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 강연_병사들의 '전후', 과정으로서의 책임과 해석

지난 4월 30일 늦은 7시, ‘병사들의 전후(戰後), 과정으로서의 책임과 해석’이라는 주제로 2024년 첫 번째 공론장이 열렸다. 온오프라인으로 마련된 이 자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시행된 중국의 전범 정책 사례를 살펴보고, 과정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여러 시사점을 찾아보는 자리였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올해로 3년째 시민참여형 구술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활동을 하며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는 전쟁을 겪은 이들과 어떤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지 고민이 깊다. 과거와 현재, 삶과 전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책임을 나눈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성균관대 김수용의 논문 <신중국 전범재판의 일본인 전범문제_중국귀환자연락회의(중귀련) 사례를 중심으로>는 소중한 텍스트가 되어 주었다. 숱한 고민 사이에서 군인을 ‘병사’로 칭하고 ‘전쟁’, ‘책임’, 그리고 ‘후세대’를 키워드로 이야기 듣고 나누는 귀한 자리였다.

 

우리가 만난 사례는 일본인 B C급 전범에 대해 ‘인죄와 탄백’(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중국의 전범 정책이었다. 중국 정부는 그들 대부분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데, 그 후 귀환한 일본인 전범이 가해를 성찰하는 자리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평화 활동을 이어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0년에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서 가해의 증언을 한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가 바로 중귀련 회원이었다. 또 주목해 볼 지점은 이들을 도와 활동한 후세대가 그 책임을 이어받아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순의 기적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증언’을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공동작업 속에서 그 책임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강연 후 생각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 사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정책을 통해 가해를 성찰하는 과정은 괜찮은 걸까, 피해의 자리까지 국가가 선취한다는 것은 옳은 걸까, 전쟁 책임에 대한 개인과 국가의 경계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당사자성을 획득한 후세대의 자리란 과연 어떤 걸까. 질문들, 현장에서 오고 간 말들 사이에서 길을 찾는다.




윤명숙 귀환한 일본인 전범이 가해의 증언을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전에 일본 국가가 가해를 인정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가 무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일본인 전범에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는 건가요?

 

김수용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들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구분하기는 어려워서 일본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가해의 증언 또는 자리에 주목한 이유가 피해 사실은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가해 증언이 나오기 어려운 시점에서 이런 것들을 기꺼이 용감하게 해주는 분들에 대해 주목하고 싶었어요.


석미화 귀환한 일본인 전범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중귀련 활동에 참여를 한 것인가요? 그리고 당사자성을 ‘획득’한다는 표현을 했는데, 당사자성이라고 하는 것에도 여러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순의 기적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그들이 청자이자 화자가 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구술활동을 하고 듣기의 과정을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보면 ‘말’이 그대로 ‘듣기’로, 직접 오지 않더라고요.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김수용 신중국은 전범 정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소 면제된 분들과 45명이 먼저 귀환했는데 그분들이 중귀련을 만들었어요. 중귀련을 만들기로 한 건 일본으로 돌아오는 배 안이었다고 해요. 1진 1백 명이 먼저 결의하고 2진 3진이 합류했죠. 회원으로는 모두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활동은 절반 정도 했다고 봅니다. 당사자성은 제가 참 겁 없이 쓰기도 했지만, 설명드리자면 당사자가 된 건 아닌데 거의 당사자와 비슷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오키나와 사상가 중 한 명이 쓴 표현을 가져왔어요. 그 분이 자기의 전쟁 경험을 떠안고 그 기억을 떠안은 다음 사람들에 대해 당사자성을 ‘획득’했다는 표현을 썼어요. 그걸 딱 보고 이 사례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구나 해서 가지고 온 건데 이 부분은 저도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증언을 통해 역사를 전달하는 사람을 카타리베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새로운 카타리베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던 거죠.

 

귀환하는 일본인 전범/김수용 제공


황윤희 ”중귀련 활동이 일본 사회에 주류 피해 서사에 어떤 귀중한 증언과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평화 운동도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전후 특별한 사례를 신중국 전범 정책의 영향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게 맞는가 의문이 남습니다. 수용소 내부에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억류 기간도 아주 길었다는 점, 전범 정책보다는 그들의 특별한 경험 과정으로 주목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 단체의 분열에 대해 조금 더 설명 듣고 싶습니다.“

 

김수용 네. 그래서 제가 그들의 특별한 과정에 더 주목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맨 처음에는 이런 사례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는지 주목했던 것이고요. 지금은 그들의 운동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보통 이야기되지 않았던 그 분열 과정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중귀련이 만든 ‘삼광’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증언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중국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토론하는지를 배워서 전쟁 범죄에 대해 공부하고 연재합니다. 여러 학자, 운동가들과 연대해서 좌담회도 열고 소중한 활동을 글로 실었습니다. 


양정석 아까 선생님께서 보여준 사진 한 장 있는데, 전범들이 관리소 도서관 같은 데서 공부하는 사진을 보고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어떻게 공부했을까? 약간 궁금하더라고요. 군인으로 간 사람들이라면 그 전에 공부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고 자본론이나 공산주의 같은 개념들을 이해하려면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우리 같은 할아버지 세대들은 월남 갈 때 월남이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 갔고 중학교도 못 간 사람들이 많은데 저기 일본인들 같은 경우 어떻게 그런 공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에 갔을 때 편지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대신 써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고향을 떠나서 오랜 억류 생활을 하다보면 정신이 핍박되어서 온전한 상태가 아닐 것 같은데, 부모도 보고싶고 외롭기도 하고 병도 걸리고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공부가 가능했을까 아까부터 약간 궁금하더라고요. 

 

김수용 정말 약간 궁금하세요? 저도 의심했어요. 아까 제가 세뇌라는 단어를 썼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의심하기도 해요. 세뇌당한 거라고. 물론 대부분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중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먼저 공부를 시켰어요. 그래서 저도 약간은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선생님도 약간은 좀 믿어주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쨌든 뭐 이분들이 세뇌를 당했던 돌아와서 하는 운동들이 이분들의 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분들은 증언 활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계속 증언으로써 사죄한다고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 분들도 인죄를 하고 내가 사과를 한다고 죽인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안다‘고 그래서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걸 알아서 계속 증언을 한다고 해요. 이 증언을 통해 사죄를 하는 거지요. 살아있는 한, 목숨이 있는 한, 그것밖에 할 일이 없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자본론을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 어떻겠으며, 그 어려운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는 깨달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들의 과정을 눈여겨 봐주십사 사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전범들이 공부하는 모습/김수용 제공


이수연 노다 마사키 책 <전쟁과 죄책>에도 중귀련 활동이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푸순 전범 관리소 경험이 자신의 가해 사실 인정과 이후의 삶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중국의 전범 정책은 주목할 만한 사례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다만 국가 주도였고 저우언라이 같은 특정 정치인의 의지에 힘입은 점이 크다는 게 아쉬워요. 혹시 이러한 신중국의 전범 정책 사례를 적용한 다른 외국 사례가 있을까요?

 

김수용 남아프리카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중국 사례를 참고했다는 걸 봤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도 전제는 그거예요. 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화해의 기본이 된다는 전제를 확인하는 거예요.

 

심아정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잘 정리를 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고. 이 생각들을 어디 갖다 내버리지 말고 잘 붙들고 있어야겠다. 복잡한 문제들을 복잡하게 생각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사실 이 중귀련 관련해서 수용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전범의 가해자성을 생각을 할 때 내가 뭘 잘못했고 내가 뭘 잘못했고 이러면서 진술서를 쓰던 당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전 생애를 통해서 중귀련이란 활동을 이해해야 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위화감 같은 것들을 떨쳐버리지는 않되 이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서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럼에도 제가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은 남자 전범들과 남자 관리소 직원들 사이에서, 국가가 용서하는 방침을 정했지만 그들만의 화해에 대한 위화감이 있어요. 피해자라고 했을 때 학살당한 사람들 속에 성폭력을 당한 여자들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고 그렇다면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0년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던 두 명의 병사가 있고, 사실 두 명의 가해 병사의 증언이 NHK 방송에서 짤렸잖아요. 그들이 무참한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걸 듣고 그리고 그것을 피해자들과 한 자리에서 지켜봐야 되는, 그래서 마음이 무너졌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가해 병사들이 가해 사실을 그렇게 나열하면서 증언하는 게 너무나 중요하면서도 피해자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들의 증언이 담긴 중귀련 잡지를 번역기를 돌려서 찾아 읽어봤어요.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그 호수가 5호 6호 41호가 있었어요. 거기서 살 떨리게 긴장하고 읽었던 게 있었는데, 제목이 윤간이라는 제목이에요. 세 자매를 윤간한 후에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 그걸 다시 떠올려서 잡지에 자기의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2000년 법정에서 그 병사들이 자신의 강간 장면을 나열했던 것과는 좀 달라요. 제가 인용을 해볼게요. 


“나는 지금 담담하게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가지지 않았던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나의 육신에 의해서 욕보이고 끝내 죽음까지 당한 세 자매의 심정과 유족들의 슬픔 그리고 그들의 저주를 생각하면 나를 향한 그들의 저주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생각으로 가득하다. 나의 뇌리에는 지금도 소중히 감싸인 신부의 의상과 자매의 눈물 맺힌 눈동자 그리고 정원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고구마를 넣은 바구니와 괭이가 떠오릅니다.”


당시에 소련이랑 마치 물물교환처럼 일본인 전범 천 명 넘겨받아서 국제사회의 시선을 되게 신경 쓰고 하거잖아요. 중국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가혹하게 죽이고 고문하고 그랬으면서 왜 일본 전범들만 이렇게 특별 대우하나. 이거는 좀 뭔가 국제적인 전략이 아닌가 보여주기식 아닌가 이런 의심이 갔어요. 그러면서도 이런 포로 정책안에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들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이 중귀련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도 평생에 걸친 성찰, 탄백과 인죄의 순간만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전후 책임과 전쟁 책임이라고 구분해서 수용 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당사자성의 확보라고 하는 것이 전 생애를 걸쳐서 되는 것이고.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은 누가 이어가나 저는 제대로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김수용 제공


윤명숙 오늘 강연을 들으면 굉장히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를테면, 일본에서 중귀련 평화 운동을 하셨던 사람들 중에도 위안소와 관련된 경험을 얘기하기를 꺼려했다고 해요. 중귀련 회원들 안에서도 아까 말씀드린 두 명이 주로 증언을 했고 대부분 어려워했어요. 또한 시베리아 억류와 관련해서도 일본의 강제 징병으로 조선인들도 억류가 되었는데 이런 사실에 대해서 연대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지점이 고민이 됩니다. 특히 중국에서 강제 노동으로 끌려갔던 분들이 기업을 대상으로 재판을 했고 화해를 하면서 보상을 했어요. 하지만 식민지 조선인이 재판을 했을 때에는 다른 결로 진행됩니다. 거칠게 얘기하면 평등하게 전쟁한 관계에 있는 중국 피해자들을 대상으로는 가해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에는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 돼요. 우에노 치즈코 씨 또한 일본에서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 여성주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를 할 뿐, 결정적으로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언급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중귀련의 케이스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어떤 문제점을 생각해 보게 할까, 그것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성찰하고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수용 네 이제 저도 고민을 좀 하는 부분인데요. 이분들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너무 중국의 일체화가 돼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분들의 시선에는 식민주의 문제성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김원이라는 인물이 식민지 조선의 인물이긴 하잖아요. 조선 사람들과 대만인들도 통역으로 동원이 되기도 했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김원이라는 인물은 식민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공산당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분들이 느끼지 않았던 식민지 문제점들을 지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또 억지로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는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까지 시야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들기는 합니다. 

 

윤명숙 우리가 한국에서 중귀련 사례를 읽고 보고 생각할 때 그 지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함께 넣어서 같이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경미 저는 중귀련이라는 단체의 특이한 이력은 집단화된 경험이 만들어 낸 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범 재판이라는 조건과 중국의 전범 정책, 그리고 포로와 전범자라는 위치가 만들어낸 배경이 증언의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조건들이 집단적인 공동의 경험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조직화가 가능했고 운동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징집되어 군대에 간 것도 집단적인 경험일 것이며 군사 훈련이나 가해의 경험도 집단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전범 관리소나 귀환한 후에도 집단화된 움직임으로 다른 노선을 만들 수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그 집단화된 공동의 경험으로 증언의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가해의 증언을 하는 것은 중귀련의 회원들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해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가해의 증언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과 별도로 중귀련의 집단화된 경험 외 고유한 개별성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각각 개인의 가해 사실일까요? 죄를 인정하는 시기일까요? 중귀련의 증언은 삶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인죄나 탄백 또한 시기가 다르며 완성된 시점도 다르다고 했는데 이것을 개별성을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 개별성은 계급성에 기반한 것일까요? 예를 들면, 만주나 일본군 중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인죄나 탄백이 어려웠다고 하는데 이는 공동의 계급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의심이 드는데요. 

 

김수용 지금은 공산당이 계급적인 성격을 띤다고 생각을 하지만 막 혁명이 성공한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계급성까지 갈 나아갈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은 들기는 해요. 그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집단적인 경험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나의 경험과 나의 증언을 지지해주고 나의 활동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중귀련의 활동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베트남 참전하신 분들이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석미화 이 강연의 제목이 전쟁과 책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큰 제목을 보고 또 집단 기억이라는 표현을 선생님이 논문 제목에서도 쓰셨는데, 전쟁의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또 어떻게 지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 중귀련 사례가 던져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사례 자체를 저희가 학습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현재의 활동 속에서 어떤 고민의 지점들을 낚아 올려야 할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사자성이라는 점에 대해서 집중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희가 하고 있는 운동은 또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활동들이기 때문에 활동 속에서 우리가 갖는 당사자성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여기 푸순의 기적을 잇는 사람들의 당사자성과 또 다른 당사자성을 갖고 있는 것이잖아요. 또 개인에게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친다는 게 개인이 전쟁에 책임을 지는 구조로 보이고 그래서 이 정책에 대한 어떤 질문들도 되게 많이 생겼거든요. 그랬을 때 개인의 책임은 얼마 만큼이고 또 국가나 구조의 책임은 얼마만큼이냐, 우리가 그냥 쉽게 던지는 가해나 피해라는 맥락들을 균열을 내고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그런 계기가 됐던 거 같아요. 더불어서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이 주셨던 질문 중의 하나인데, 피해 대상이 중국인들이잖아요. 근데 중국인 안에 또 계급성도 있고 또 안에 식민주의도 있고요. 그리고 그 안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려는 어떤 우리의 상상력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슬기 중귀련 활동이 가능했던 것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렇다면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결성된 사람들도 말하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적극적인 듣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이 듣는다는 행위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듣고 만들어간다는 의미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듣는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이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이 진지하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글 석미화

공론장 녹취록 정리 최경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