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공론장 후기글]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인 전범 중 일부는 시베리아 억류를 거쳐 중국 푸순전범관리소 등으로 이송되어 중국의 관리하에 포로 생활을 했다. 당시 포로 생활을 했던 전범들은 중국의 관용적인 대우에 굉장히 놀랐는데, 강제 노동 등이 없었음은 물론 충분한 음식과 자유시간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유시간을 통해 포로들은 자신의 과거와 생애를 돌아볼 수 있었고, 이후 이들은 탄백학습이라 불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특별군사법정 판결 결과 대부분의 전범들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45명 중에서도 사형, 무기형 등은 없었다.

이 전범들은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증언하며 반전 평화 운동을 이어갔다. 스스로 조직을 이루어 증언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증언을 엮은 책을 내기도 했다. 가해 경험에 대한 증언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귀련의 사례에서, 회원들이 가해 경험을 증언하며 계속되는 성찰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실제로 포로 중 한 명은 탄백 과정에서 어차피 중죄에 처해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해 행위를 나열한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관리부장에 의해 진정한 탄백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려 당했다. 탄백은 단순히 사실을 되짚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그 사실이 왜 잘못된 행위였는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깊은 고민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귀련의 증언이 가지는 의미는 사실 나열을 넘어서는 책임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았을까. 가해 증언이 가능하려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가해 증언을 듣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작년에 참전군인 구술 프로젝트에 함께하며 한 참전군인을 만났다. 그분을 만나기 전, 나는 참전군인을 만난다면 전투 경험과 같은 가해 경험이나, 고엽제 피해나 트라우마와 같은 피해 경험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듣게 된 이야기는 전혀 다른, 예상을 빗나간 것들이었다. ‘대민지원 활동을 하며 월남인들을 지원했다’, ‘전쟁에서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다’는 등 피해·가해 서사의 이분법적인 구도 중 어느 쪽에도 꼭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은 ‘나는 왜 가해 경험에 대한 증언을 기대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했다.

 

그러한 기대는 ‘참전군인’이라는 집단에 대한 제한적 인식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럴 것이다’라는 생각 말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정말 잘 몰랐기에 발생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듣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사람을 대상화하는 방식의 시선일 것이다. 이런 상태로 가해 경험에 대해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피해와 가해의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난 예외의 이야기, 즉 다른 이야기들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 듣는 사람의 자리가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귀련의 사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와 용서, 화해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만났던 참전군인과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 사이에 있을 수많은 ‘제3자들’에 대해서 떠올려 볼 수 있다. 어떠한 폭력에 대한 책임과 화해는 가해자와 피해자 둘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듣는 사람이 없다면, 즉 증언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으면 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가해에 대한 증언은 국가가 내린 명령을 그저 수행했을 뿐이라는 논리에서, 가해 행위를 실행한 주체로서의 책임을 찾아내고 인정해야 가능하기에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사회적 질타와 낙인에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기도 하므로 더더욱 어려움이 있다. 중귀련의 경우, 공동의 경험을 가진 다수가 단체를 조직하였기에 자체적으로도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개인으로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더더욱 말의 자리를 가지기 힘들 것이다. 증언의 자리를 만들고, 듣는 역할에 기꺼이 놓이며, 함께 그러한 폭력이 반복되지 않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책임을 지는 행위가 의미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쳐 중귀련 활동을 이어간 이들은, 고령의 나이로 더 이상 증언을 이어가기 힘들 때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증언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잡지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시간들은 그들의 전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삶의 흐름에 따라 이들의 해석과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증언을 이미 끝난 인죄와 탄백의 순간을 재생 반복하는 것으로 듣지 않고, 여전히 삶 속에서 가해의 경험을 마주하며 탄백을 하고 있는 것이며 평화 운동으로써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화해’, ‘용서’, ‘해결’과 같은 완전한 마무리를 짓는 것을 경계하며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결론짓고 단정하는 것보다, 성찰과 질문이 계속해서 던져지는 상태에 있을 때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듣기도 현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듣기로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미래로 이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현재에서 확보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푸순의 기억을 이어가는 모임>에 대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중귀련의 회원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사명감을 갖도록 의지를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 있었다면, <푸순의 기억을 이어가는 모임> 또한 그들의 행보를 지지하고 결의를 보냈을 것이다.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가해 사실을 직면하는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증언을 이어갈 의지가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했는데, 일정 부분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도 있지 않았을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당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전수할 수 있을까? 우리 또한 이러한 질문 앞에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던 당사자는 현재 9명 남아 있으며,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당사자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기억이 흐릿해져 가고 있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당사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다시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듣고, 어떻게 기억을 전수해야 할까?



이응

최여울,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