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일본 필드워크 후기] 참전군인을 만나며 고민한 것들을 연결하는 시간_이응

아카이브평화기억의 도쿄 필드워크에 함께했다. 작년 아카이브평화기억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의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했던 공론장에 참여하고 후기를 썼는데, 이번에 중귀련과의 간담회도 가지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50년 총괄행사에도 참석한다고 하여 좋은 기회로 함께 여행할 수 있었다. 이번 필드워크가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을 만나며 고민했던 지점들을 연결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 전쟁과 여성박물관(WAM)은 2005년에 개관하여 아시아 각국의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다. 필드워크 첫 일정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참가자들이 전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응(필자)


전후(戰後)는 없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청(소)년 세대는 흔히 자신들을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 말하고는 한다. 이 표현은 어떤 점에서는 통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로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쟁’은 우리 주위에서 계속 준비 또는 연습 중이며, 전쟁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기업이 만드는 무기와 중장비 등은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거나 삶터를 파괴하는 데 쓰이며, 이러한 군수산업으로 한국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저개발국’에 생산 공정을 위탁하여 환경과 노동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창출하고, 불평등한 위계와 종속 관계를 공고히 하는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가진 문제의식을 따라가며 그러한 구조와 연결을 만날 수 있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일본의 청산되지 않은 전쟁과 그 잔여물을 숨기는 ‘전후(戰後)’라는 프레임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식민주의에서의 가해자성을 직면하고 성찰하는 것에서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평화’를 중시하는 듯한 입장을 표명하지만, 전쟁에 대해 성찰하는 질문은 은폐하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전쟁 특수로 엄청난 이익을 얻는 등 침략을 통한 번영을 지속하는 행태에 반대한 것이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그중 가장 급진적 형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제국주의 영향 아래 살았던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며 전쟁 책임을 직시하고,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활동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단지 비판이나 반대’가 아닌 ‘구체적 실천’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과 전범 기업들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직면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부정을 동반하는 것 같다. 

내가(혹은 나의 위치가) 구성되기까지 무엇을 행했는지(무엇이 행해졌는지) 외면없이 보고, 나의 위치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가해 역사를 ‘직면’하고 ‘연루’된다는 것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사람들은 개인적 경험에서 과거 전쟁을 일으켰던 구조가 지속되어 현재 나의 위치를 구성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연루되어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수행한 폭력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은 ‘직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무장투쟁을 이어가던 중, 미쓰비시중공업에 설치한 폭탄이 폭발하며 다수의 부상자와 사상자를 낸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혼란을 맞닥뜨린 그들은 ‘실패’의 경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성찰하게 된다. 폭탄 투쟁의 방식에 의구심이 싹트고, 그날 죽은 사람들을 향한 마음과 고통, 충격, 그러나 투쟁을 이어갈 필요성 사이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고 이야기한다.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이야기도 떠올려본다. 중국의 관용적인 정책 아래 포로 생활을 하며 자신의 과거와 생애를 돌아보았던 일본인 B C급 전범들은, ‘인죄’와 ‘탄백’, 즉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후 일본에 귀국하여 중귀련을 결성해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증언하는 활동을 이어간다. 이처럼 참전했던 사람들이 국가에 동원되어 명령을 수행했을지라도, 자신이 행한 폭력을 직시하기로 선택했을 때 하나의 주체로서 자리를 갖게 되는 것 아닐까? 직면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부정을 동반하는 것 같다. 내가(혹은 나의 위치가) 구성되기까지 무엇을 행했는지(무엇이 행해졌는지) 외면 없이 보고, 나의 위치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이 수행한 폭력으로 인해 죽고 다친 이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삶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지지하고 지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개입과 끼어듦, 질문, 듣기 등을 통해서 같이 흔들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의 청자 또한 흔들리면서,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게 두지 않고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려 하는 것이다.

듣기와 질문 속에 함께 흔들리는 사람들


2023년, 참전군인을 만나고 나서 했던 고민을 떠올려본다. 내가 만났던 참전군인은 직업군인이었고, 의무대 소속 치위생병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여해 주로 대민지원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나는 전투는 안 나가고 대민지원만 했어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베트콩과 부비트랩에 대해 언급할 때면, ‘베트남전쟁’ 하면 떠오르는 신화적 서사를 되풀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하는 ‘전쟁’과 본인의 경험담은 미묘하게 유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전쟁 시스템 속에서 ‘동원된’ 존재, ‘가해 행위‘라고 불리는 폭력을 직접 수행하지 않은 존재로 무관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걸 의식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 전쟁 시스템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주 세부적으로 분화된 전쟁 시스템이, 그 각각에 소속되어 폭력을 수행하는 이들로 하여금 전체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도록 너무나 철저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미디어로 전달되는 전쟁의 이미지를 무감각하게 넘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이러한 고민을 나누지 못했고,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직면과 성찰이 가능하도록 하는 주변의 인물들, 지지하고 지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그 지원인들은 당사자들이 감옥에 갇혀있거나,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달할 사람들로 존재한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무장투쟁을 이어가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감옥 밖에서 꾸준히 면회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50년 간 지원해오고 있는 ‘지원련’이 존재한다. 그들이 함께했기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옥중에서 사형제 폐지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중귀련과의 간담회에서 들었던 ‘듣기’를 실천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증언은 입을 통해 나오는 육성,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예를 들어 조각조각 흩어진 자료들에, 말로 변환되지 않은 글들 속에 산재해있다는 것이다. 증언을 1차로 들은 이들마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증언을 ‘듣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공개되는 말로써의 증언뿐 아니라 비공개였던 진술서를 통해 증언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개입과 끼어듦, 질문, 듣기 등을 통해서 같이 흔들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의 청자 또한 흔들리면서,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게 두지 않고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려 하는 것이다.


글  이응

성미산학교 졸업생

2023-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참여

공저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 (2025, 알록출판사)

아카이브평화기억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