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베테랑 테드 엥겔만(Ted Engelmann)과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2022년 말경입니다. 2019년에 그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한 평화 활동에 초대하거나 글을 청탁해 생각을 나눈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는 참전군인이 겪는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웨비나에 함께했고, 2021년 베트남전쟁 시기 참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을 다룬 뉴욕타임즈 기사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베트남 피해자에 대한 대한민국의 배상 판결 즈음에 나온 기사였습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 받으며 그가 참전했던 베트남전쟁부터 전쟁 이후 기념과 기억, 현대 전쟁에 대한 생각을 두루 나누었습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이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베트남에서의 미국 전쟁이라고 부르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며 1년 동안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소식과 안부를 묻지 못하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질 즈음 다시 그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여전히 커피에서는 ‘쇠 맛’이 나지만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당투이쩜(Đặng Thùy Trâm)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베트남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장례식에 초대받은 이유는 당투이쩜이 전장에서 썼던 일기를 가족에게 전달한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기는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국에도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라는 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와 다시 연락을 하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구술작업을 빨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테드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2024년 참전군인 구술 활동을 위해 모인 이들 중 이수빈, 에밀리, 류현정, 윤명숙과 노랭, 공론장 기획팀 심아정, 이슬기가 참여하는 팀을 꾸렸습니다. 특히 수빈은 통번역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미리 주고받은 후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오전 9시 줌으로 테드를 만났습니다. 미국 덴버에 있는 테드는 26일 금요일 오후 6시에 우리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3시간 넘는 시간 동안 질문과 답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40년 넘게 자신과 동료 베테랑들, 그들이 겪은 전장과 기억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생각들 속에 국가와 개인, 기억과 기념, 전쟁과 평화를 넘나드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참전군인을 만나는 현장에는 구술 기록 결과물과 공론장에서 보여드리는 것 말고도 숱한 이야기와 만남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테드 엥겔만의 이야기는 이후 참전군인 구술 활동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뚜이오째에 실린 당투이쩜의 어머니 Doãn Ngọc Trâm 부고 기사, Ted의 얼굴도 보인다. @뚜오이채 기사에서 캡쳐
[뚜오이째 기사 보기]
https://tuoitre.vn/cuu-binh-my-doi-khan-tang-trang-tien-biet-me-doan-ngoc-tram-20240420150540458.htm
남베트남 군인은 참전군인이 아닌가요?
이 글에 제목으로 삼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을 듣는가’. 이 말은 남베트남 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테드가 한 말입니다. 그는 묘지가 훼손되고 오랫동안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질문을 던졌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누구도 남베트남군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참전군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혹은 북베트남군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바로 누가 말을 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가가 결정됩니다. 하노이, 밀라이, 남부 사이공을 방문할 때 참전군인을 만난다는 것은 남베트남군을 만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슬픈 일이예요. 그들의 묘지는 황폐하고 수년 동안 범죄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것, 그것은 한 국가를 정치적으로 이끌어가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남베트남군이 베트남에서 어떤 처우를 받는지를 생각하면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미국에서 11월 11일은 참전군인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사실 이날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죠. 미국은 50년대에 이날을 베테랑의 날로 바꾸었어요. 평화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도대체 이런 날을 왜 기념하는지 모르겠어요. 유럽에서는 붉은 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를 옷깃에 다는 이벤트를 하기도 해요. 미국에서는 보통 퍼레이드를 합니다. 5월 13일도 기리고 있는데 보통 5월1일 노동절부터 13일 메모리얼데이까지 미국은 휴가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메모리얼데이는 참전군인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예요. 참전군인 입장에서는 이날 살아서 다행이라고 기념하죠. 참전군인 집단은 잘 기억되고 있다기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뉴스거리가 되고 있어요. 어떤 재향군인 단체는 정치가를 압박하여 좋은 복지정책을 세우는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포로 깃발(POW flag)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뉴스거리가 되는 예시라고 할 수 있어요.”
POW flag 성조기 아래 포로깃발이 작게 나부낀다.
베트남전쟁 포로 귀환 50주년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열렸다는 연합뉴스 기사를 테드에게 보냈을 때 그는 동네 우체국에 걸린 포로 깃발(미국 성조기 아래 작게 걸린 기)을 보내주며 정치적 이용이고 모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우체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전장에서 찍은 사진들, 그리고 고엽제와 PTSD
그는 전쟁을 겪은 군인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 그가 이름붙인 회고록 <One Soldiers Heart>(어느 군인의 심장)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전쟁에 다녀온 군인들의 감정적 상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현재 회고록 작업 중입니다. 테드는 군인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합니다. 자신과 주변 동료들의 경험이 그에게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1968년 공군 관측병으로 1년 동안 베트남 전장에 있을 때 올림푸스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평생 그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테드는 우리에게 두 장의 사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비행기에 탔을 때 정글을 가로지르는 두 줄기가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어요. 대부분 비행기가 지나가면 나는 그냥 셔터를 누를 뿐이었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로. 그것은 고엽제를 살포하는 현장이었고 2주 후 그곳을 찾았을 때 정글에 있는 모든 것은 죽은 후였어요. 나는 에이전트 오렌지가 정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담은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렸고 그것은 증거물이 되었어요. 이 사진은 나에게 베트남전쟁에 대해 더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어요. 에이전트 오렌지가 어떤 해를 끼치는지 증거를 찾아서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했고요.”
또 한 장은 그가 가짜 군번줄을 목에 걸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찍은 사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왜 가짜 군번줄을 걸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깁니다.) 그가 보여준 사진에는 여덟 명의 병사가 큰 테이블에 앉아 카메라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추수감사절이었고 그 사진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군인들이거기 있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추수감사절에 찍은 것입니다. 8명의 군인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하는 장면이에요. 이보다 40년 전 베트남전쟁에서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주변에 있는 음식을 모아서 추수감사절 식탁을 만들었겠죠. 아랍어가 적혀 있는 코카콜라 캔도 있어요. 이 사진을 찍고 몇 주 뒤에 이들 중 한 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메일을 받았죠. 그리고 그들 중 두 사람은 PTSD로 치료받고, 한 사람은 전장에서 사망했어요. 절반이 그렇게 죽거나 다쳤어요. 제 책에 그렇게 사진 속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을 지우고 <유령이 된 군인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내가 사는 미국 덴버에 있는 참전군인이 자살을 했어요. 저와 가깝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참전군인 자살 문제에 관해 알아갔어요. 그 일은 80년대 일어났고, 지금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자살해요. 매일매일이요. ‘22toomany’ 라는 말이 있어요. 22는 너무 많다는 뜻이에요. 매일 22명이 자살한다는 뜻입니다. 자살한 참전군인과 가족, 특히 아내와 아이들을 돕는 단체도 있어요.”
https://www.22toomany.com/how-it-works
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가 썼던 가방을 멘 아이
자살, 트라우마와 같이 참전군인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갖고 작업한 결과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냐고 질문해보았습니다.
“해답? 제가 찾은 해답은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지 모두 다르죠. 군대에서 나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경우는 민간인으로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 있으면, 이를테면 아내가 필요하지 않죠. 군대가 다 해주니까요. 군인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하면 민간인이 되기 힘들죠. 게다가 그들은 너무 어려요. 감정, 특히 고립감을 해결하는데 어려워하죠.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문제가 다르니까요.”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테드는 말합니다.
“옛날에 여자친구와 길을 걷다가 빵하는 차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어요. 그때 여자친구와 손을 잡고 있었어요. 여자친구는 나에게 ‘너 뭐해’ 이러더군요. 나는 총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랬던 거예요. 죽는 줄 알고요. 소음이 나를 놀라게 했어요. 나는 사람 많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제가 베트남에 있었기 때문에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을 깊이 하다보니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경험도 거기에 있었어요. 저는 제가 무얼 하든 좋은 것도 아니고 끝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해가 지나면서 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군인들이나 가족들이 겪는 문제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이야기와 내가 찍은 사진을 공유하고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도움받길 바라는 것이죠.”
그는 추억 속 한 페이지에 남았을 사진 한 장을 꺼냈습니다. 어릴적에 친구들과 야외활동을 하며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키가 작은 열 두 살 테드는 그때 2차대전에서 아버지가 썼던 배낭을 메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이 없었는데, 나만 유일하게 그런 가방을 멨어요. 이 사진은 내 아버지의 삶을 지고 살았던 나를 보여줍니다. 군인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진이이예요.”
2001년 하미위령제 제막식은 내 인생의 미스터리
테드는 2001년 하미위령비 제막식 행사에 초대받았습니다. 하미마을은 1968년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민간인 135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이곳에 참전군인 단체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기금을 내어 위령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단체가 행사를 위해 제작한 자료집에는 테드의 축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미국 평화재향군인회를 대표하는 축사였습니다. 테드의 것을 포함해 자료집에 들어간 축사는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뿐만 아니라 군인의 죽음도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테드에게 이 행사와 축사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김문구라는 사람이 그룹을 조직해서 하미위령비 세우는 행사에 갔어요. 내 이름표까지 만들었지만 정작 참석자 리스트에서 나는 빠지고 없었어요. 지금도 그 이유를 몰라요. 다만 그때 인민위원회에서 내 이름을 제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송해요. 당신은 못가요.’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행사에 못가게 되었어요. 자료집에 들어간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예요. 그 일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그에게 줄이고 줄여 스물 세 가지의 질문을 보냈는데 첫 번째 구술 자리에서 그 중 절반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지나온 삶과 생각을 듣기에 3시간은 참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만남에서 더 긴 이야기를 나누어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테드와의 구술 현장이었습니다.
정리 글 석미화(연두)
미군 베테랑 테드 엥겔만(Ted Engelmann)과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2022년 말경입니다. 2019년에 그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한 평화 활동에 초대하거나 글을 청탁해 생각을 나눈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는 참전군인이 겪는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웨비나에 함께했고, 2021년 베트남전쟁 시기 참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을 다룬 뉴욕타임즈 기사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베트남 피해자에 대한 대한민국의 배상 판결 즈음에 나온 기사였습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 받으며 그가 참전했던 베트남전쟁부터 전쟁 이후 기념과 기억, 현대 전쟁에 대한 생각을 두루 나누었습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이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베트남에서의 미국 전쟁이라고 부르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며 1년 동안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소식과 안부를 묻지 못하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질 즈음 다시 그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여전히 커피에서는 ‘쇠 맛’이 나지만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당투이쩜(Đặng Thùy Trâm)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베트남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장례식에 초대받은 이유는 당투이쩜이 전장에서 썼던 일기를 가족에게 전달한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기는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국에도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라는 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와 다시 연락을 하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구술작업을 빨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테드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2024년 참전군인 구술 활동을 위해 모인 이들 중 이수빈, 에밀리, 류현정, 윤명숙과 노랭, 공론장 기획팀 심아정, 이슬기가 참여하는 팀을 꾸렸습니다. 특히 수빈은 통번역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미리 주고받은 후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오전 9시 줌으로 테드를 만났습니다. 미국 덴버에 있는 테드는 26일 금요일 오후 6시에 우리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3시간 넘는 시간 동안 질문과 답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40년 넘게 자신과 동료 베테랑들, 그들이 겪은 전장과 기억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생각들 속에 국가와 개인, 기억과 기념, 전쟁과 평화를 넘나드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참전군인을 만나는 현장에는 구술 기록 결과물과 공론장에서 보여드리는 것 말고도 숱한 이야기와 만남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테드 엥겔만의 이야기는 이후 참전군인 구술 활동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뚜이오째에 실린 당투이쩜의 어머니 Doãn Ngọc Trâm 부고 기사, Ted의 얼굴도 보인다. @뚜오이채 기사에서 캡쳐
[뚜오이째 기사 보기]
https://tuoitre.vn/cuu-binh-my-doi-khan-tang-trang-tien-biet-me-doan-ngoc-tram-20240420150540458.htm
남베트남 군인은 참전군인이 아닌가요?
이 글에 제목으로 삼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을 듣는가’. 이 말은 남베트남 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테드가 한 말입니다. 그는 묘지가 훼손되고 오랫동안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질문을 던졌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누구도 남베트남군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참전군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혹은 북베트남군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바로 누가 말을 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가가 결정됩니다. 하노이, 밀라이, 남부 사이공을 방문할 때 참전군인을 만난다는 것은 남베트남군을 만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슬픈 일이예요. 그들의 묘지는 황폐하고 수년 동안 범죄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것, 그것은 한 국가를 정치적으로 이끌어가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남베트남군이 베트남에서 어떤 처우를 받는지를 생각하면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미국에서 11월 11일은 참전군인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사실 이날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죠. 미국은 50년대에 이날을 베테랑의 날로 바꾸었어요. 평화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도대체 이런 날을 왜 기념하는지 모르겠어요. 유럽에서는 붉은 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를 옷깃에 다는 이벤트를 하기도 해요. 미국에서는 보통 퍼레이드를 합니다. 5월 13일도 기리고 있는데 보통 5월1일 노동절부터 13일 메모리얼데이까지 미국은 휴가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메모리얼데이는 참전군인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예요. 참전군인 입장에서는 이날 살아서 다행이라고 기념하죠. 참전군인 집단은 잘 기억되고 있다기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뉴스거리가 되고 있어요. 어떤 재향군인 단체는 정치가를 압박하여 좋은 복지정책을 세우는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포로 깃발(POW flag)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뉴스거리가 되는 예시라고 할 수 있어요.”
POW flag 성조기 아래 포로깃발이 작게 나부낀다.
베트남전쟁 포로 귀환 50주년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열렸다는 연합뉴스 기사를 테드에게 보냈을 때 그는 동네 우체국에 걸린 포로 깃발(미국 성조기 아래 작게 걸린 기)을 보내주며 정치적 이용이고 모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우체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전장에서 찍은 사진들, 그리고 고엽제와 PTSD
그는 전쟁을 겪은 군인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 그가 이름붙인 회고록 <One Soldiers Heart>(어느 군인의 심장)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전쟁에 다녀온 군인들의 감정적 상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현재 회고록 작업 중입니다. 테드는 군인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합니다. 자신과 주변 동료들의 경험이 그에게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1968년 공군 관측병으로 1년 동안 베트남 전장에 있을 때 올림푸스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평생 그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테드는 우리에게 두 장의 사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비행기에 탔을 때 정글을 가로지르는 두 줄기가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어요. 대부분 비행기가 지나가면 나는 그냥 셔터를 누를 뿐이었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로. 그것은 고엽제를 살포하는 현장이었고 2주 후 그곳을 찾았을 때 정글에 있는 모든 것은 죽은 후였어요. 나는 에이전트 오렌지가 정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담은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렸고 그것은 증거물이 되었어요. 이 사진은 나에게 베트남전쟁에 대해 더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어요. 에이전트 오렌지가 어떤 해를 끼치는지 증거를 찾아서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했고요.”
또 한 장은 그가 가짜 군번줄을 목에 걸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찍은 사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왜 가짜 군번줄을 걸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깁니다.) 그가 보여준 사진에는 여덟 명의 병사가 큰 테이블에 앉아 카메라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추수감사절이었고 그 사진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군인들이거기 있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추수감사절에 찍은 것입니다. 8명의 군인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하는 장면이에요. 이보다 40년 전 베트남전쟁에서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주변에 있는 음식을 모아서 추수감사절 식탁을 만들었겠죠. 아랍어가 적혀 있는 코카콜라 캔도 있어요. 이 사진을 찍고 몇 주 뒤에 이들 중 한 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메일을 받았죠. 그리고 그들 중 두 사람은 PTSD로 치료받고, 한 사람은 전장에서 사망했어요. 절반이 그렇게 죽거나 다쳤어요. 제 책에 그렇게 사진 속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을 지우고 <유령이 된 군인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내가 사는 미국 덴버에 있는 참전군인이 자살을 했어요. 저와 가깝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참전군인 자살 문제에 관해 알아갔어요. 그 일은 80년대 일어났고, 지금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자살해요. 매일매일이요. ‘22toomany’ 라는 말이 있어요. 22는 너무 많다는 뜻이에요. 매일 22명이 자살한다는 뜻입니다. 자살한 참전군인과 가족, 특히 아내와 아이들을 돕는 단체도 있어요.”
https://www.22toomany.com/how-it-works
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가 썼던 가방을 멘 아이
자살, 트라우마와 같이 참전군인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갖고 작업한 결과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냐고 질문해보았습니다.
“해답? 제가 찾은 해답은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지 모두 다르죠. 군대에서 나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경우는 민간인으로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 있으면, 이를테면 아내가 필요하지 않죠. 군대가 다 해주니까요. 군인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하면 민간인이 되기 힘들죠. 게다가 그들은 너무 어려요. 감정, 특히 고립감을 해결하는데 어려워하죠.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문제가 다르니까요.”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테드는 말합니다.
“옛날에 여자친구와 길을 걷다가 빵하는 차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어요. 그때 여자친구와 손을 잡고 있었어요. 여자친구는 나에게 ‘너 뭐해’ 이러더군요. 나는 총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랬던 거예요. 죽는 줄 알고요. 소음이 나를 놀라게 했어요. 나는 사람 많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제가 베트남에 있었기 때문에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을 깊이 하다보니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경험도 거기에 있었어요. 저는 제가 무얼 하든 좋은 것도 아니고 끝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해가 지나면서 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군인들이나 가족들이 겪는 문제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이야기와 내가 찍은 사진을 공유하고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도움받길 바라는 것이죠.”
그는 추억 속 한 페이지에 남았을 사진 한 장을 꺼냈습니다. 어릴적에 친구들과 야외활동을 하며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키가 작은 열 두 살 테드는 그때 2차대전에서 아버지가 썼던 배낭을 메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이 없었는데, 나만 유일하게 그런 가방을 멨어요. 이 사진은 내 아버지의 삶을 지고 살았던 나를 보여줍니다. 군인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진이이예요.”
2001년 하미위령제 제막식은 내 인생의 미스터리
테드는 2001년 하미위령비 제막식 행사에 초대받았습니다. 하미마을은 1968년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민간인 135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이곳에 참전군인 단체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기금을 내어 위령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단체가 행사를 위해 제작한 자료집에는 테드의 축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미국 평화재향군인회를 대표하는 축사였습니다. 테드의 것을 포함해 자료집에 들어간 축사는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뿐만 아니라 군인의 죽음도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테드에게 이 행사와 축사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김문구라는 사람이 그룹을 조직해서 하미위령비 세우는 행사에 갔어요. 내 이름표까지 만들었지만 정작 참석자 리스트에서 나는 빠지고 없었어요. 지금도 그 이유를 몰라요. 다만 그때 인민위원회에서 내 이름을 제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송해요. 당신은 못가요.’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행사에 못가게 되었어요. 자료집에 들어간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예요. 그 일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그에게 줄이고 줄여 스물 세 가지의 질문을 보냈는데 첫 번째 구술 자리에서 그 중 절반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지나온 삶과 생각을 듣기에 3시간은 참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만남에서 더 긴 이야기를 나누어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테드와의 구술 현장이었습니다.
정리 글 석미화(연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