, 굉장히 위협하고 있는 그런 이질감을 내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자의든 타의든 저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해요. 저는 제 가족에게도 베트남 갔다 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제 아내도 몰랐어요. 제가 이제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수배당하고, 도망을 다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 자취방이나 이런 데는 책이나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 내 기록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제 기록을 제 형님 집에다가 숨겨놓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형님 집에 꽂아 놓은 사이에 앨범 하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앨범을 보고 내가 기억을 한 거죠. 월남이라는 곳을 내가 다녀왔구나.
저한테는 잊힌 전쟁이고 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악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어요. 베트남 전쟁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면서부터, 내가 이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여를 하게 되고 하나의 구성원이 됐었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로 너무 부끄러운 거죠. 우리가 어찌 됐든 침략병이잖아요. 남의 나라 전쟁하는데 우리나라가 간 거잖아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 가지고 미군은 오만 명 죽고, 우리는 10분의 1인 오천 명 죽고. 근데 젊은이 오천 명이 사회의 일꾼이 됐다면 사회 곳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서 그런 부채 의식 때문에 베트남에 가서 내가 뭐라도 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 그러니까 다른 참전군인들도 대부분 그런 마음들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지난번에 퐁니퐁넛 학살 사건에서 정부가 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었던 판례가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어떤 위로금이라도 반드시 전달됐으면 하는 게 인제 소망이고.
또 저는 전투에서 뭐 민간인이 희생되고 이런 것들은 보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면 전투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얘기해 줄 때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 과장되게 얘기는 사람들이 하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근데 그 전투 현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이렇게 들어보면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게 더러 있다는 얘기를 제가 들었어요.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이제 귀를 잘라가지고 씨레이션 소금으로 절여서 배낭에다 끼워가지고 말리고 작전 끝나면 전과 보고한다고. 그렇게 했던 상황을 직접 배낭에 메고 온 장병 장병한테 들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자의든 타의든 저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해요"
# 다시 베트남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어떤 성취도 이루어 내고 했지만, 늘 정신적으로 쫓겨 다녔어요 항상. 내가 수배당하면 아내 학교 부근에서 아내를 미행하고 그러니까 굉장히 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입어요. 그런 상황에서 인제 베트남이라는 곳이 떠올라요. 그 어떤 것하고 베트남 당시 상황하고 오버랩 될 때가 있어요.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베트남으로 들어가 봤지. 혼자 배낭여행으로. 우리하고 전투를 했는데 이 사람들을 어떤 상황에서 전투를 했는지 그런 상황들을 비교해 보고 싶었어. 수교 당시까지도 현장감이 살아있었는데 그 이후로 베트남을 가보니까 많은 것들이 바뀌었더라고.
라이따이한 문제가 그때 심각하게 대두되고 또 한국 아이들이 거기서 많이 역차별당하고 엄마는 한국 애를 낳았다고 해가지고 국가로부터도 굉장히 많은 차별을 받고 그래서 그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수교도 됐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거기를 더 갔던 거 같아. 호치민 한인회를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없을까. 국내에서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시켜서 아이들이 여기에서 차별받지 않게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부분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많이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부채 의식으로 많이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오경열과의 만남
어떤 이들에게 베트남 전쟁의 기억은 영웅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소환되기도 하며, 젊은 시 절 “남자라면 한 번쯤”의 호기로 치러진 추억이야기 이거나, “자유 수호”를 위한 “국가의 부 름"에 충성스런 선택을 한 '자랑스런'이야기로 회자된다. 하지만 오경열 참전군인의 전쟁은 참혹함, 두려움, 무서움이라는 감정을 겪어내야 했던 순간의 연속이었고 그런 고통의 감정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의 이야기에는 어려서부터 경험한 폭력적 상황들 초등학교 4학년 폭력 교사, 군대 내 폭력, 고문 피해, 고엽제 피해 - 이 일관되게 주요한 서 술 맥락으로 차지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억울함, 고통, 저항은 전장의 기억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중요 분기점에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폭력과 부조리에 대해 말할 때 드러낸 분노들은 두려움을 숨기려는 회피가 아니라 고통을 감정을 대면하려는 그의 내적 부딪 힘의 목소리였다. 그러한 분노는 시간이 흐른 지금, 전쟁을 밀어내는 마음, 즉 평화에 대한 자 기 성찰의 의지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경열 참전군인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정말 사람답게 좀 살아보고 싶다”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베트남 에 대한 트라우마들이 어느 정도 잊혀진 계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국위선양, 국익을 위한 참전은 국가의 파병논리와 겹친다. 개인의 참전 경험과 국가의 파병 논리는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사후 보상을 '잘' 충분히 한다고 전쟁 파병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가 동원의 '피해자’이자, 고엽제 피해자인 참전군인의 명예회복이 다시 국가와 의 관계로 환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여기 우리의 듣기의 자리에는 참전군인의 전장의 기억과 연결될 실천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의 참전 이야기와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말 되어지지 못한' 참전군인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오랜 부정과 억압의 요소가 무엇 인지 또 '널리 알려진' 참전군인의 이야기에서 드리워진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전형성이 가지 는 왜곡과 함정은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의 참전 이야기와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황윤희
전쟁의 기억은 총과 포가 오가는 전장의 기억만이 아니다. 우리는 오경열의 배를 처음 탄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었고, 그가 작전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맥주와 음식을 배 터지게 마시고 먹었던 기억을 듣기도 했다. 그는 월남의 기억을 전부 끔찍하게 기억하지만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총을 드는 선택을 한 이유는 그들이 유난히 나쁘다거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차출되어서, 입 하나 덜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등 그들을 전쟁터로 이끄는 이유는 매우 다양했고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다양한 이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전장 안에서도 다양한 삶과 하루하루를 만들어 갔다. 총 끝은 결국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 구조를 유지하는 이들은 작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들이 너무 일상적이라는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그들의 입으로 듣는 전쟁이 너무 멀게 느껴지면서도, sns만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는 전쟁 소식에 ‘현재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구나’를 느끼며 살아간다. 인터넷 스크롤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접할 수 있게 된 지금, 참전군인의 표정과 언어를 통해 전쟁을 전해 듣는다는 것은 생소한 동시에 새롭다. 전쟁 당사국을 따지며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것에 심취하고, 연민을 콘텐츠로 삼는 사회에서 참전군인의 구술은 나 또한 전쟁을 일으키는 구조 그 어딘가에 속해있진 않은지 묻는다. 우리는 폭력의 구조를 상쇄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에 오경열은 현재의 자신의 삶을 ‘자연인’으로 소개했다. 그는 16년간 판소리 명창의 아들로 자랐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방황하는 마음 속에서 군에 입대했다. 군 입대를 계기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민주화운동을 거쳐 다시 국악예술을 전공하는 소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멈추고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주변에 관계하는 이들의 영향이 분명 존재한다. 오경열의 삶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회고’, ‘성찰’의 키워드가 아른거린다. 그의 삶을 성찰하고 흐르게 한 힘은 무엇일까. 소리일까. 평화일까.
"우리는 폭력의 구조를 상쇄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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