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여는글] 구술활동공유회 '참전군인을 만나는 중입니다'


"참전군인을 만나러 가는 그 길에 시간과 마음을 기꺼이 내주실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초대장을 보냈다. 수신인은 없었다. 그저 누군가 그 초대장을 받아 주길 바랐다. 참전군인을 만나는 현장에 참여하고, 듣는 이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고 싶은 당신,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 가는데 함께 할 당신, ‘가해’와 ‘피해’ 중심의 인권 의식 넘어 ‘폭력’의 현장이 빚어내는 근본적이고 다양한 문제를 만나자고 초대글을 썼다. 누군가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기대 한편엔 그다지 관심 갖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도 컸다. 이 바쁜 세상에 자신의 일과 공부에 덧붙여 1년 가까이 진행되는 구술활동에 참여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일정으로 참전군인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굳이 1년 혹은 그 이상 지속하는 프로젝트로 초대장을 보낸 것은 ‘구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시작되는 ‘만남’ 때문이었다. 만남, 그것은 시작이고, 시작을 위한 절반이고,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서는 ‘만남’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젝트 중간발표인 이번 공유회가 ‘만나는 중’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만난 이’와 ‘만나지 못한 이’를 따로 불러오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모인 이들은 ‘만남’에 손잡아 준 시민들이다. 함께하는 우리는 ‘만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유(思惟)했다. 초대장을 수신한 이들은 모두 스무 명, 그중 열다섯 명이 참전군인을 만나는 길에 나섰다.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존재, 나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자 찾아보면 나와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법한 그들. 참전군인은 우리 곁에 있지만 아직까지 만나본 적 없는 존재였다. 그것은 선뜻 자신 있게 내딛을 수 있는 걸음이 아니었고 수많은 준비와 고민 끝에야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걸음이었다.



1. 왜 참전군인을 만날까


‘시민참여형 구술기록활동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주최하는 ‘평화와 인권의 눈으로 만나는 베트남전쟁’ 프로젝트의 주요 활동 중 하나이다. 궁극적으로 ‘평화’와 ‘인권’을 마주하고자 하지만 참전군인과의 만남을 중심에 두고 프로젝트를 구성한 이유는 베트남전쟁 한국군 참전 역사와 이를 둘러싼 한국 시민사회 운동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이 프로젝트는 취지글에서 베트남전쟁을 돌아보는 것은 전쟁과 폭력의 구조, 그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본성을 마주하는 일이며, 기존의 운동이 가진 한계 넘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참전군인과의 만남이 가진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평화운동의 주요한 동력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는 지난 활동을 통해 베트남전 참전군인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 2018년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이후 피해 생존자의 ‘학살 이후의 삶’ 혹은 ‘증언대 밖의 모습’에 주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해자’ 위치를 만든 폭력의 구조와 참전군인의 전형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 역사적 사건 당사자들의 일생을 특정한 시간에 가두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 반세기도 더 지난 개인의 삶 속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와 영향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특정 시기의 경험만으로 그 삶을 전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험은 모두 ‘참전군인’으로 일원화되어 호명되어 왔다. 따라서 참전군인 이야기의 역사상에 대해 살피고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베트남전쟁에 대한 책임에 연루될 수 있는가로 연결되며 확장된다.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연루되기’의 출발점이다. 결코 동일하지 않은 반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상가는 홀로코스트를 살피는 것을 통해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강조하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본성을 분석하는데 주목했다. 참전군인과의 만남으로 다양한 기억을 발굴하고 동시에 이 기억이 어떤 구조 아래 발현되는가 살피고자 했다.

 


2. 구술 기록 활동에 함께하는 시민들

 

구술 기록 활동에 참여하는 이는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며, 각자 발 딛은 곳에서 시작해 이 프로젝트로 그 관심과 문제의식이 닿아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참여 동기를 가지고 프로젝트에 함께하고 있다. 참전군인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 구술 기록 활동에 대한 관심, 군대·전쟁·평화를 연구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참여한다. 무엇보다 참전군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다. 참전군인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싶다는 기대도 있고,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드러나는 지점을 발견하고 참전군인을 한 인간으로 만나고 싶은 바람도 있다. 그중에는 피해와 가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국가폭력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참전군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 폭력에 대해 자세히 보고 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참전군인 이야기가 사회적 기억으로 공유되는 것을 넘어 참전군인 당사자에게도 치유와 위로가 되길 바란다는 마음도 동기가 되어 주었다. 구술이 갖는 가능성과 대안적 가치, 기록을 통해 고난이 인간에게 남긴 흔적을 만나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비슷한 듯 다양한 저마다의 동기를 안고 올해 초 구술활동은 시작되었다.


시민참여형 구술활동 공유회 '참전군인을 만나는 중입니다'


참전군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스스로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참전군인을 만나본 적 없고,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생소한 만큼 두 달 동안 공부 모임을 통해 조금씩 우리가 만나야 할 역사와 참전군인에 대해 알아갔다. 관련 논문과 연구자료 영상과 책을 추천하고, 두 차례의 공론장 <엎치락 뒤치락 관계의 구술, 최현숙이 듣고 쓰는 누군가의 이야기_최현숙> <베트남전쟁과 참전군인, ‘가해자성’과 ‘PTSD’에 가두지 않는 교차적 듣기를 모색하다_심아정>에서 생각을 나눴다. 참전군인 구술 연구 사례로 아카이브평화기억이 2022년에 진행한 프로젝트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구술활동을 공유하고 책을 읽었다.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 탐방은 여러 차례 이루어졌는데 함께 토론을 하며 전시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도 했고 참전군인과 더불어 방문하기도 했다. 용산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은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통해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전쟁의 이면을 공부했다. 참전군인과 함께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기도 했다. 우리는 두 명의 참전군인과 그곳을 방문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다녀온 참전군인은 회랑에 길게 늘어서 있는 전사자명비 중 베트남전 전사자명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명단 속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이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이름 사이를 건너며 자세히 들여다보던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전시물 하나하나에 관련한 기억을 떠올렸고 그렇게 우리는 세 시간 동안 함께 전시를 둘러봤다. 평소에는 한 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전시였지만 누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났다. 맹호부대 전투병으로 월남을 다녀온 한 참전군인은 전시장 입구 부산항 제3부두 사진을 보며 한 번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커다란 수송선 저편 달동네 이야기를 꺼냈다. 월남으로 가던 길, 강원도에서 출발해 캄캄한 새벽 부산항에 도착했고, 유난히 화려하게 빛나던 수송선과 대비되던 부산의 달동네. 그 한 장면으로 가난한 그 시대를 이야기했다. 


배우는 즐거움 속에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참전군인을 어떻게 섭외하고 만나야 할 것인가 우리 앞에 큰 숙제가 놓여 있었다. 참여 시민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주변의 참전군인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주변에 만날 수 있는 참전군인이 있었다. 그는 먼 친척뻘 되는 할아버지이거나 일하는 가운데 만난 사이이거나 친구와 가족의 소개로 알게 된 인연이기도 했다. 전쟁을 함께 겪는 존재로서 참전군인의 가족도 중요한 구술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구술활동에 함께하는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전사한 참전군인의 형이었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가족을 잃은 이이기도 했다. 그들은 때론 화자가 되기도, 때론 청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프로젝트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유동했다. 연고를 통해 섭외가 어려운 이들은 무작정 참전군인을 만나고 싶다고 방을 붙이기도 했다. 드문드문 연락이 왔지만 섭외로 이어지진 않았다. 참전군인과의 만남에는 굽이굽이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렇게 함께 좌충우돌하며 참전군인을 찾아 나섰다.

 

 

3. 참전군인은 누구인가

 

국가 차원의 열렬한 환송 속에서 배에 올랐던 ‘파월 장병’ 수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에 이르기까지 8년 6개월간 연인원 32만여 명에 달한다. 미국이 국제적 비난 속에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하고 한국군 또한 단계적으로 철수한 이후, 참전군인들은 국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들이 철수할 당시인 1973년까지 언론은 ‘개선’(이기지 않았음에도 이기고 돌아왔다는)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환영 기사를 생산해 냈다. 그리고 참전군인이 다시 지면에 등장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이다. 미국과 호주 등에서 제기되었던 고엽제 피해 문제가 한국에서 뒤늦게 점화되며, 참전군인은 집단적으로 피해 인정을 요구했다. ‘개선 장병’에서 ‘피해자’로 돌아온 참전군인들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전장에 동원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정체성 속에 참전군인들은 지금까지 기억 투쟁을 벌여왔다. 그들의 기억 투쟁과 더불어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된 기억의 변화를 살피는 일은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동을 마주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참전군인은 복잡한 존재다. 전쟁이라는 국가폭력의 현장에서는 총을 든 가해의 위치에, 또 약자로서 전쟁에 동원될 수밖에 없는 피해의 위치에 서 있다. 수많은 이들이 전쟁을 다녀온 만큼 저마다 다른 전쟁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애국’과 ‘이념’을 내면화한 그들은 참전 관련 (공법) 단체를 중심으로 전쟁 경험을 ‘명예’롭게 승화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엔 국가주의만이 존재할 뿐 참전군인 개개인의 전쟁 경험과 삶에 관한 이야기는 만날 수 없다. 국가 또한 참전군인 한 명 한 명에 대해 ‘보훈’ 그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군복 입은 할배’이거나 ‘꼰대’로 상징되며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매달 집계하는 참전유공자 현황을 보면 평균나이 70대 중반에 들어선 월남참전군인의 숫자는 해를 넘길수록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2023년 5월말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월남참전유공자는 총 178,000여명이다.(출처: 국가보훈처, 2023년 5월말 현재 참전유공자 및 고엽제현황) 매년 5천여 명 이상의 참전군인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점차 늘어날 것이다. 참전군인은 대부분 70대와 80대 초반 연령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 숫자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길어야 10년에 불과하다. 국가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현장에 젊은 청년들을 동원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고통’은 개별화하였다. 전쟁의 경험은 그들에게 단지 ‘사건’이 아니라 이후로 계속된 ‘삶’의 문제였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집단성에 기반한 참전군인의 추상적인 상보다 참전 이후 반세기의 생존자로서 자신이 겪고 느낀 경험에 대한 증언 가능성을 지닌, 개별화된 차이를 가진 참전군인 각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베트남전쟁을 다시 해석하려 한다. 그것이 우리가 참전군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이유이다.

 


4. 참전군인을 ‘만난’ 혹은 ‘만나지 못한’

 

만남,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구술활동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임을 알지만 항상 주어진 조건은 어렵기만 하다. 만남을 위해선 계획이 필요했다. 2주에 한 번 진행하던 공부모임을 구술준비모임으로 전환하여 만남을 준비했다. 우선 참전군인 섭외가 가능한 사람을 중심으로 2-3명씩 팀을 짰다. 원한다면 두세 개 팀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총 10개 팀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우리 활동의 취지를 잘 전달하기 위한 설명자료와 구술활동 양식을 의논했다. ‘설명자료’는 A4 한 장에 들어가도록 길지 않은 문장으로 만들었는데 그 짧은 글 하나 만드는 일에 모두가 참여해 오래 토론했다. 단어 선택과 표현 하나하나 고민이 컸다. 우리의 뜻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라는 글 제목을 달아 편지글을 만들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평화와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파병 한국군의 피해와 희생은 물론이고, 아무 이해가 없는 낯선 땅에서 총을 들고 만날 리 없는 이들이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우리는 전쟁 이후 참전군인과 가족, 이웃들이 말하지 않은/못한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듣고 함께 고민하려 합니다.


‘시민참여형 참전군인 구술활동 설명자료’ 중에서


어느 팀은 섭외가 안 되어 시작도 못하고, 어느 팀은 섭외를 했으나 사전 만남 단계에서 끝나기도 했다. 구술자와 한두 차례 만났으나 그 후로 이어지지 못했고, 구술 내용 확인을 위한 지속적인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만남에 이르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만남 이후 그것을 이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가 가진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전쟁과 삶을 탐구하는 생애사적 구술 방식이 구술자에게 적잖은 부담을 안겨주었을 수도 있다. 짧은 시간, 낯선 관계라는 조건 아래 만남을 지속해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가까이 있는 참전군인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관계’로 만나고자 했으나 우리가 가진 작업의 조건을 넘어서기엔 역시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참전군인과의 만남 그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만남, 그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실패’ ‘거절’이란 이름으로 남은 만남도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우리는 과정과 경험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열 명의 참전군인과 가족을 섭외했다.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은 다양한 전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맹호, 백마, 주월한국군사령부 등 소속도 다양하고 전투병, 포병 장교, 치위생사, 공병, 보급 담당 등 맡은 직책도 다양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쟁과 전투의 장면은 그중 일부의 이야기에서만 등장했다. 이 다양한 참전군인의 이야기와 그 안에서 느낀 여러 사람의 생각들은 이어지는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다. 미군 해병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한미연합사에서 근무한 미군 베테랑도 만났다. 참전군인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전사자의 유가족, 고엽제후유증으로 아버지를 잃은 참전군인의 가족은 구술자이자 동시에 기록자로 활동했다.


참전군인은 우리에게 전쟁 경험과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전군인 개개인이 갖고 있는 차이를 마주하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참전군인마다 다른 서사를 들려줄 때 우리가 갖는 익숙함과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했다. 우리가 그 익숙함과 불편함에 따라 참전군인 삶의 경험을 ‘취사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도 했다. 듣는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 생각했다. 우리는 참전군인을 만나 청자로서의 자리에만 있지 않았다. 단지 참전군인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이 ‘만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고자 했다. 소통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참전군인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소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갔다.

 

 

5. 나오며


시민참여형 구술활동공유회 '참전군인을 만나는 중입니다' 프로젝트 소개 발표 석미화


우리 프로젝트가 ‘구술’이라는 표현을 쓰다 보니 대부분 몇 명이나 얼마나 구술을 했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서 ‘구술’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만남의 방법이다. 만약 구술 기록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말 그대로 구술 전문가들이 주도하여 작업하는 게 맞다. 물론 개인의 역사와 기록이라는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전쟁과 참전군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시민참여자들로 프로젝트를 구성한 것은 만남의 과정과 이후 지속적인 평화활동을 더 중요한 활동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구술 기록 활동이 평화 배움의 기회가 되고 참전군인과 소통 경험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참전군인에게도 여러 사람과의 ‘사회적 말하기’(사적 공간에서의 무용담이 아닌 공적 말하기의 경험)를 통해 자신이 겪은 전쟁과 삶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사건’보다 ‘감정’과 ‘생각’을 물었고, 우리의 생각도 나누었다. 소통하고자 노력했고, 소통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참전군인과 우리는 지금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헤매기도 했다. 부질없는 정치토론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적어도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생각만은 명확하게 나누고자 애썼다. 같은 시대를 살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던 참전군인과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는 역사를 사이에 두고 ‘평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쟁은 더 이상 추상이 아니었고, 우리는 실체로서 전쟁을 만났다.


이번 중간 공유회에서 만나는 참전군인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총 9개의 발표로 이루어져 있다. 만남을 가진 다섯 편의 이야기와 만났으나 만남에 대해 고민을 안긴 두 편의 이야기, 그리고 참전군인과 함께 전쟁을 겪는 가족의 이야기 두 편이다. 팀을 이루어 구술 현장에서의 만남, 그 후 이어지는 녹취록과 후속 작업, 만남에 대한 토론 등을 여럿이 함께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지만 발표자 뒤에 함께한 이들의 땀과 노력이 있음을 이야기해 둔다. 또한 이번 자리에 발표를 준비하지 못한 팀도 있다. 아쉬움으로 중간 공유회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이후 결과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와 응원을 해 주고 싶다. 더불어 원고 하나하나 검토하고 구술 내용 확인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구술자 참전군인, 그리고 참전군인의 가족과 이 공유회를 함께 준비했음을 밝혀둔다. 이 자리는 참전군인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평화의 자리이며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계속 만들어지길 기대해 본다. 우리의 ‘만남’은 이제 시작이다.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대표, 평화활동가




* 이 글은 10월 28일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 모이다홀'에서 열린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공유회 '참전군인을 만나는 중입니다' 프로젝트 소개글로 발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