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군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는 공부모임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참전군인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참여한 분들이 이끔이가 되고 새로 참여한 분들이 나누어 발제를 맡아 지난 5월 13일에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
우리가 함께 이야기나눈 책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이삼성 저, 한길사)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입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나온 책은 '인류가 겪은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성찰하고 다가오는 세기에는 그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책 제1장 20세기 그 절망의 문명은 프리모레비와 아우슈비츠부터 20세기 제노사이드와 전쟁,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종주의까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는 첨예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전군인과 베트남전쟁을 만나기 위해 전쟁의 본질과 역사, 여러 담론을 함께 바라보려 합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3시간 가량 진행된 세미나는 수많은 고민과 생생한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2절 101보안경찰대대와 악의 평범성
윤명숙 발제 中
전쟁이라는 게 '총을 가진 무장 집단의 우열 싸움' 뿐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일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삶의 공간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책에서는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형태의 대량 살육을 결과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렇기에 전쟁과 제노 사이드를 절연시기 위해서는 인간학적, 철학적, 정치학적으로 탐구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네 가지를 서술하고 있어요. 그중 가장 바람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네 번째로 서술되는 '정치적 시각'입니다. 전쟁이 제노사이드로 확대되고 발전하는 메커니즘으로 인간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원인들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 전쟁과 제노사이드라는 비극적 측면 사이의 연결고리를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능성을 보며 결국은 지금 아카이브평화기억의 활동이 떠올랐어요. 베트남전쟁의 참전군인들과 만나서 얘기를 듣고 얘기 속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그런 시도가 바로 이 여기에서 얘기하는 문화론적 철학적 사회학적 성찰이 포함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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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2절의 제목이 '악의 평범성'이네요. 한나 아렌트, 지그문트바우만이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 Banality of evil 이잖아요.
한국어로 '평범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번역어의 문제점으로 인해 의미가 와닿는지 고민이 되었어요. 하나 드는 질문도 나누고 싶은데요. 악의 평범성 구조 안에 들어갔을 때 개인이 어디까지 도덕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석미화
'악의 평범성'이 평범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적 오류라고 생각되는데 원래는 '성찰'이라는 주제하고도 맞닿아 있는 개념인 것 같더라고요. 무조건 평범한 모두가 악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것보다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 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악'이라고 하는 것에 더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개념으로 저는 이해를 했어요.
5절 제노사이드의 사회심리학 / 7절 종군위안부의 문제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함정희 발제 中
'제노사이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제노사이드는 기획하고 조종하는 주도집단으로만 성립되지 않아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집행하는 집단이 학살 구조의 필수 요소입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 실행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이야기하는데요. 허가, 일상화, 비인간화입니다. '허가'라는 것은 인종, 민족, 종교라는 특정 집단이 해당 집단이라는 이유에서 무차별적으로 없앨 수 있는 허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화는 대량 살육의 실행에 필요한 행동과 절차를 일상화시킨다는 것인데요. 학살의 과정을 잘게 쪼개어 일상적으로 행하게 하는 기계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학살을 자행하며 학살 대상을 비인간화하고 벌레나 짐승, 사회악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규정하는 과정 또한 존재합니다.
제가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데, 글을 읽다 보니까 제가 있는 현장과 비교를 해보게 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일본을 적으로 두고 핵무기를 투하했을 때 저는 그것을 복수심이라 해석했어요. 하지만 이후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이것이 굉장히 큰 학살이고 무서운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구요. 이처럼 제노사이드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국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문화를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문화 속에서 있으면 평화 감수성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공부와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7장은 제목 자체를 두고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세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한반도 한민족에 대해 내적인 역량 강화를 해야 한다'는 내용과, '동북아에서 면밀한 외교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다자적인 평화제도를 건설하는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역량을 발휘한다'고 책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목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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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숙
책에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제시하면서 민족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했어요. 98년에 쓰여졌기에 그때로써는 한국 내에서 꽤 용감한 문제 제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는데요. 되게 중요한 포인트긴 해요. 지금은 피해자가 중국도 여덟 분밖에 생존해 있지 않고 한국도 아홉 분 정도밖에 생존하고 있지 않으세요. 이 운동 자체가 피해자들의 개인배상과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어요. 그러면서 놓친 것 또한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친일의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업자가 친일이었냐'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 꽤 많이 있죠. 그렇지만 업소를 경영한 사람들, 특히 중국이나 점령지에서 경영했던 사람들은 다르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위안소 업자가 '내가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자본도 있어야 하고 군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친일 업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외에 관리자를 했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취업 사기를 행했던, 피라미드에서 가장 말단에 있던 사람들은 부역자라고는 얘기할 수 있지만 친일까지는 얘기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부분이 논의되면서 또 '강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성매매하고 위안부를 너무 자발과 강제로 나누는 바람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죠.
8절 한국전쟁과 충북 영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손소희 발제 中
1950년,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으로 시작했지만 시대적인 상황 자체를 함께 보면 좋겠어요. 내전이라고 해서 그냥 한국 사회 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싸움이었지요.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므로써 세계 자본주의 진영의 번영과 성과를 자랑하고, 한국은 경제적 혜택을 보았다고 해요. 그렇다면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해서 얻은 실질적인 이득은 무엇인가 볼 필요가 있어요. 현재까지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누리면서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리는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 군사화를 주도해온 과정과 한국전쟁의 연관성도 한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저는 소성리에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고 있어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면 굉장히 위험천만할 때가 많거든요. 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비, 사드 장비를 들고 들어올 때 경찰 병력을 만 명씩 들여서 봉쇄시키고 들어온단 말이에요. 근데 사실 저희가 싸우면 내부적으로 출혈이 일어나요. 다치거나 수배, 연행이 되면서 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근데 여기에서 싸움을 하지 않고 물러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출혈을 모르는 게 아니라 출혈이 있다 하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제 작은 투쟁을 하더라도 그런데 이 당시엔 남한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충돌했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있어요.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을 때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득이 있죠. 지배 계급은 경영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지위들을 누리며 혜택을 받겠죠.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을 수호하겠다라는 명분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사회주의 체제는 나쁜 거야. 자본주의만 옳고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돼'라는 명분으로만 들어오진 않았다 싶어요. 미국이 전쟁 개입으로 인해서 획득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위상들을 한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해요.
10절 르완다의 비극과 한반도 / 11절 제도로서의 전쟁
추병진 발제 中
보스니아 전쟁을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보스니아 전쟁을 민족주의적 갈등의 성격을 내포한 전쟁 중의 하나라고 얘기를 합니다. 더불어 민족주의적 갈등에 의해서 생겨난 분쟁이 유럽의 특정 구역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며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했어요. 저자는 이러한 전쟁들은 국내, 국제적인 차원의 정치적인 과정에 의해서 야기된다는 것을 지적해요.
인종이나 문화, 종교로 인한 차이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나 갈등이 생기는데, 이것이 세대를 넘어서 폭력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기억의 정치'라고 명명하는데요. 이런 기억의 정치가 발생한 게 국내적 차원의 정치라고 한다면, 이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국제적 차원의 정치인데요. 이것은 보스니아와 같은 경우 민족이나 종교로 인해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국제사회가 나서서 제어를 해야 하는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상황 때문에 전쟁이 극심해진다라는 뜻이에요.실제로 사례들을 보면 미국이나 소련 같은 강대국들이 개입을 해서 전쟁이 중단이 되는 경우도 있고 억제가 되는 경우도 있죠. 반대로 오히려 너무 방치를 하거나 오히려 갈등을 유발해서 전쟁이 더 지속화되는 경우도 있어요. 저자가 하는 말은 스위스와 보스니아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스위스는 여러 민족들이 같이 살고 여러 언어를 쓰고 있는데, 왜 국가에서 그런 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가? 반면에 보스니아는 어떻게 이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를 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르완다와 식민지 조선을 비교합니다. 벨기에가 르완다의 인종적 차이를 인종차별주의로 확대하여 식민지배에 활용했다면,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활용하여 식민지배를 공고히 했다고 지적합니다. 일본은 조선의 지주계급과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민중과 지주계급 사이의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조선인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러한 지배전략은 이념대립과 한국전쟁, 남북분단의 뿌리가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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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저는 근대 전쟁과 전근대 전쟁 이렇게 넘나들면서 전쟁을 같이 놓고 보는 것, 혹은 냉전이라는 전제 하에 탈냉전을 얘기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어요. 냉전 시기가 구 식민지였던 알제리, 한국, 베트남은 지속적으로 열전이 있었잖아요. 어떤 교수는 냉전 속의 열전 이라고도 하는데요, 그럼 냉전은 누구 기준인가요? 유럽 기준이잖아요. 유럽의 시각이고 서구의 시각이고 또 그것도 같은 어휘라고 해서 같이 인정해버리는 순간 흐물흐물하게 흐릿해지는 것 때문에 고민이 됩니다.
12절 세계체제론에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 13절 여성의 문제와 문화적 상대주의 그리고 평화
이수빈 발제 中
한국이 단일민족 사회라고 생각하시나요? 월러슈틴이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할 때, 한국은 지금과 같지 않았어요. 지금은 이민자가 많아서 더 이상 단일민족이니 하는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의 다인종 국가, 다문화 사회잖아요. 하지만 이전에는 인종주의가 거의 남의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오히려 당당하게 주변부 관점에서 세계체제를 논할 수 있었다는 자성적 성찰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대만이 일본과 한국 사이의 태평양전쟁 이후의 지정학적인 문제를 세계체제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고 할 때 인종 문제는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요? 인종주의라는 틀로 근대사를 바라보는 것이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논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일까요?
작가는 이 논의에서 젠더를 따로 13절로 빼서 논하고 있어요. 또한 인종과 종족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의식이 들었습니다. 특히 108페이지 “이 세계경제에서 기본경제단위인 가정(household)은 두 가지 차원에서 불평등을 내포한다. 하나는 계급적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인종적 차원(ethnic dimension)이다.”라는 구절은 어리둥절해요. 그 앞 절에서 이미 가정에서부터 젠더 불평등이 구축되고, 이것이 군사 문화가 기능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쓰고서 젠더 이야기를 제외한 문장을 사용했어요.
게다가 인종이 우리가 아는 인종race가 아니라 종족ethnicity라는 점도 더불어 깨닫게 됩니다. 인종과 종족은 역사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차이는 상호성reciprocity의 문제입니다. 종족성은 그 안에서 이미 서로 관계의 논리가 친족이나 마을 공동체 단위에서 구축된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이 공동체 내에서 권리가 적은 이유는 그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덜 맡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도 그런 종족 내 상호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종은 다릅니다. 인종은 그런 상호성을 싹 무시하고 그 위에 새로이 폭력적으로 구축된 것입니다. 월러슈틴의 관점을 따른다면, 대규모의 상업적인 모험과 투자,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과 과학적 실험 등이 없다면 20세기의 인종주의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구축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종족주의가 아니라 명백한 인종주의였다는 뜻입니다. 홀코스트 얘기를 할 때는 인종주의 얘기를 하기가 굉장히 쉬운 편이에요. 그런데 태평양 전쟁을 얘기하면서 저기 인종주의를 얘기할 때 사실 쉽지 않아요. 특히나 한국은 내선일체를 경험한 국가인데 조선인을 막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좀 생경한 편이에요. 그 지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지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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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숙
이 책에는 직접 나와 있지 않지만 이를테면 아시아의 인종주의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인종주의가 존재해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네덜란드 여성을 끌고 간 일본군은 재판에서 유죄가 나왔어요. 근데 그 시기에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꽤 많이 위안부로 끌려가고 성폭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인은 아예 열외였던 거죠. 이렇게 아시아에서도 인종주의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있죠. 물론 네덜란드 여성도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이제 섞여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사실 한국 , 한일 식민지를 얘기할 때는 인종주의라고 얘기하기보다는 민족차별이라서 민족주의라고 얘기를 하니까 인종주의로 얘기하는 것은 한일의 식민지 제국주의를 바라보긴 힘들지만, 아시아에서도 인종주의를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건은 분명히 있죠.
14절 21세기 첨단전쟁과 과학기술적 상상력 / 15절 20세기 전쟁의 야만과 근대문명의 비판
도현남 발제 中
첨단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걸프전의 의미를 되돌아보며 또 토플러의 문명과 전쟁론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포인트가 있어요. 과학에 결정력을 강조함으로써 첨단 무기 체제에 대한 사회와 인류의 자원 투자 인식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3의 물결이 무기 체제에서 서로 경쟁 끝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여전히 총력전의 형태로 전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와 같이 약소 민족의 땅에서 총력전이 발생되면 미국에게는 또 다른 이라크전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 공동체를 소멸하는 의미입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으로 성찰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문명이 인간에게 해방과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와 파괴의 수단만을 발전시켜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이 이룬 업적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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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미화
도현남 선생님이 주신 질문에 답은 이 책의 제목이 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지나온 20세기를 쭉 한번 들여다보면서 20세기에 야만으로 대표되는 전쟁, 제노사이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는 그런 책이잖아요. 그리고 이 책의 부제가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이거든요. 이분이 삼았던 여러 주제와 분야 중에 많은 것들이 인간의 정치적 결정으로 21세기는 보다 더 평화적으로 야만적이지 않게 펼쳐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라는 생각을 저는 하긴 했거든요. 근데 모순에 빠진 것 하나는 그것 또한 인간의 이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몽주의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현재의 어떤 전쟁은 AI 로봇, 살인 기기 이런 얘기까지 나오더라고요. 현대는 전쟁에 무감각해지고, 야만이 더 발전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이미 이 책이 나온 이후로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계속 갖게 되는 거 같아요.
토론
석미화
추병진 선생님이 발제한 내용 중에 전쟁의 일상과 연결된 지점들, 동원에 대한 이야기 있었어요. 그걸 듣고 우리 사회의 국립묘지 시스템이 생각났어요. 또 전쟁 참전이 사회적으로 명예화되는 '보훈'이라는 제도가 자리 잡게 되는 것 또한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역할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야스쿠니는 굉장히 상징적인 것이고 그것 말고도 어떤 국가든지 간에 전쟁에서의 죽음을 명예화하고 사회적 가치로 치환시키는 방식의 제도가 다 있어요.
도미야마 이치로의 '전장의 기억'을 봐도 일상 속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전쟁과 연결돼 있는 '일상성'의 개념 안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어떤 지금 저희가 전장이 아니라고 해서 전쟁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알아차림이 중요한 지점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또 실제로 전장이라 하더라도 대민지원 처럼 전장이 갖고 있는 일상성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참전하셨던 분들 중 '나는 전쟁 가지 않고 해외여행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한 부분, 그런 것도 저희가 놓치지 않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명숙
개인적으로 저는 아주 조그마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운데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다보면, 피해자들이 특히나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받았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국가대 국가, 민족 대 민족 뭐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하는 역사학자로서도 그 부분이 분열적으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게 은급법이라고 하는 것도, 야스쿠니도 마찬가지지만 해방 이후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은급법을 만들어서 전쟁에 장교 이상으로 갔다 온 사람들은 보훈을 해주는 그런 걸 만든 거잖아요. 한국에서도 독립운동, 전쟁 참전을 한 사람에게 보훈을 해주잖아요. 그런 게 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저는 가능한 강력한 국가를 없애고 싶은 사람이어서 어떤 입장에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되게 중요한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석미화
국립묘지를 국가 차원으로 볼 때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국립묘지에 묻힌 전사자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개인의 이야기는 또 다르기도 하더라고요.
윤명숙
또 통일을 하면요, 현충원이라는 곳은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각각 한국전쟁 때 공헌을 한 사람들을 기리는 묘지이기도 하잖아요.
함정희
우리 구술 활동은 지금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평화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이 있어요. 국가 폭력과 파괴의 현장은 각 나라마다 상황이 조금씩은 다를 수는 있지만 구조적인 것들은 다 똑같다는 것이에요. 그런 면에서 이 평화를 지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면 좋겠어요. 아까 과학도 이야기했고 최첨단무기도 이야기를 했었어요. 지금 사회에선 생태주의 사상가들이 재조명되고 생태적으로 삶을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그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에 배웠던 철학 중에 '합리주의'나 '인간중심의', '이성주의', '우월성' 이런 것들로 인해서 생태가 산업화되었기에 그래요. 그 자본이 또 결합이 되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이 파괴되잖아요. 그래서 일상 속에서의 '알아차림'들이 되게 중요한데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같은 게 경우는 분단의 체계 속에서 그걸 잘 모르고 있는 경우들이 되게 많은 거예요.
현충원에 저희 큰아버지가 계세요. 지금까지 현충원에는 나라의 공을 세운 사람들이 가서 묻히는 곳이라고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윤명숙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통일이 됐을 때 그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평화의 교육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평화 감수성을 깨우는 공부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수빈
통일까지도 안 가요. 제가 시골에서 한 1년 정도 산 적이 있어요. 그 지역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되게 많고 국제결혼한 여성들도 되게 많은 곳이에요. 근데 제가 산책을 하다가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초등학교 담장 안에 베트남참전군인 비석이 있더라고요. 이인호 소령을 기리는 비석이었어요. 그 초등학교에 다니는 다문화 가족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안에 베트남참전군인 비석이 뚝 하고 서있고, 전쟁을 기억하라고 이렇게 써져 있으니까 어떻게 봐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공부모임에는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발제와 더해 각자의 활동을 나누어 주신 덕분에 풍성한 이야기가 오고갔지요. 과거의 전쟁이 현재까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3시간을 함께했지만 나누지 못한 말들이 많기에 아쉬움을 남기며 마무리했답니다.
아쉬움은 다음 만남을 더욱 기다리게 하는 힘이 있지요!
다음달 세미나에서는 '제2장 미국의 세기와 베트남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나누어 발제하려 해요.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가 됩니다.
저희는 또 다른 소식으로 찾아뵐게요.
앞으로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보내주세요!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재단법인 바보의나눔이 함께합니다.
#아카이브평화기억 #참전군인 #구술활동 #구술기록 #활동가 #평화활동 #전쟁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는 공부모임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참전군인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참여한 분들이 이끔이가 되고 새로 참여한 분들이 나누어 발제를 맡아 지난 5월 13일에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
우리가 함께 이야기나눈 책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이삼성 저, 한길사)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입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나온 책은 '인류가 겪은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성찰하고 다가오는 세기에는 그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책 제1장 20세기 그 절망의 문명은 프리모레비와 아우슈비츠부터 20세기 제노사이드와 전쟁,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종주의까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는 첨예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전군인과 베트남전쟁을 만나기 위해 전쟁의 본질과 역사, 여러 담론을 함께 바라보려 합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3시간 가량 진행된 세미나는 수많은 고민과 생생한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2절 101보안경찰대대와 악의 평범성
윤명숙 발제 中
전쟁이라는 게 '총을 가진 무장 집단의 우열 싸움' 뿐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일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삶의 공간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책에서는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형태의 대량 살육을 결과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렇기에 전쟁과 제노 사이드를 절연시기 위해서는 인간학적, 철학적, 정치학적으로 탐구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네 가지를 서술하고 있어요. 그중 가장 바람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네 번째로 서술되는 '정치적 시각'입니다. 전쟁이 제노사이드로 확대되고 발전하는 메커니즘으로 인간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원인들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 전쟁과 제노사이드라는 비극적 측면 사이의 연결고리를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능성을 보며 결국은 지금 아카이브평화기억의 활동이 떠올랐어요. 베트남전쟁의 참전군인들과 만나서 얘기를 듣고 얘기 속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그런 시도가 바로 이 여기에서 얘기하는 문화론적 철학적 사회학적 성찰이 포함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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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2절의 제목이 '악의 평범성'이네요. 한나 아렌트, 지그문트바우만이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 Banality of evil 이잖아요.
한국어로 '평범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번역어의 문제점으로 인해 의미가 와닿는지 고민이 되었어요. 하나 드는 질문도 나누고 싶은데요. 악의 평범성 구조 안에 들어갔을 때 개인이 어디까지 도덕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석미화
'악의 평범성'이 평범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적 오류라고 생각되는데 원래는 '성찰'이라는 주제하고도 맞닿아 있는 개념인 것 같더라고요. 무조건 평범한 모두가 악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것보다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 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악'이라고 하는 것에 더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개념으로 저는 이해를 했어요.
5절 제노사이드의 사회심리학 / 7절 종군위안부의 문제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함정희 발제 中
'제노사이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제노사이드는 기획하고 조종하는 주도집단으로만 성립되지 않아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집행하는 집단이 학살 구조의 필수 요소입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 실행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이야기하는데요. 허가, 일상화, 비인간화입니다. '허가'라는 것은 인종, 민족, 종교라는 특정 집단이 해당 집단이라는 이유에서 무차별적으로 없앨 수 있는 허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화는 대량 살육의 실행에 필요한 행동과 절차를 일상화시킨다는 것인데요. 학살의 과정을 잘게 쪼개어 일상적으로 행하게 하는 기계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학살을 자행하며 학살 대상을 비인간화하고 벌레나 짐승, 사회악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규정하는 과정 또한 존재합니다.
제가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데, 글을 읽다 보니까 제가 있는 현장과 비교를 해보게 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일본을 적으로 두고 핵무기를 투하했을 때 저는 그것을 복수심이라 해석했어요. 하지만 이후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이것이 굉장히 큰 학살이고 무서운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구요. 이처럼 제노사이드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국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문화를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문화 속에서 있으면 평화 감수성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공부와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7장은 제목 자체를 두고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세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한반도 한민족에 대해 내적인 역량 강화를 해야 한다'는 내용과, '동북아에서 면밀한 외교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다자적인 평화제도를 건설하는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역량을 발휘한다'고 책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목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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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숙
책에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제시하면서 민족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했어요. 98년에 쓰여졌기에 그때로써는 한국 내에서 꽤 용감한 문제 제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는데요. 되게 중요한 포인트긴 해요. 지금은 피해자가 중국도 여덟 분밖에 생존해 있지 않고 한국도 아홉 분 정도밖에 생존하고 있지 않으세요. 이 운동 자체가 피해자들의 개인배상과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어요. 그러면서 놓친 것 또한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친일의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업자가 친일이었냐'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 꽤 많이 있죠. 그렇지만 업소를 경영한 사람들, 특히 중국이나 점령지에서 경영했던 사람들은 다르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위안소 업자가 '내가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자본도 있어야 하고 군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친일 업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외에 관리자를 했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취업 사기를 행했던, 피라미드에서 가장 말단에 있던 사람들은 부역자라고는 얘기할 수 있지만 친일까지는 얘기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부분이 논의되면서 또 '강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성매매하고 위안부를 너무 자발과 강제로 나누는 바람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죠.
8절 한국전쟁과 충북 영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손소희 발제 中
1950년,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으로 시작했지만 시대적인 상황 자체를 함께 보면 좋겠어요. 내전이라고 해서 그냥 한국 사회 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싸움이었지요.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므로써 세계 자본주의 진영의 번영과 성과를 자랑하고, 한국은 경제적 혜택을 보았다고 해요. 그렇다면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해서 얻은 실질적인 이득은 무엇인가 볼 필요가 있어요. 현재까지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누리면서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리는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 군사화를 주도해온 과정과 한국전쟁의 연관성도 한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저는 소성리에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고 있어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면 굉장히 위험천만할 때가 많거든요. 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비, 사드 장비를 들고 들어올 때 경찰 병력을 만 명씩 들여서 봉쇄시키고 들어온단 말이에요. 근데 사실 저희가 싸우면 내부적으로 출혈이 일어나요. 다치거나 수배, 연행이 되면서 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근데 여기에서 싸움을 하지 않고 물러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출혈을 모르는 게 아니라 출혈이 있다 하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제 작은 투쟁을 하더라도 그런데 이 당시엔 남한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충돌했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있어요.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을 때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득이 있죠. 지배 계급은 경영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지위들을 누리며 혜택을 받겠죠.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을 수호하겠다라는 명분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사회주의 체제는 나쁜 거야. 자본주의만 옳고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돼'라는 명분으로만 들어오진 않았다 싶어요. 미국이 전쟁 개입으로 인해서 획득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위상들을 한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해요.
10절 르완다의 비극과 한반도 / 11절 제도로서의 전쟁
추병진 발제 中
보스니아 전쟁을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보스니아 전쟁을 민족주의적 갈등의 성격을 내포한 전쟁 중의 하나라고 얘기를 합니다. 더불어 민족주의적 갈등에 의해서 생겨난 분쟁이 유럽의 특정 구역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며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했어요. 저자는 이러한 전쟁들은 국내, 국제적인 차원의 정치적인 과정에 의해서 야기된다는 것을 지적해요.
인종이나 문화, 종교로 인한 차이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나 갈등이 생기는데, 이것이 세대를 넘어서 폭력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기억의 정치'라고 명명하는데요. 이런 기억의 정치가 발생한 게 국내적 차원의 정치라고 한다면, 이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국제적 차원의 정치인데요. 이것은 보스니아와 같은 경우 민족이나 종교로 인해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국제사회가 나서서 제어를 해야 하는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상황 때문에 전쟁이 극심해진다라는 뜻이에요.실제로 사례들을 보면 미국이나 소련 같은 강대국들이 개입을 해서 전쟁이 중단이 되는 경우도 있고 억제가 되는 경우도 있죠. 반대로 오히려 너무 방치를 하거나 오히려 갈등을 유발해서 전쟁이 더 지속화되는 경우도 있어요. 저자가 하는 말은 스위스와 보스니아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스위스는 여러 민족들이 같이 살고 여러 언어를 쓰고 있는데, 왜 국가에서 그런 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가? 반면에 보스니아는 어떻게 이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를 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르완다와 식민지 조선을 비교합니다. 벨기에가 르완다의 인종적 차이를 인종차별주의로 확대하여 식민지배에 활용했다면,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활용하여 식민지배를 공고히 했다고 지적합니다. 일본은 조선의 지주계급과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민중과 지주계급 사이의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조선인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러한 지배전략은 이념대립과 한국전쟁, 남북분단의 뿌리가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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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저는 근대 전쟁과 전근대 전쟁 이렇게 넘나들면서 전쟁을 같이 놓고 보는 것, 혹은 냉전이라는 전제 하에 탈냉전을 얘기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어요. 냉전 시기가 구 식민지였던 알제리, 한국, 베트남은 지속적으로 열전이 있었잖아요. 어떤 교수는 냉전 속의 열전 이라고도 하는데요, 그럼 냉전은 누구 기준인가요? 유럽 기준이잖아요. 유럽의 시각이고 서구의 시각이고 또 그것도 같은 어휘라고 해서 같이 인정해버리는 순간 흐물흐물하게 흐릿해지는 것 때문에 고민이 됩니다.
12절 세계체제론에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 13절 여성의 문제와 문화적 상대주의 그리고 평화
이수빈 발제 中
한국이 단일민족 사회라고 생각하시나요? 월러슈틴이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할 때, 한국은 지금과 같지 않았어요. 지금은 이민자가 많아서 더 이상 단일민족이니 하는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의 다인종 국가, 다문화 사회잖아요. 하지만 이전에는 인종주의가 거의 남의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오히려 당당하게 주변부 관점에서 세계체제를 논할 수 있었다는 자성적 성찰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대만이 일본과 한국 사이의 태평양전쟁 이후의 지정학적인 문제를 세계체제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고 할 때 인종 문제는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요? 인종주의라는 틀로 근대사를 바라보는 것이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논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일까요?
작가는 이 논의에서 젠더를 따로 13절로 빼서 논하고 있어요. 또한 인종과 종족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의식이 들었습니다. 특히 108페이지 “이 세계경제에서 기본경제단위인 가정(household)은 두 가지 차원에서 불평등을 내포한다. 하나는 계급적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인종적 차원(ethnic dimension)이다.”라는 구절은 어리둥절해요. 그 앞 절에서 이미 가정에서부터 젠더 불평등이 구축되고, 이것이 군사 문화가 기능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쓰고서 젠더 이야기를 제외한 문장을 사용했어요.
게다가 인종이 우리가 아는 인종race가 아니라 종족ethnicity라는 점도 더불어 깨닫게 됩니다. 인종과 종족은 역사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차이는 상호성reciprocity의 문제입니다. 종족성은 그 안에서 이미 서로 관계의 논리가 친족이나 마을 공동체 단위에서 구축된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이 공동체 내에서 권리가 적은 이유는 그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덜 맡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도 그런 종족 내 상호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종은 다릅니다. 인종은 그런 상호성을 싹 무시하고 그 위에 새로이 폭력적으로 구축된 것입니다. 월러슈틴의 관점을 따른다면, 대규모의 상업적인 모험과 투자,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과 과학적 실험 등이 없다면 20세기의 인종주의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구축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종족주의가 아니라 명백한 인종주의였다는 뜻입니다. 홀코스트 얘기를 할 때는 인종주의 얘기를 하기가 굉장히 쉬운 편이에요. 그런데 태평양 전쟁을 얘기하면서 저기 인종주의를 얘기할 때 사실 쉽지 않아요. 특히나 한국은 내선일체를 경험한 국가인데 조선인을 막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좀 생경한 편이에요. 그 지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지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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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숙
이 책에는 직접 나와 있지 않지만 이를테면 아시아의 인종주의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인종주의가 존재해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네덜란드 여성을 끌고 간 일본군은 재판에서 유죄가 나왔어요. 근데 그 시기에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꽤 많이 위안부로 끌려가고 성폭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인은 아예 열외였던 거죠. 이렇게 아시아에서도 인종주의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있죠. 물론 네덜란드 여성도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이제 섞여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사실 한국 , 한일 식민지를 얘기할 때는 인종주의라고 얘기하기보다는 민족차별이라서 민족주의라고 얘기를 하니까 인종주의로 얘기하는 것은 한일의 식민지 제국주의를 바라보긴 힘들지만, 아시아에서도 인종주의를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건은 분명히 있죠.
14절 21세기 첨단전쟁과 과학기술적 상상력 / 15절 20세기 전쟁의 야만과 근대문명의 비판
도현남 발제 中
첨단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걸프전의 의미를 되돌아보며 또 토플러의 문명과 전쟁론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포인트가 있어요. 과학에 결정력을 강조함으로써 첨단 무기 체제에 대한 사회와 인류의 자원 투자 인식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3의 물결이 무기 체제에서 서로 경쟁 끝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여전히 총력전의 형태로 전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와 같이 약소 민족의 땅에서 총력전이 발생되면 미국에게는 또 다른 이라크전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 공동체를 소멸하는 의미입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으로 성찰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문명이 인간에게 해방과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와 파괴의 수단만을 발전시켜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이 이룬 업적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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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미화
도현남 선생님이 주신 질문에 답은 이 책의 제목이 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지나온 20세기를 쭉 한번 들여다보면서 20세기에 야만으로 대표되는 전쟁, 제노사이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는 그런 책이잖아요. 그리고 이 책의 부제가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이거든요. 이분이 삼았던 여러 주제와 분야 중에 많은 것들이 인간의 정치적 결정으로 21세기는 보다 더 평화적으로 야만적이지 않게 펼쳐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라는 생각을 저는 하긴 했거든요. 근데 모순에 빠진 것 하나는 그것 또한 인간의 이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몽주의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현재의 어떤 전쟁은 AI 로봇, 살인 기기 이런 얘기까지 나오더라고요. 현대는 전쟁에 무감각해지고, 야만이 더 발전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이미 이 책이 나온 이후로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계속 갖게 되는 거 같아요.
토론
석미화
추병진 선생님이 발제한 내용 중에 전쟁의 일상과 연결된 지점들, 동원에 대한 이야기 있었어요. 그걸 듣고 우리 사회의 국립묘지 시스템이 생각났어요. 또 전쟁 참전이 사회적으로 명예화되는 '보훈'이라는 제도가 자리 잡게 되는 것 또한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역할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야스쿠니는 굉장히 상징적인 것이고 그것 말고도 어떤 국가든지 간에 전쟁에서의 죽음을 명예화하고 사회적 가치로 치환시키는 방식의 제도가 다 있어요.
도미야마 이치로의 '전장의 기억'을 봐도 일상 속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전쟁과 연결돼 있는 '일상성'의 개념 안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어떤 지금 저희가 전장이 아니라고 해서 전쟁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알아차림이 중요한 지점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또 실제로 전장이라 하더라도 대민지원 처럼 전장이 갖고 있는 일상성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참전하셨던 분들 중 '나는 전쟁 가지 않고 해외여행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한 부분, 그런 것도 저희가 놓치지 않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명숙
개인적으로 저는 아주 조그마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운데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다보면, 피해자들이 특히나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받았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국가대 국가, 민족 대 민족 뭐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하는 역사학자로서도 그 부분이 분열적으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게 은급법이라고 하는 것도, 야스쿠니도 마찬가지지만 해방 이후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은급법을 만들어서 전쟁에 장교 이상으로 갔다 온 사람들은 보훈을 해주는 그런 걸 만든 거잖아요. 한국에서도 독립운동, 전쟁 참전을 한 사람에게 보훈을 해주잖아요. 그런 게 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저는 가능한 강력한 국가를 없애고 싶은 사람이어서 어떤 입장에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되게 중요한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석미화
국립묘지를 국가 차원으로 볼 때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국립묘지에 묻힌 전사자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개인의 이야기는 또 다르기도 하더라고요.
윤명숙
또 통일을 하면요, 현충원이라는 곳은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각각 한국전쟁 때 공헌을 한 사람들을 기리는 묘지이기도 하잖아요.
함정희
우리 구술 활동은 지금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평화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이 있어요. 국가 폭력과 파괴의 현장은 각 나라마다 상황이 조금씩은 다를 수는 있지만 구조적인 것들은 다 똑같다는 것이에요. 그런 면에서 이 평화를 지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면 좋겠어요. 아까 과학도 이야기했고 최첨단무기도 이야기를 했었어요. 지금 사회에선 생태주의 사상가들이 재조명되고 생태적으로 삶을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잖아요. 그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에 배웠던 철학 중에 '합리주의'나 '인간중심의', '이성주의', '우월성' 이런 것들로 인해서 생태가 산업화되었기에 그래요. 그 자본이 또 결합이 되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이 파괴되잖아요. 그래서 일상 속에서의 '알아차림'들이 되게 중요한데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같은 게 경우는 분단의 체계 속에서 그걸 잘 모르고 있는 경우들이 되게 많은 거예요.
현충원에 저희 큰아버지가 계세요. 지금까지 현충원에는 나라의 공을 세운 사람들이 가서 묻히는 곳이라고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윤명숙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통일이 됐을 때 그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평화의 교육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평화 감수성을 깨우는 공부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수빈
통일까지도 안 가요. 제가 시골에서 한 1년 정도 산 적이 있어요. 그 지역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되게 많고 국제결혼한 여성들도 되게 많은 곳이에요. 근데 제가 산책을 하다가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초등학교 담장 안에 베트남참전군인 비석이 있더라고요. 이인호 소령을 기리는 비석이었어요. 그 초등학교에 다니는 다문화 가족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안에 베트남참전군인 비석이 뚝 하고 서있고, 전쟁을 기억하라고 이렇게 써져 있으니까 어떻게 봐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공부모임에는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발제와 더해 각자의 활동을 나누어 주신 덕분에 풍성한 이야기가 오고갔지요. 과거의 전쟁이 현재까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3시간을 함께했지만 나누지 못한 말들이 많기에 아쉬움을 남기며 마무리했답니다.
아쉬움은 다음 만남을 더욱 기다리게 하는 힘이 있지요!
다음달 세미나에서는 '제2장 미국의 세기와 베트남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나누어 발제하려 해요.
또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가 됩니다.
저희는 또 다른 소식으로 찾아뵐게요.
앞으로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보내주세요!
'2024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재단법인 바보의나눔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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