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소개 영상
이 사진의 주인공 중 몇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까요?

금마국민학교 제48회 졸업기념 <출처> 금마초등학교 역사관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금마국민학교는 1911년 문을 연 학교입니다. 양정석과 동창생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이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인 가난한 시절 학교에 다니고 1960년 초에 졸업한 금마국민학교 남자 동창생 1백여 명 중 10여 명은 월남에 갔습니다. 그중 대여섯은 전투병이었습니다. 돈을 벌러 간 친구도 있었지만 강제로 간 친구도 셋이나 있습니다. 누구는 영창에 가기 싫어서 누구는 더 나쁜 선택을 안 하기 위해 월남에 갔습니다. 전투병으로 간 친구 중엔 전쟁터에서 맹활약했으나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연도 있습니다. 고인이 되었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빼면 둘이 남는데 한 사람은 현재 와병 중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 연구에 함께하는 참전군인 양정석입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양정석(좌)과 손채황(우)
국민학교 동창생의 서사를 통해 전쟁의 기억을 만납니다.
이 연구는 월남전이 학교, 마을,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음을 인지하고, 공동체를 중심으로 월남전 파병의 기억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국민학교 동창생의 서사를 찾아 월남전의 기억을 돌아보려 합니다. 또 이제껏 말로만 전해 내려왔던 월남참전군인의 전후 삶을 확인하고, 마을 중심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통해 전쟁과 폭력의 역사, 그로부터 연결된 삶을 연구 조사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전쟁의 기억을 찾아가는 연구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시선도 함께 담아갈 예정입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다시 '철수'가 될 수 있었을까?
1964년부터 73년까지 8년 6개월 동안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의 명분 속에 32만여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청년들이 총을 들고 월남으로 갔지만 사실상 이 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잊힌 전쟁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청년 시기 전장을 경험한 참전군인의 삶은 전쟁이 끝난 지 50년 세월이 흐르도록 관심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현장에 젊은이들을 동원했지만 고통은 개별화하였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동원된 월남전 참전군인의 삶을 찾아 폭력의 현장에서 총을 들어야 했던 그들, 가해와 피해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려 합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보다 귀국 후 본국에서 자살한 참전군인의 숫자가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들은 노숙자가 되거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이혼, 실업, 폭력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참전군인이 등장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관심은 베트남전 참전군인으로 인한 사회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진제공 임호영 월남참전군인
그럼 베트남전쟁에 수많은 군대를 파병한 한국사회는 어땠을까요? 그것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후 귀국한 한국의 참전군인은 아무런 문제없이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을까요? 이런 질문 속에 우리의 연구활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농촌지역이었던 한국, 그래서 월남에 간 군인들도 농촌 출신이 많았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익산시 금마면은 말하자면 그 시대의 보편적 공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마국민학교 동창생과 익산지역 참전군인의 삶은 공동체에 기반해 이루어지는 전후 삶에 대한 구술과 실태조사의 성격을 가집니다.
동창생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연구의 시작은 월남에 간 동창생을 찾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꺼이 그 일을 맡은 이는 고향에 오래 살고 있는 또 다른 동창생입니다. 동창생의 소개로 월남 다녀온 동창을 만나는 자리엔 보통 네댓 명의 동창과 선후배가 자리합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 속에 연구가 이루어 지지만 동창생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들을 만나 벌써 5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코로나가 발을 묶어 만남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동창생을 만나기 위해 산속 목장으로, 감자밭으로, 익산 월남참전기념탑으로, 향교로, 금마면 일대를 동분서주합니다. 70대 중반 80줄에 들어선 동창생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감자밭에서 동창생 찾기

동창생 찾아 마을 곳곳을 다녀보고

더운 여름, 익산향교에서 다리쉼도 하고

산속 목장으로 동창생을 찾아가 무작정 기다려도 보고

얏! 출동이다~

연구프로젝트에 도움을 준 동창생들
그림 채원, 지도제공 양정석
이 연구에는 평화활동가, 월남전 참전군인, 청년들이 함께합니다.
연구에는 월남전 참전군인, 월남전 참전군인의 가족이자 평화활동가, 청년과 청소년 평화활동가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체가 팀을 이루어 서로의 시선이 잘 스며들고 교차되어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연구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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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양정석 월남참전군인, 채원 (뒷줄) 노랭, 솔, 석미화, 은결

참전군인에게 전쟁 경험이란 그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
참전군인에게 전쟁 경험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이후로 계속된 ‘삶’의 문제였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들여다보지 못한 참전군인의 이야기에 다가갑니다. 그들의 전쟁 경험을 사회적 기억으로 불러오고 평화의 기회로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참전군인 이야기를 통해 ‘피해’ 중심의 인권의식을 넘어 ‘폭력’의 현장이 빚어내는 근본적이고 다양한 문제를 돌아봄으로써 평화와 인권 의식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저마다 자신의 전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그들의 전쟁 경험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대한민국은 파병국가입니다. 1964년 베트남전쟁이 파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연구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외파병의 문제와 베트남전쟁 전후로 이어진 한국사회 폭력의 역사와 연결고리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그 폭력의 고리를 끊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식을 확장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소개 영상
이 사진의 주인공 중 몇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까요?
금마국민학교 제48회 졸업기념 <출처> 금마초등학교 역사관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금마국민학교는 1911년 문을 연 학교입니다. 양정석과 동창생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이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인 가난한 시절 학교에 다니고 1960년 초에 졸업한 금마국민학교 남자 동창생 1백여 명 중 10여 명은 월남에 갔습니다. 그중 대여섯은 전투병이었습니다. 돈을 벌러 간 친구도 있었지만 강제로 간 친구도 셋이나 있습니다. 누구는 영창에 가기 싫어서 누구는 더 나쁜 선택을 안 하기 위해 월남에 갔습니다. 전투병으로 간 친구 중엔 전쟁터에서 맹활약했으나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연도 있습니다. 고인이 되었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빼면 둘이 남는데 한 사람은 현재 와병 중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 연구에 함께하는 참전군인 양정석입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양정석(좌)과 손채황(우)
국민학교 동창생의 서사를 통해 전쟁의 기억을 만납니다.
이 연구는 월남전이 학교, 마을,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음을 인지하고, 공동체를 중심으로 월남전 파병의 기억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국민학교 동창생의 서사를 찾아 월남전의 기억을 돌아보려 합니다. 또 이제껏 말로만 전해 내려왔던 월남참전군인의 전후 삶을 확인하고, 마을 중심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통해 전쟁과 폭력의 역사, 그로부터 연결된 삶을 연구 조사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전쟁의 기억을 찾아가는 연구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시선도 함께 담아갈 예정입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다시 '철수'가 될 수 있었을까?
1964년부터 73년까지 8년 6개월 동안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의 명분 속에 32만여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청년들이 총을 들고 월남으로 갔지만 사실상 이 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잊힌 전쟁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청년 시기 전장을 경험한 참전군인의 삶은 전쟁이 끝난 지 50년 세월이 흐르도록 관심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현장에 젊은이들을 동원했지만 고통은 개별화하였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동원된 월남전 참전군인의 삶을 찾아 폭력의 현장에서 총을 들어야 했던 그들, 가해와 피해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려 합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보다 귀국 후 본국에서 자살한 참전군인의 숫자가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들은 노숙자가 되거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이혼, 실업, 폭력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참전군인이 등장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관심은 베트남전 참전군인으로 인한 사회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진제공 임호영 월남참전군인
그럼 베트남전쟁에 수많은 군대를 파병한 한국사회는 어땠을까요? 그것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후 귀국한 한국의 참전군인은 아무런 문제없이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을까요? 이런 질문 속에 우리의 연구활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농촌지역이었던 한국, 그래서 월남에 간 군인들도 농촌 출신이 많았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익산시 금마면은 말하자면 그 시대의 보편적 공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마국민학교 동창생과 익산지역 참전군인의 삶은 공동체에 기반해 이루어지는 전후 삶에 대한 구술과 실태조사의 성격을 가집니다.
동창생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연구의 시작은 월남에 간 동창생을 찾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꺼이 그 일을 맡은 이는 고향에 오래 살고 있는 또 다른 동창생입니다. 동창생의 소개로 월남 다녀온 동창을 만나는 자리엔 보통 네댓 명의 동창과 선후배가 자리합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 속에 연구가 이루어 지지만 동창생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들을 만나 벌써 5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코로나가 발을 묶어 만남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동창생을 만나기 위해 산속 목장으로, 감자밭으로, 익산 월남참전기념탑으로, 향교로, 금마면 일대를 동분서주합니다. 70대 중반 80줄에 들어선 동창생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감자밭에서 동창생 찾기
동창생 찾아 마을 곳곳을 다녀보고
더운 여름, 익산향교에서 다리쉼도 하고
산속 목장으로 동창생을 찾아가 무작정 기다려도 보고
얏! 출동이다~
연구프로젝트에 도움을 준 동창생들
그림 채원, 지도제공 양정석
이 연구에는 평화활동가, 월남전 참전군인, 청년들이 함께합니다.
연구에는 월남전 참전군인, 월남전 참전군인의 가족이자 평화활동가, 청년과 청소년 평화활동가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체가 팀을 이루어 서로의 시선이 잘 스며들고 교차되어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연구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줄) 양정석 월남참전군인, 채원 (뒷줄) 노랭, 솔, 석미화, 은결
참전군인에게 전쟁 경험이란 그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
참전군인에게 전쟁 경험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이후로 계속된 ‘삶’의 문제였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들여다보지 못한 참전군인의 이야기에 다가갑니다. 그들의 전쟁 경험을 사회적 기억으로 불러오고 평화의 기회로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참전군인 이야기를 통해 ‘피해’ 중심의 인권의식을 넘어 ‘폭력’의 현장이 빚어내는 근본적이고 다양한 문제를 돌아봄으로써 평화와 인권 의식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저마다 자신의 전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그들의 전쟁 경험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대한민국은 파병국가입니다. 1964년 베트남전쟁이 파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연구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외파병의 문제와 베트남전쟁 전후로 이어진 한국사회 폭력의 역사와 연결고리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그 폭력의 고리를 끊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식을 확장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