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공유회 후기글] 전쟁가방과 숫자들 : 이은선 전 서울시 협치지원관

아카이브평화기억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넘어, 개인의 서사를 기록하는 단체라고 소개되었다.

그 순간, 과거 호치민에서 전쟁증적박물관을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박물관의 한 전시물은 전쟁의 고통과 상흔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전하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그 희생자들의 차가운 통계를 담아내고 있었다. 전시물을 바라보며 나는 낯선 두려움에 휩싸였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칼날 앞에서 한낱 개인은 그저 통계적 숫자 하나로만 남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은 단순히 육체의 소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살아오며 치열하게 구축한 가치관과 신념조차 국가적 서사의 일부로 환원되어 하나의 숫자에 불과해지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추구하는 개인 서사의 중요성과 그들의 활동이 지닌 가치에 대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024년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공유회는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주제는 한국전쟁 참전군인의 아들로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테드 엥겔만이 어린 시절 메고 다녔던 아버지의 전쟁가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했다.

이번 구술활동공유회의 주제는 마치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참전군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잠시 그 가방을 내려놓고, 그 안에 담긴 기억을 꺼내어 보지 않겠는가?” 이는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자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참전군인인 구술자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깊이 숙고해야 할 중요한 제안이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동질감과 여백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구술활동공유회를 통해 여덟 개의 전쟁가방 이야기가 시민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는 ‘동질감’과 ‘여백’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비록 시대와 경험은 상이했으나, 참전군인의 구술 속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특히 “좌우지간 실력이 있어야 한다. 인정받으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참전군인 정해곤의 말이 그랬다. 전장에서뿐 아니라 삶 전반을 투영한 그의 말은, 취약함을 자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인정받고자 분투해온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나는 이데올로기, 도덕성, 그리고 개인의 서사가 복잡하게 얽힌 우리 사회의 한복판에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가치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를 형성하고 지배했던 시대적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렇게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누구의 몫으로 남겨져야 하는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 속에서, 그의 전쟁가방에 담긴 짐과 내가 일상 속에서 메고 다니는 가방의 짐은 서로를 당기다 밀어내는 듯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애처로움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서사를 마주하며, 나는 구술자와 청취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여백을 실감했다. 어떤 이야기는 꺼내기를 망설였고, 어떤 이야기는 기록되지 못한 채 숨겨져 있었다.

참전군인 이호원은 전쟁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고백했지만, 그는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겪고 전장에서 동료를 잃는 비극을 경험한 인물이었다. 불과 1년 남짓한 참전이었음에도,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단순한 언어나 수치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고통스러웠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이 여백은 전쟁 경험에 대한 망각의 결과일 수도, 혹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러한 해석조차 내가 이 여백을 메우려는 하나의 시도일지 모른다. 그저 그의 결핍된 기억이, 그가 마침내 자신의 전쟁가방을 내려놓고 안식처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를 바랄 뿐이다.



"구술활동 공유회를 통해 본 아카이브평화기억의 활동은

전쟁의 기억을 국가적 서사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로 조명하며, 

거대 담론이 놓칠 수 있는 섬세한 관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기록해온 시민 참여자들은 단순히 경청자의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열린 전쟁가방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자신의 가치관과 시각에 비추어 숙고하며,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심하고 있었다.

한 시민 참여자는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이미 이 과정에 연루되었다”고 단언했다. 이는 참전군인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개인적 서사를 단순히 평가하거나 정리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와 같이 이야기를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한 청취를 넘어, 참전군인의 전쟁가방이 지닌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그 책임을 나누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무거운 가방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구술활동 공유회를 통해 본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은 전쟁의 기억을 국가적 서사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로 조명하며, 거대 담론이 놓칠 수 있는 섬세한 관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라는 통계적 숫자로 치환될 뻔한 개인의 삶을 생생히 드러내고, 역사 속에서 소외되거나 잊힐 목소리를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 더 나아가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단순화와 양극화를 경계하며 기억의 다층성을 존중하고 연대의 기회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가방은 진정한 안식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다. 앞으로도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전쟁의 기억을 통해 삶의 무게를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연대의 장을 열어나가길 기대한다.

 

 

글 이은선

전 서울시 협치지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