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7일 저녁 7시, '병사'를 주제로 하는 두 번째 공론장이 열렸다. 이번 공론장의 관심사는 '탈영'으로 제목은 <병사들의 '도망' - '탈영'의 정치성과 저항으로서의 가능성>이다. 모리타 가즈키/森田和樹(도시샤대학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의 2024년 논문인 「'돌아온 탕자': 수기를 통해서 본 탈영의 정치성과 군 당국의 '탈-정치적 상징성' 전략」과 2022년에 쓴「1950년대 한국군 탈영의 동태와 그 양상」, 두 개의 논문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모리타 가즈키는 한국 사회에서 ‘탈영’에 대한 정치적 특성을 살피고 ‘도주권’과 ‘틈’ 이라는 언어로 탈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탈영의 정치성에 대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국가가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불복종'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군에서 발간한 7명의 탈영병 수기를 통해 그들이 자신의 도망을 뉘우치고 고치는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이것을 일반적인 탈영병 이야기로 확산하고 탈영을 병사가 되는 과정에서 일탈한 '개인의 실패'로 돌리려는 군의 지배전략을 분석하였다.
또한 시기별로 탈영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탈영 규모 등이 변화해왔다며 ‘탈영’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가능성과 현재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탈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가 제시한 '도망'과 '도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대'와 '병역'에 대한 관심갖고 함께한 청중들의 의견도 뜨거웠다. 그 현장의 이야기를 나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장한길 저는 장한길이라고 합니다. 탈영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탈영의 일반적인 의미에서보다 탈영이 이루어진 장소에서 나오는 정체성이 더 강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 전쟁에 동원된 미군이 탈영을 할 때는 되게 강한 정체성을 갖게 되지만 같은 시기에 미국 안에 있는 향토방위군에서 탈영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탈영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파병되었고 그 탈영에 대해서 조명을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첫 번째 논문에서 언급한 도주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요. 한국 사회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인데, 베트남 전쟁에서는 그렇게 가능한 공간이 아쉽게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가서야 베트남 반전 운동하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사회 안에서는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저항이나 반대 운동 등 큰 움직임이 그렇게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탈영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일본까지 가게 되면 (탈영병) 김동희가 보여주듯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군대에서도 가능성 자체는 항상 있었는데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좀 어려운 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심아정 이 발표 전에 사전회의를 진행했는데 그때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탈영이라는 행위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어떻게 수용되고 수용되지 않은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획득하는 주체성도 다르고, 주체화 과정도 달라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탈영병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어려움 속에 연유가 있었다고 답변해주신 것 같습니다.
백승덕 제가 찾은 자료에 관해서도 의견을 좀 듣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 연구가 가지는 급진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성'이라는 것인데요. 정치성을 탈각시키고 최대한 탈영이라는 것을 사사화 하는데 어떻게 통치 권력이 성공했는지 그 과정들을 잘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치성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이제 정치성이 탈각되었다고 생각할 때 중요한 지점이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연구 과정에서도 계속 변화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지점을 묻고 싶고요. 그것과 관련해서 사사화의 반대가 정치라고 이야기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까, 사사화와 탈각된 정치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무장 탈영이라는 명령이 어찌 보면 탈영을 사사화하고 혹은 문제적 행위로 만드는데 굉장히 성공하게 만들었던 명령인 것 같기는 해요. 말씀해주셨던 내용들에서 흥미로웠던 게 도망이라는 개념과 탈영이라는 개념이 크로스되는 그 시점에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는데 찾다가 보니까 군 형법에는 근무 이탈죄가 있는데 62년에 전면 개정된 이전에는 군 형법 대신 국방 경비법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군정 시기에 있었던 조선 경비대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그게 임시법으로 계속 유지되어 왔었는데 거기에 보면 도망병이라는 개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개념이 어디서 왔느냐 또 찾아보면 미국의 전시 형법에서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법에서 영어로 도망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못 찾아봤습니다. 그렇긴 한데 어떤 계보들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망이라는 개념을 군무 이탈로 바꿨을 때 어떤한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게 혼재되다가 나중에 되어서야 탈영으로 되었을 때 받아들이는 수용자들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도망과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였을까, 실제로 그렇게 쓰였을까? 기자나 군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역으로 이렇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은데 그런 점들과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혹시 발견했거나 검토했던 내용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문법 혹은 문법 자체는 알고 있지만 그 개정 내용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서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사실 도망병이라는 명명 자체는 식민지,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많이 쓰여 지기도 해요. 그래서 되게 복잡한데, 도망이라는 것을 언어 차원으로 생각할 때 도망병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와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이란 게 무엇인가 라는 점은 어려워서 항상 고민하는 부분인데요. 그런데 랑시에르였나요?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주어진 역할, 사회적인 역할이나 아니면 제 해석이지만, 국가가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날 때 정치가 생긴다는 말을 염두해 두고 있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정치성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는 한데 저도 아직 답을 못 찾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랑시에르가 말했던 주어진 의무나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이렇게 살아라 라는 것에서 이탈할 때 생기는 무엇인가 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나중에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아정 사전회의 때에도 그 정치에 관련해서도 저 또한 거의 비슷한 질문을 했었어요. 정치라는 것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사사로운 것들 그러니까 사사로운 이유로 탈영을 하거나 병역 거부를 했을 때 그것이 정치성을 띈다, 안 띈다 이렇게 구분지어서 말을 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질문을 했는데요. 앞서서 얘기해주었던 것에서 보태서 사전 회의에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단 국방의 의무, 국가가 명령한 것에 대한 불복종으로서의 의미를 크게 가져가고 싶다고 강조했던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미화라고 합니다. 저는 주로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들을 만나뵙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공유해주신 두 논문 중 <돌아온 탕자>에 관한 이야기를 비중을 두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50년대 탈영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징병제라고 하는 게 52년 한국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봤을 때 53년부터 63년까지 도주권 혹은 틈으로 허용된 사회적 도망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표현을 해주었거든요. 베트남 파병이 64년부터 시작되고, 그 시기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군대에서 도망을 많이 갔다고 해요. 전쟁터에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신문에도 보도도 되지 않았기에 주목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도망에 대해서는 의미 있게 살피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65-66년 시기 해병대로 파병되었던 참전군인 한 분이 있는데 전라도 지역 출신이라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셨는데, 전라도 놈들 때문에 철조망이 생겼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몇 명 빼고 훈련이 힘들고 전쟁하기 무서워 많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전쟁에 가게 되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도망하라고 애원하던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데 여기서 분석하기로는 63년 시기라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참전군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68년도 121 사건 이후 징병제가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그런 틈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얘기하신 도주권이나 틈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그 징집제의 어떤 과도기적인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어떤 권리로 해석되기 보다는 제도의 정착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다고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기간으로 잡으신 63년도보다 좀 더 길게 68년이라는 시점을 적용해보는 게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탈영은 불복종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이라고 하셨는데 동의하지만 탈영이 여러 가지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도 생각 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감사합니다. 68년까지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말씀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논문에서 아직 거기까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63년에 멈춰있습니다. 한편으로 탈영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주민등록법이 중요했는데 도망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그랬을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장 탈영이라는 것을 국가가 발명하는 것으로 인해서 탈영이라는 말에 대한 감각 혹은 도망치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상력을 바꿔 버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70년대 전까지는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전에는 왜 남자가 되어서 도망 나오냐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로 일반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70년대를 거쳐 탈영병이라는 존재를 무서운 존재를 만드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탈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일단 무서운 존재,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파급시키는 가정을 통해 탈영이라는 게 완전히 할 수 없는 권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사회가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제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 자체를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역시 주민등록법뿐만 아니라 70년대 역사적인 과정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책임의 문제는 중요한 부분인데 제가 항상 생각한 것은, 오늘도 단순화해서 얘기했지만 탈영의 동기라는 것을 사실 애인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 등으로 도망치는 행위라는 식으로 뭔가 단순화시켜서 한 가지로 설명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상황이 갑자기 겹치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군 당국은 계속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거기에 맞춰 해석하려고 하니까 대게 위험한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최대한 부대 안에서의 문제를 가지고 탈영을 했다는 사실을 없애려고 하니까 개인적인 문제, 애인의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바로 애인 문제로 정리해버리는 현상도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책임의 문제가 뒤따르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군 당국이 발표하는 자료를 그대로 읽은 것만으로는 탈영병의 실제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질문이 저 또한 많습니다.
김선우 70년대 이후 무장 탈영 얘기들을 들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이 시기에 무장 탈영 뿐만 아니라 내무반 안에서의 총기 사건 등도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빈도가 적었는데 그 시기부터 늘어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많이 보도가 되었어요. 이를테면 해병대의 누군가가 무장탈영을 해서 쫓아오던 군인도 죽이고 민간인도 살해했다는 식의 보도들이 나오는데, 사실 이런 보도들을 보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는 식의 말이 덧붙여 설명되어 나와요. 거기에 또 따라붙는 것이 이 사람들은 정신 착란에 의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은 그냥 단순히 설명한 것이고 방점은 정신착란, 그러니까 탈영은 한 사람들은 정신이 막 어떻게 나가 버려가지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데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선입견이 작동했을까? 무장탈영이라는 말이 발명되는 과정에서 베트남 전쟁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트라우마, PTSD 이런 것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억압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탈영의 정치성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주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리타 선생님이 연구하는 시기에서 벗어나지만 94년 무장을 한 장교들이 탈영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해요. 병장이 소위의 뺨을 때렸고 상부에 보고를 했지만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아 무기를 들고 탈영을 한 거죠. 당시 기사에서는 장교들의 최초의 무장 탈영이었다고 했는데, 사실 최초는 아닐 것이고 이 최초라는 말의 의미는 정치적인 이유로 탈영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일종의 시위였던 것인데, 사실 어떻게 보면 상부의 명령에 대해서 불복종을 한 것이고 이것이 담론화 되는 과정속에서 군민주화의 부작용으로 너무 지나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민주화가 지나치게 되니까 병사들이 해이해져서 소위 뺨도 때리고 이런 식으로 보도해서 군민주화에 어떤 제동을 걸고자 하는 시도로서 담론화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영의 정치성이라는 게 항상 전쟁에 대한 반대로만 담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사한 사례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군민주화라는 사회적 흐름에 어떤 제동을 거는 것으로 담론화의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리타 가즈키 너무 중요한 지적 감사합니다. 첫 번째에 대한 지점에 대해서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좀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신 대로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사실 도망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도망이라기보다 강도가 되기도 해서 사회질서와 사람을 해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탈영의 맥락이 확실히 반전이나 사회운동 쪽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94년 그 사건이 저도 얼마 전에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어요. 그 선생님께서 94년도에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이라고 말씀해주었어요. 근데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간부들이 탈영할 때는 오히려 일반 다른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케이스가 많다고 들었어요. 탈영한 장교가 중간 계급이었고 간부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낮은 사람들이 오히려 일반 사병으로부터 일을 당해서 그게 너무 부끄러워 도망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건 진짜 어려운 문제라고 느꼈어요. 아직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심아정 70년대 무장 탈영이 증가한 이유가 군대 안에서의 폭력이 강화되는 측면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시기적으로 볼 때 당시의 PTSD나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처음 장한길 선생님께서 질문해주셨던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탈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질문해 주신 것과 연결이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서로 찾아볼 게 생긴 게 재미있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하네요. 우리가 놓치고 온 것들인 것 같아요. 그 시대에 놓치고 온 것들이 링크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게 무장 탈영의 서사를 만들어온 것 같고 이런 걸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슬기 무장탈영이라는 말이 계속 고민하게 되어서 쉬는 시간 동안 좀 찾아보고 생각을 좀 해보게 되었는데요. 무장탈영이라고 했을 때 저는 무장 공비가 같이 떠올랐거든요. 무장 탈영이라는 말이 어떤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아마 무장 공비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세계적으로 반전과 평화의 운동들을 촉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탈영에 대해서도 아마 한국이 분단된 사회였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떤 경쟁이나 체제의 대립 같은 것들이 맥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무장 탈영과 무장 공비를 검색창에 같이 검색해봤더니 ‘진돗개’라는 것이 뜨더라고요. 국지적 경계 태세를 말하는 진돗개를 설명하는 말에 무장 공비 침투, 무장 탈영 등 국지적 위협 상태에 따른 방어 준비 태세를 진돗개라고 합니다. 무장 공비와 무장 탈영의 영역에서 같이 사용되는 것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서 맥락 속에서 연결되어 있고 그 연속선상에서 무장 탈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획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최현숙 저도 아까 정체성과 사상화 관련해서 고민이 되는 단어들입니다. 저는 홈리스 판에서 가능하면 노숙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중 어느 50대 후반의 남성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탈영을 3번이나 했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의 탈영은 아주 사적인 것이었어요. 애인이 임신한 것을 알았고 그래서 탈영을 처음 했고 며칠 있다가 잡혔지만 부대에서는 탈영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그냥 혼나고 기합받고 며칠 감옥에 갔다 온 게 다라고 하더군요. 이 논문에서처럼 집행유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군대 내부에서도 사건화했다가 골치 아프고 하니까 적당히 덮으면서 지나쳐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사람의 생애사를 들어보면 그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군대에서 취사병을 복무하다 탈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적으로 애인과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탈영 가능성이 훨씬 높은 심리 사회적인 계급, 혹은 젠더적인 여러 가지 이유가 내포되어 있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자식이었어요.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못해서 어머니가 자식 셋을 키우는 빈곤한 가정이었어요. 어머니로부터 많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자기 비하와 자기 소외가 컸고 대학을 진학했어도 1학년 때 현실 도피하듯이 군대로 갔어요. 신입생 환영회 때 만났던 여자와 관계를 했는데 애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아이인지 확신이 없었고 이러저런 상황이 맞물리면서 탈영을 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탈영은 구체적으로 한 인간이 하는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라는 거지요. 정체성이 계급이나 정상성-비정상성 등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거라고 할 때 국가나 군대는 그 얽혀있는 상황을 단순히 사적인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그것들에 대해 여러 해석과 새로운 구성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제가 사실 도주권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중에서 금방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서사성입니다.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도망치는 사람이 정말 많았거든요, 개인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사회전체로 뭔가 있었다는 게 전제되어야 하고, 개인적인 이유들이 모여서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감수성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도주권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반대로 그런 심리 상태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군대가는 사람들도 언제든 도망쳐도 문제가 없다는 발상 자체가 많이 있었어요. 68년 전까지는 반전 사상이라는 쪽으로 설명하지 않았던 요소 중 하나는 그렇게 주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편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군대니까 하는 발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도망쳐도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고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피해를 꼭 받았던 것이 아니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심아정 그럼 오늘의 마무리 발언을 듣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해주신 질문들로 열띤 토론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런 자리가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그럼 마지막 말에 앞서 오늘 발표해주신 선생님께도 박사 논문 파이팅하라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리타 가즈키 이런 기회를 가진 것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럽고요. 제 연구 주제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있는 사람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무리 말은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 고맙습니다. 제 박사 논문은 꼭 한국어로 낼 것이고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것이 받아 시민사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 사진 노랭
녹취록 정리 최경미(사이다)
지난 8월 27일 저녁 7시, '병사'를 주제로 하는 두 번째 공론장이 열렸다. 이번 공론장의 관심사는 '탈영'으로 제목은 <병사들의 '도망' - '탈영'의 정치성과 저항으로서의 가능성>이다. 모리타 가즈키/森田和樹(도시샤대학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의 2024년 논문인 「'돌아온 탕자': 수기를 통해서 본 탈영의 정치성과 군 당국의 '탈-정치적 상징성' 전략」과 2022년에 쓴「1950년대 한국군 탈영의 동태와 그 양상」, 두 개의 논문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모리타 가즈키는 한국 사회에서 ‘탈영’에 대한 정치적 특성을 살피고 ‘도주권’과 ‘틈’ 이라는 언어로 탈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탈영의 정치성에 대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국가가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불복종'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군에서 발간한 7명의 탈영병 수기를 통해 그들이 자신의 도망을 뉘우치고 고치는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이것을 일반적인 탈영병 이야기로 확산하고 탈영을 병사가 되는 과정에서 일탈한 '개인의 실패'로 돌리려는 군의 지배전략을 분석하였다.
또한 시기별로 탈영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탈영 규모 등이 변화해왔다며 ‘탈영’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가능성과 현재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탈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가 제시한 '도망'과 '도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대'와 '병역'에 대한 관심갖고 함께한 청중들의 의견도 뜨거웠다. 그 현장의 이야기를 나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장한길 저는 장한길이라고 합니다. 탈영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탈영의 일반적인 의미에서보다 탈영이 이루어진 장소에서 나오는 정체성이 더 강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 전쟁에 동원된 미군이 탈영을 할 때는 되게 강한 정체성을 갖게 되지만 같은 시기에 미국 안에 있는 향토방위군에서 탈영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탈영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파병되었고 그 탈영에 대해서 조명을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첫 번째 논문에서 언급한 도주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요. 한국 사회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인데, 베트남 전쟁에서는 그렇게 가능한 공간이 아쉽게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가서야 베트남 반전 운동하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사회 안에서는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저항이나 반대 운동 등 큰 움직임이 그렇게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탈영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일본까지 가게 되면 (탈영병) 김동희가 보여주듯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군대에서도 가능성 자체는 항상 있었는데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좀 어려운 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심아정 이 발표 전에 사전회의를 진행했는데 그때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탈영이라는 행위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어떻게 수용되고 수용되지 않은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획득하는 주체성도 다르고, 주체화 과정도 달라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탈영병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어려움 속에 연유가 있었다고 답변해주신 것 같습니다.
백승덕 제가 찾은 자료에 관해서도 의견을 좀 듣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 연구가 가지는 급진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성'이라는 것인데요. 정치성을 탈각시키고 최대한 탈영이라는 것을 사사화 하는데 어떻게 통치 권력이 성공했는지 그 과정들을 잘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치성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이제 정치성이 탈각되었다고 생각할 때 중요한 지점이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연구 과정에서도 계속 변화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지점을 묻고 싶고요. 그것과 관련해서 사사화의 반대가 정치라고 이야기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까, 사사화와 탈각된 정치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무장 탈영이라는 명령이 어찌 보면 탈영을 사사화하고 혹은 문제적 행위로 만드는데 굉장히 성공하게 만들었던 명령인 것 같기는 해요. 말씀해주셨던 내용들에서 흥미로웠던 게 도망이라는 개념과 탈영이라는 개념이 크로스되는 그 시점에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는데 찾다가 보니까 군 형법에는 근무 이탈죄가 있는데 62년에 전면 개정된 이전에는 군 형법 대신 국방 경비법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군정 시기에 있었던 조선 경비대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그게 임시법으로 계속 유지되어 왔었는데 거기에 보면 도망병이라는 개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개념이 어디서 왔느냐 또 찾아보면 미국의 전시 형법에서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법에서 영어로 도망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못 찾아봤습니다. 그렇긴 한데 어떤 계보들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망이라는 개념을 군무 이탈로 바꿨을 때 어떤한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게 혼재되다가 나중에 되어서야 탈영으로 되었을 때 받아들이는 수용자들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도망과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였을까, 실제로 그렇게 쓰였을까? 기자나 군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역으로 이렇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은데 그런 점들과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혹시 발견했거나 검토했던 내용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문법 혹은 문법 자체는 알고 있지만 그 개정 내용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서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사실 도망병이라는 명명 자체는 식민지,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많이 쓰여 지기도 해요. 그래서 되게 복잡한데, 도망이라는 것을 언어 차원으로 생각할 때 도망병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와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이란 게 무엇인가 라는 점은 어려워서 항상 고민하는 부분인데요. 그런데 랑시에르였나요?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주어진 역할, 사회적인 역할이나 아니면 제 해석이지만, 국가가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날 때 정치가 생긴다는 말을 염두해 두고 있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정치성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는 한데 저도 아직 답을 못 찾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랑시에르가 말했던 주어진 의무나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이렇게 살아라 라는 것에서 이탈할 때 생기는 무엇인가 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나중에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아정 사전회의 때에도 그 정치에 관련해서도 저 또한 거의 비슷한 질문을 했었어요. 정치라는 것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사사로운 것들 그러니까 사사로운 이유로 탈영을 하거나 병역 거부를 했을 때 그것이 정치성을 띈다, 안 띈다 이렇게 구분지어서 말을 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질문을 했는데요. 앞서서 얘기해주었던 것에서 보태서 사전 회의에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단 국방의 의무, 국가가 명령한 것에 대한 불복종으로서의 의미를 크게 가져가고 싶다고 강조했던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미화라고 합니다. 저는 주로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들을 만나뵙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공유해주신 두 논문 중 <돌아온 탕자>에 관한 이야기를 비중을 두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50년대 탈영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징병제라고 하는 게 52년 한국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봤을 때 53년부터 63년까지 도주권 혹은 틈으로 허용된 사회적 도망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표현을 해주었거든요. 베트남 파병이 64년부터 시작되고, 그 시기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군대에서 도망을 많이 갔다고 해요. 전쟁터에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신문에도 보도도 되지 않았기에 주목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도망에 대해서는 의미 있게 살피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65-66년 시기 해병대로 파병되었던 참전군인 한 분이 있는데 전라도 지역 출신이라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셨는데, 전라도 놈들 때문에 철조망이 생겼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몇 명 빼고 훈련이 힘들고 전쟁하기 무서워 많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전쟁에 가게 되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도망하라고 애원하던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데 여기서 분석하기로는 63년 시기라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참전군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68년도 121 사건 이후 징병제가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그런 틈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얘기하신 도주권이나 틈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그 징집제의 어떤 과도기적인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어떤 권리로 해석되기 보다는 제도의 정착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다고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기간으로 잡으신 63년도보다 좀 더 길게 68년이라는 시점을 적용해보는 게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탈영은 불복종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이라고 하셨는데 동의하지만 탈영이 여러 가지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도 생각 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감사합니다. 68년까지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말씀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논문에서 아직 거기까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63년에 멈춰있습니다. 한편으로 탈영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주민등록법이 중요했는데 도망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그랬을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장 탈영이라는 것을 국가가 발명하는 것으로 인해서 탈영이라는 말에 대한 감각 혹은 도망치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상력을 바꿔 버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70년대 전까지는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전에는 왜 남자가 되어서 도망 나오냐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로 일반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70년대를 거쳐 탈영병이라는 존재를 무서운 존재를 만드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탈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일단 무서운 존재,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파급시키는 가정을 통해 탈영이라는 게 완전히 할 수 없는 권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사회가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제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 자체를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역시 주민등록법뿐만 아니라 70년대 역사적인 과정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책임의 문제는 중요한 부분인데 제가 항상 생각한 것은, 오늘도 단순화해서 얘기했지만 탈영의 동기라는 것을 사실 애인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 등으로 도망치는 행위라는 식으로 뭔가 단순화시켜서 한 가지로 설명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상황이 갑자기 겹치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군 당국은 계속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거기에 맞춰 해석하려고 하니까 대게 위험한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최대한 부대 안에서의 문제를 가지고 탈영을 했다는 사실을 없애려고 하니까 개인적인 문제, 애인의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바로 애인 문제로 정리해버리는 현상도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책임의 문제가 뒤따르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군 당국이 발표하는 자료를 그대로 읽은 것만으로는 탈영병의 실제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질문이 저 또한 많습니다.
김선우 70년대 이후 무장 탈영 얘기들을 들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이 시기에 무장 탈영 뿐만 아니라 내무반 안에서의 총기 사건 등도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빈도가 적었는데 그 시기부터 늘어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많이 보도가 되었어요. 이를테면 해병대의 누군가가 무장탈영을 해서 쫓아오던 군인도 죽이고 민간인도 살해했다는 식의 보도들이 나오는데, 사실 이런 보도들을 보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는 식의 말이 덧붙여 설명되어 나와요. 거기에 또 따라붙는 것이 이 사람들은 정신 착란에 의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은 그냥 단순히 설명한 것이고 방점은 정신착란, 그러니까 탈영은 한 사람들은 정신이 막 어떻게 나가 버려가지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데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선입견이 작동했을까? 무장탈영이라는 말이 발명되는 과정에서 베트남 전쟁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트라우마, PTSD 이런 것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억압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탈영의 정치성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주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리타 선생님이 연구하는 시기에서 벗어나지만 94년 무장을 한 장교들이 탈영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해요. 병장이 소위의 뺨을 때렸고 상부에 보고를 했지만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아 무기를 들고 탈영을 한 거죠. 당시 기사에서는 장교들의 최초의 무장 탈영이었다고 했는데, 사실 최초는 아닐 것이고 이 최초라는 말의 의미는 정치적인 이유로 탈영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일종의 시위였던 것인데, 사실 어떻게 보면 상부의 명령에 대해서 불복종을 한 것이고 이것이 담론화 되는 과정속에서 군민주화의 부작용으로 너무 지나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민주화가 지나치게 되니까 병사들이 해이해져서 소위 뺨도 때리고 이런 식으로 보도해서 군민주화에 어떤 제동을 걸고자 하는 시도로서 담론화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영의 정치성이라는 게 항상 전쟁에 대한 반대로만 담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사한 사례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군민주화라는 사회적 흐름에 어떤 제동을 거는 것으로 담론화의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리타 가즈키 너무 중요한 지적 감사합니다. 첫 번째에 대한 지점에 대해서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좀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신 대로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사실 도망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도망이라기보다 강도가 되기도 해서 사회질서와 사람을 해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탈영의 맥락이 확실히 반전이나 사회운동 쪽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94년 그 사건이 저도 얼마 전에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어요. 그 선생님께서 94년도에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이라고 말씀해주었어요. 근데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간부들이 탈영할 때는 오히려 일반 다른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케이스가 많다고 들었어요. 탈영한 장교가 중간 계급이었고 간부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낮은 사람들이 오히려 일반 사병으로부터 일을 당해서 그게 너무 부끄러워 도망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건 진짜 어려운 문제라고 느꼈어요. 아직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심아정 70년대 무장 탈영이 증가한 이유가 군대 안에서의 폭력이 강화되는 측면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시기적으로 볼 때 당시의 PTSD나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처음 장한길 선생님께서 질문해주셨던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탈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질문해 주신 것과 연결이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서로 찾아볼 게 생긴 게 재미있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하네요. 우리가 놓치고 온 것들인 것 같아요. 그 시대에 놓치고 온 것들이 링크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게 무장 탈영의 서사를 만들어온 것 같고 이런 걸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슬기 무장탈영이라는 말이 계속 고민하게 되어서 쉬는 시간 동안 좀 찾아보고 생각을 좀 해보게 되었는데요. 무장탈영이라고 했을 때 저는 무장 공비가 같이 떠올랐거든요. 무장 탈영이라는 말이 어떤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아마 무장 공비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세계적으로 반전과 평화의 운동들을 촉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탈영에 대해서도 아마 한국이 분단된 사회였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떤 경쟁이나 체제의 대립 같은 것들이 맥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무장 탈영과 무장 공비를 검색창에 같이 검색해봤더니 ‘진돗개’라는 것이 뜨더라고요. 국지적 경계 태세를 말하는 진돗개를 설명하는 말에 무장 공비 침투, 무장 탈영 등 국지적 위협 상태에 따른 방어 준비 태세를 진돗개라고 합니다. 무장 공비와 무장 탈영의 영역에서 같이 사용되는 것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서 맥락 속에서 연결되어 있고 그 연속선상에서 무장 탈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획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모리타 가즈키 저 또한 ‘진돗개’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시기를 보면 무장이라는 단어와 같이 자주 등장하는 게 무장 공비와 무장 간첩 등이 많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70년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마 무장 탈영이라는 말이 그 맥락선상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공포감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현숙 저도 아까 정체성과 사상화 관련해서 고민이 되는 단어들입니다. 저는 홈리스 판에서 가능하면 노숙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중 어느 50대 후반의 남성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탈영을 3번이나 했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의 탈영은 아주 사적인 것이었어요. 애인이 임신한 것을 알았고 그래서 탈영을 처음 했고 며칠 있다가 잡혔지만 부대에서는 탈영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그냥 혼나고 기합받고 며칠 감옥에 갔다 온 게 다라고 하더군요. 이 논문에서처럼 집행유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군대 내부에서도 사건화했다가 골치 아프고 하니까 적당히 덮으면서 지나쳐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사람의 생애사를 들어보면 그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군대에서 취사병을 복무하다 탈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적으로 애인과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탈영 가능성이 훨씬 높은 심리 사회적인 계급, 혹은 젠더적인 여러 가지 이유가 내포되어 있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자식이었어요.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못해서 어머니가 자식 셋을 키우는 빈곤한 가정이었어요. 어머니로부터 많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자기 비하와 자기 소외가 컸고 대학을 진학했어도 1학년 때 현실 도피하듯이 군대로 갔어요. 신입생 환영회 때 만났던 여자와 관계를 했는데 애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아이인지 확신이 없었고 이러저런 상황이 맞물리면서 탈영을 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탈영은 구체적으로 한 인간이 하는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라는 거지요. 정체성이 계급이나 정상성-비정상성 등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거라고 할 때 국가나 군대는 그 얽혀있는 상황을 단순히 사적인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그것들에 대해 여러 해석과 새로운 구성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리타 가즈키 제가 사실 도주권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중에서 금방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서사성입니다.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도망치는 사람이 정말 많았거든요, 개인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사회전체로 뭔가 있었다는 게 전제되어야 하고, 개인적인 이유들이 모여서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감수성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도주권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반대로 그런 심리 상태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군대가는 사람들도 언제든 도망쳐도 문제가 없다는 발상 자체가 많이 있었어요. 68년 전까지는 반전 사상이라는 쪽으로 설명하지 않았던 요소 중 하나는 그렇게 주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편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군대니까 하는 발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도망쳐도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고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피해를 꼭 받았던 것이 아니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 아카이브평화기억
심아정 그럼 오늘의 마무리 발언을 듣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해주신 질문들로 열띤 토론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런 자리가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그럼 마지막 말에 앞서 오늘 발표해주신 선생님께도 박사 논문 파이팅하라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리타 가즈키 이런 기회를 가진 것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럽고요. 제 연구 주제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있는 사람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무리 말은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 고맙습니다. 제 박사 논문은 꼭 한국어로 낼 것이고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것이 받아 시민사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 사진 노랭
녹취록 정리 최경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