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모든 말과 인식을 경계한다. 특히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시선이 나는 마뜩잖다. 예컨대 반제국주의자라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다는 이유로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편을 드는 이들. 혹은 학살자 이스라엘과 맞선다는 이유로 학교에 들이닥쳐 청소년들을 강제로 소년병으로 입대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는 후티 반군을 편드는 이들. 전쟁을 진영논리로 납작하게 보기 때문에 정의(우리편)와 불의(상대편)의 싸움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어떤 전쟁도 굉장히 복잡하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정의로운 쪽은 존재하지 않는다. 침략당하고 학살당한 쪽에서도 전쟁 범죄를 저지른다. 러시아 군인 포로를 학대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 민간인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은 하마스를 보라. 전쟁에 정의의 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그런데 진영논리에만 빠지지 않으면 전쟁을 과연 입체적으로 보는 것일까? 전쟁의 복잡성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차원의 복잡성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전쟁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고, 전쟁에 연루된 서로의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경험이 남는다. 전방에 있는 사람과 후방에 있는 사람의 경험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경험이 다르며,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겪는 전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배경과 개개인들의 정체성과 특성이 씨줄과 날줄로 복잡하게 얽혀 각자 다른 전쟁의 모습을 경험하니, 전쟁이란 우리가 인식하기에 얼마나 복잡한가. 거기에 더해 한 사람의 경험 속에서도 전쟁은 매우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체험이 되고, 전쟁을 겪은 개인 또한 전쟁 경험으로 인해 굉장히 복잡한 존재가 된다.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은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인데, 베트남전쟁에 대해 참전군인의 목소리로 이 복잡한 전쟁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러니 이는 예정된 실패일 수밖에 없다. 평화활동가, 예술가, 참전군인 2세, 대안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인터뷰어들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참전군인들의 대답 앞에서 번번이 미끄러진다. 인터뷰어들은 이 과정 속에서 스스로 기대한 대답-아마도 평화주의에 기반한 인식을 배반(?)한 인터뷰이들의 대답을 곤혹스럽게 마주해 나간다. 책에는 매끄럽게 정리되어 있고, 인터뷰어들이 인터뷰 끝에 남긴 후기에서 얼핏 이야기하는데, 실제 인터뷰가 이루어진 공간의 공기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말과 말이, 질문과 대답이 부딪히고 미끄러지는 광경이 떠오른다.
나는 이 책을 베트남전쟁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자 기록으로 읽으면서도 동시에, 아니 더 크게는 '말'에 대한 책으로 읽었다. 이 인터뷰들은 여러 측면에서 말하는 자의 자격, 위치,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맥락과 의미를 곱씹게 한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말할 자격과 남성성
누가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즉 베트남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인터뷰의 기획자들은 그동안 소외되고 잊힌 목소리로 참전군인들의 말을 주목하는데, 나는 그들의 인터뷰 속에서 전쟁에 대해 말할 자격이 결국은 젠더화된 군사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나는 전상에다가 무공수훈자, 고엽제 피해자에다가 참전유공자까지 겹겹이 국가유공자거든. 누가 나보고 빨갱이 소리를 못하지. 해병대에서 졸병은 훈장 타는 거 참 힘들어. 나는 상이기장, 참전기장, 인헌무공훈장 이렇게 있어"(참전군인 류진성의 말, 76쪽)
"대민지원 업무를 나갔으며 작전은 별로 안 나가봤다는 이 문장은 주로 '전투 이야기는 해줄 게 없다', '월남은 다녀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험은 없다'는 의미로 자주 쓰였다. 어떻게 보면 '전투병이 아니라서 말할 것이 없다'거나 '맡았던 일'은 '전쟁의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참전군인 송금술을 인터뷰한 최여울의 글, 125쪽)
해병대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류진성은 중대에서도 첨병만 서며 가장 앞장서서 전투를 치렀다. 그러한 전투 경험과 무공수훈자, 참전유공자, 상이기장과 참전기장 그리고 인헌무공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은 경력 덕분인지 그의 말은 자신감이 넘친다. "누가 나보고 빨갱이 소리를 못하지"란 말은 그러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반면 치위생 하사관으로서 베트남 파병을 갔던 송금술의 경우 전투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전투가 전쟁의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전투 바깥의 것들도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송금술의 말과 태도는 스스로 위축되어 보인다. 류진성, 송금술 모두 고엽제 피해자인데, 류진성의 경우에는 피해자라는 것도 말할 자격으로 연결되는 반면 송금술은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암까지 걸려 보훈처에서 보상을 받아놓고도 피해자 정체성마저 말할 자격, 자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고엽제로 지금까지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나는 크게 걸려보진 않아서, 작전 지역에는 안 들어갔으니까"(송금술의 말, 126쪽)
참전군인들이 스스로 부여하거나 탈각시키는 전쟁에 대해 말할 자격이란 결국 전투의 경험, 남성화된 전쟁 경험이다. 이런 구분, 이런 판단은 비단 참전군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여성들, 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주로 군복무 경험이 있는 남성들이 지청구를 놓는 경우가 많다. (그들도 우리처럼 실제 전쟁 경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면서) 박근혜나 윤석열을 비판할 때, 군대 다녀오지 않아서 그렇다는 언설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든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해, 안보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은 우리 사회에서 철저하게 젠더화 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성화된 경험이 자격의 여부를 결정한다. 생각해 보면 뻔한 걸 수도 있지만 참전군인 안에서도 결국 어떤 경험이 말할 자격을 결정하는지가 한국사회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가 - 관계성 속에서 형성되는 맥락과 의미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 속에서 맥락과 의미들이 형성되는 모습들이었다. 말은 결국 듣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말은 결국 상호 작용.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왜 말하느냐에 따라 화자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언 형태의 말하기 또한 마찬가지다. 증언자들은 사회가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말이 무엇인지를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아가면서 결국 듣는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향에 맞춰 자신의 이야기를 편집하거나,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게 된다. 이를 두고 말을 바꿨다고 비난하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가서는 안 된다. 기억이란 결국 현재의 관점에서 편집된 과거고, 그때의 편집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책 추천사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말한 내용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 남성들의 목소리이자,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여성들의 목소리다. (중략) 이는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말하는 이들의 응답이자,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한 재인식이기도 하다." (정희진 추천사 중)
참전군인이 말하고, 여성들이 들었다는 것이 이 책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한국사회가 참전군인에게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은 용맹한 군인, 전쟁영웅, 전쟁에서 돌아온 든든한 산업역군 같은 서사였다. 그 기대 안에서는 할 수 없던 이야기들-예컨대 전쟁 트라우마라든지, 전쟁터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숨겨진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환영받지 못했을 테니까.
이게 단순히 여성들이 들었기 때문에 참전군인들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게 아니다. 평화활동가 여성들과 참전군인 남성의 질문과 대답, 말과 말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온도는 조심스럽지만 뜨거웠다. 이들은 서로가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사이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최종적으로 정리된 말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고, 내가 이 사람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면서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계속 만나고 대화한다면 인터뷰어들의 질문은 어떻게 달라질까? 혹은 참전군인들의 대답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책에서 인터뷰한 참전군인 한 명, 한 명의 기억뿐만 아니라 참전군인들의 집단 기억까지도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후속 연구, 후속 작업이 꼭 이어지면 좋겠다.
이용석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이 글의 원문은 브런치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brunch 매거진 '기억하기 위한 기록'] 짧은 리뷰_전쟁에 동원된 남자들

전쟁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모든 말과 인식을 경계한다. 특히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시선이 나는 마뜩잖다. 예컨대 반제국주의자라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다는 이유로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편을 드는 이들. 혹은 학살자 이스라엘과 맞선다는 이유로 학교에 들이닥쳐 청소년들을 강제로 소년병으로 입대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는 후티 반군을 편드는 이들. 전쟁을 진영논리로 납작하게 보기 때문에 정의(우리편)와 불의(상대편)의 싸움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어떤 전쟁도 굉장히 복잡하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정의로운 쪽은 존재하지 않는다. 침략당하고 학살당한 쪽에서도 전쟁 범죄를 저지른다. 러시아 군인 포로를 학대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 민간인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은 하마스를 보라. 전쟁에 정의의 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그런데 진영논리에만 빠지지 않으면 전쟁을 과연 입체적으로 보는 것일까? 전쟁의 복잡성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차원의 복잡성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전쟁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고, 전쟁에 연루된 서로의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경험이 남는다. 전방에 있는 사람과 후방에 있는 사람의 경험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경험이 다르며,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겪는 전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배경과 개개인들의 정체성과 특성이 씨줄과 날줄로 복잡하게 얽혀 각자 다른 전쟁의 모습을 경험하니, 전쟁이란 우리가 인식하기에 얼마나 복잡한가. 거기에 더해 한 사람의 경험 속에서도 전쟁은 매우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체험이 되고, 전쟁을 겪은 개인 또한 전쟁 경험으로 인해 굉장히 복잡한 존재가 된다.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은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인데, 베트남전쟁에 대해 참전군인의 목소리로 이 복잡한 전쟁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러니 이는 예정된 실패일 수밖에 없다. 평화활동가, 예술가, 참전군인 2세, 대안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인터뷰어들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참전군인들의 대답 앞에서 번번이 미끄러진다. 인터뷰어들은 이 과정 속에서 스스로 기대한 대답-아마도 평화주의에 기반한 인식을 배반(?)한 인터뷰이들의 대답을 곤혹스럽게 마주해 나간다. 책에는 매끄럽게 정리되어 있고, 인터뷰어들이 인터뷰 끝에 남긴 후기에서 얼핏 이야기하는데, 실제 인터뷰가 이루어진 공간의 공기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말과 말이, 질문과 대답이 부딪히고 미끄러지는 광경이 떠오른다.
나는 이 책을 베트남전쟁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자 기록으로 읽으면서도 동시에, 아니 더 크게는 '말'에 대한 책으로 읽었다. 이 인터뷰들은 여러 측면에서 말하는 자의 자격, 위치,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맥락과 의미를 곱씹게 한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말할 자격과 남성성
누가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즉 베트남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인터뷰의 기획자들은 그동안 소외되고 잊힌 목소리로 참전군인들의 말을 주목하는데, 나는 그들의 인터뷰 속에서 전쟁에 대해 말할 자격이 결국은 젠더화된 군사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나는 전상에다가 무공수훈자, 고엽제 피해자에다가 참전유공자까지 겹겹이 국가유공자거든. 누가 나보고 빨갱이 소리를 못하지. 해병대에서 졸병은 훈장 타는 거 참 힘들어. 나는 상이기장, 참전기장, 인헌무공훈장 이렇게 있어"(참전군인 류진성의 말, 76쪽)
"대민지원 업무를 나갔으며 작전은 별로 안 나가봤다는 이 문장은 주로 '전투 이야기는 해줄 게 없다', '월남은 다녀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험은 없다'는 의미로 자주 쓰였다. 어떻게 보면 '전투병이 아니라서 말할 것이 없다'거나 '맡았던 일'은 '전쟁의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참전군인 송금술을 인터뷰한 최여울의 글, 125쪽)
해병대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류진성은 중대에서도 첨병만 서며 가장 앞장서서 전투를 치렀다. 그러한 전투 경험과 무공수훈자, 참전유공자, 상이기장과 참전기장 그리고 인헌무공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은 경력 덕분인지 그의 말은 자신감이 넘친다. "누가 나보고 빨갱이 소리를 못하지"란 말은 그러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반면 치위생 하사관으로서 베트남 파병을 갔던 송금술의 경우 전투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전투가 전쟁의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전투 바깥의 것들도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송금술의 말과 태도는 스스로 위축되어 보인다. 류진성, 송금술 모두 고엽제 피해자인데, 류진성의 경우에는 피해자라는 것도 말할 자격으로 연결되는 반면 송금술은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암까지 걸려 보훈처에서 보상을 받아놓고도 피해자 정체성마저 말할 자격, 자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고엽제로 지금까지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나는 크게 걸려보진 않아서, 작전 지역에는 안 들어갔으니까"(송금술의 말, 126쪽)
참전군인들이 스스로 부여하거나 탈각시키는 전쟁에 대해 말할 자격이란 결국 전투의 경험, 남성화된 전쟁 경험이다. 이런 구분, 이런 판단은 비단 참전군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여성들, 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주로 군복무 경험이 있는 남성들이 지청구를 놓는 경우가 많다. (그들도 우리처럼 실제 전쟁 경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면서) 박근혜나 윤석열을 비판할 때, 군대 다녀오지 않아서 그렇다는 언설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든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해, 안보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은 우리 사회에서 철저하게 젠더화 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성화된 경험이 자격의 여부를 결정한다. 생각해 보면 뻔한 걸 수도 있지만 참전군인 안에서도 결국 어떤 경험이 말할 자격을 결정하는지가 한국사회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가 - 관계성 속에서 형성되는 맥락과 의미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 속에서 맥락과 의미들이 형성되는 모습들이었다. 말은 결국 듣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말은 결국 상호 작용.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왜 말하느냐에 따라 화자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언 형태의 말하기 또한 마찬가지다. 증언자들은 사회가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말이 무엇인지를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아가면서 결국 듣는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향에 맞춰 자신의 이야기를 편집하거나,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게 된다. 이를 두고 말을 바꿨다고 비난하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가서는 안 된다. 기억이란 결국 현재의 관점에서 편집된 과거고, 그때의 편집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책 추천사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말한 내용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 남성들의 목소리이자,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여성들의 목소리다. (중략) 이는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말하는 이들의 응답이자,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한 재인식이기도 하다." (정희진 추천사 중)
참전군인이 말하고, 여성들이 들었다는 것이 이 책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한국사회가 참전군인에게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은 용맹한 군인, 전쟁영웅, 전쟁에서 돌아온 든든한 산업역군 같은 서사였다. 그 기대 안에서는 할 수 없던 이야기들-예컨대 전쟁 트라우마라든지, 전쟁터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숨겨진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환영받지 못했을 테니까.
이게 단순히 여성들이 들었기 때문에 참전군인들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게 아니다. 평화활동가 여성들과 참전군인 남성의 질문과 대답, 말과 말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온도는 조심스럽지만 뜨거웠다. 이들은 서로가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사이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최종적으로 정리된 말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고, 내가 이 사람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면서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계속 만나고 대화한다면 인터뷰어들의 질문은 어떻게 달라질까? 혹은 참전군인들의 대답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책에서 인터뷰한 참전군인 한 명, 한 명의 기억뿐만 아니라 참전군인들의 집단 기억까지도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후속 연구, 후속 작업이 꼭 이어지면 좋겠다.
이용석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이 글의 원문은 브런치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brunch 매거진 '기억하기 위한 기록'] 짧은 리뷰_전쟁에 동원된 남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