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지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한해가 또 지나가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한다. 구술활동공유회를 준비하고 겨울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소식지 후원 회원 인터뷰'를 핑계삼아 재춘을 만났다. 재춘은 올해로 2년째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를 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춘은 대면으로 만나기보다 온라인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날이 더욱 많다.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바쁜 일정 사이사이 우리는 회의와 세미나를 중심으로 꽤 자주 만났다. 그럼에도 단둘이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처음이다.
어린시절부터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재춘은 지금 평화에 관심이 많다.
그의 변화하는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재춘 @ 아카이브평화기억
노랭 안녕하세요. 구술공유회를 준비하며 온라인으로 자주 뵈었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그리고 재춘님을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도 간단히 소개 부탁해요.
재춘 서울에는 병원 때문에 자주 오가고 있어요. 저는 고엽제후유증으로 사망한 참전군인의 2세고요. 추정 가능한 심증을 갖고 있는 고엽제 관련 질환을 앓고 있어요. 저만 다르게 친구들처럼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지 못했고 지금은 결국 전남대 사학과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노랭 감사합니다. 재춘님과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인연은 이제 2년이 되었네요. 23년부터 2년째 구술 활동을 같이 하고 참여하고 계세요. 그리고 또 별도로 저희는 책 세미나도 같이 하고 있잖아요.
재춘 제일 재미있는 세미나예요. (웃음)
노랭 맞아요. (웃음)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을 함께하면서 저는 재춘님에 대해서도, 재춘님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럴수록 궁금해지더라고요. 전쟁과 평화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재춘 저는 원래 전쟁 자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삶과 죽음이 교차하니까요. 전쟁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많이 봤는데 전쟁영화만 많이 보고 거기 나온 장비를 항상 궁금해하는 아이였었어요. 전쟁 소설과 영화를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참전군인인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아버지가 왜 이렇게 죽어야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유를 알아 보고 싶어서 역사를 뒤늦게 공부를 하게 됐어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저에게는 전쟁과 반전이라는 키워드가 남게 되었어요. 전쟁을 반대하는 쪽이었어요. 아카이브평화기억 단체를 2023년에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평화라는 것이 결국은 근대적인 개념이잖아요. 한자어가 조어된 근대적인 언어인데요. 아카이브평화기억을 만나고 평화를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반전의 개념에서 평화를 상상하게 된 거죠. 구체적으로 활동가 선생님들은 평화를 사유하면서 행동으로 옮기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 하잖아요. 나는 거기까지는 아니었는데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영향과 감응을 받더라고요. 평화, 평화. 그렇지 우리는 근대인이니까! 우리는 근대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이 평화를 어떻게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가 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됐고 지금도 계속 상상 중이에요. 평화라는 것에 부딪히고, 아닌 거 같다고 느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고, 계속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
노랭 재춘님 덕분에 저도 알게 되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친구가 밀리터리 덕후거든요.
재춘 저도 그쪽 출신이에요.(웃음)
노랭 아 정말요? 그 친구는 군대를 갔는데 그 세계가 너무 재미있다고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재춘님은 밀리터리 덕후였다가 반전으로, 또 평화로 연결되었잖아요. 그 연결고리에 큰 기여를 한 건 무엇이었어요?
재춘 아버지의 죽음이 컸던 것 같아요. 저도 애초에는 밀리터리 덕후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는데요. 그전에는 무기들이 화려하니까 재밌었습니다. 세대론으로 따졌을 때 무기도 세대가 있어요. 무기체계가 변하는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에 베트남전쟁은 너무 흥미로운 전쟁이에요. 그러다가 이제 조금 뒤늦게 베트남전쟁 역사를 공부하면서 머리가 좀 커진 거죠.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로도 분노가 많았죠. 아버지가 고엽제 피해를 받았고, 베트남전쟁 때문에 내 몸 또한 이렇구나. 그걸 파고들어가는 과정에서 평화를 만나게 됐고 반전과 평화를 상상하게 되었죠. 아마도 끝까지 계속 상상을 할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말이에요.
2014년 베트남평화기행 푸옌성 붕따우 증오비 앞에서 @ 이재춘 제공
노랭 감사해요. 사실 묻고 싶었던 질문 중에 ‘베트남 전쟁 이슈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셨는지’가 있었는데요. 앞 질문과 연결해서 대답을 해주신 것 같아요. 덧붙여 주실 말이 있을까요?
재춘 제가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석미화 대표와 함께 2014년 여름에 평화기행을 갔었어요. ‘보여지는 것만이 사실인가’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그 여행에 참여했어요. ‘선택된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만이 사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담론’ 이외 다른 ‘이야기’들은 왜 발화되지 않을까 하는 평화기행의 틀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어요. 저는 이 이야기들의 ‘사실성’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사실’이 궁금했어요. 저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들이 있고, 그 사실들이 서로 경합하는 구조라는 생각이에요. 그 중에 선택된 이야기들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들이 있었고 평화기행 당시에 좀 힘들었거든요. 제가 체력이 그때도 약해서 스케줄도 힘들었던 것 같아요. 기행에 갔을 때는 석미화 선생님이랑 직접적으로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성격적으로 먼저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고 저는 기행에 참여한 수십 명의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근데 어느 피해 생존자분이 말씀해 주시는 자리에서 석미화 선생님의 개인사가 나오더라고요. 석미화 선생님의 외삼촌에 대한 기억들을 듣게 되었어요. 참전군인이셨다는 이야기, 한국에 돌아온 참전군인들이 마냥 잘 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랑 결이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이제 가끔 연락만 소식만 전하는 사이였는데 2023년 초에 연락이 왔어요. 참전군인을 만나는 구술활동을 하는데 참여해 보겠느냐고. 뭔진 잘 모르겠지만, 평화를 믿는다니까 반전하고 연결되잖아요. 와 재밌겠다 하고 함께했는데 시간을 그렇게 많이 들이는 줄 몰랐어요(웃음).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저도 제 생각과 부딪치게 되고, 다른 선생님들 만나고, 많이 배웠어요.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고마운 기회라고 생각해요.
노랭 2023년 이전부터 긴 인연이 있었네요. 재춘 님 이야기 들으면서 생각이 든 게, 저는 할아버지가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이에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아버지랑은 좀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관계가 멀기도 하고 저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하기엔 되게 모호한 지점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재춘님은 몸으로 체감하시는 것도 있을 거 같고, 확실히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보니 조금 더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재춘님의 정체성을 해석하거나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재춘 제 질환을 발견한 게 2015년 가을이거든요. 기절을 하고 전신마비가 오고 다리를 못 쓰고 그 전부터 뇌병변이라 그런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왜냐면, 보통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걷지 못하고 못 견디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내가 뇌질환이 있고, 올라가다 보니까 아버지의 전쟁 참전에 연관된 거라는 추정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반전을 자꾸 집착했던 것 같아요. 민간인학살에도 그때는 집착을 했었고, 오롯이 그게 사실이었기를 바랐어요. 근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뭔가 단정 내리기 어렵다는 생각 말이에요. 어떤 자료가 새로 나오면 다른 측면이 드러나고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혼란스러워지는 거잖아요. 근데 그것에도 문제의식이 들었어요. 우리는 지금 베트남전쟁을 아예 고착화하려고 그러잖아요. 민간인학살만을 부각하면서 전쟁의 다른 측면이 묻혀버리는 것 말이에요. 저는 제가 베트남전쟁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전신마취를 2번, 수술을 2번 하면서 몽롱하니 약간 환상 같은 게 있었어요. 전신미취를 하고 잠에서 딱 깨면서 이제 민간인학살만이 아닌 연결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이 머리에 막 떠오르더라고요. 분명 제가 영화에서 봤던 전쟁 이미지들이겠죠. 전에 들었던 얘기나. 베트남전쟁이 머리에 새겨져 버렸어요. 어 이것을 내가 풀어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고착되진 않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좀 더 많은 자료와 많은 이야기를 흡수해서 생각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가 보는 관점이 편협하잖아요. 편협해요. 제가 거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근데 그걸 조금씩 확장하고 세련돼지기도 하고 하는 과정을 지금 계속 겪고 있어요. 그 과정 속에서 제가 겪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좀 더 학술적으로 보고자 하는 게 강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참전군인 2세이고 고엽제 관련자이자, 역사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니까. 연구자로 중심을 잡아가는데 지금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2022 전주 쿤스트서학 이재갑 사진전. 아버지와 나에 대한 전시 앞에서 @ 이재춘 제공
노랭 감사합니다. 이제 거의 마지막 질문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아카이브 영화 기억 활동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그리고 재춘 쌤의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되시나요?
재춘 스스로는 분노에서 좀 벗어나서 연구자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게 강해져 있어요. 아마 더 강화될 것 같아요. 거기 매몰되면 시야가 좁잖아요. 제가 계속 상상하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다른 선생님들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통창으로써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이 더 소중해질 것 같아요. 노랭님도 마찬가지고 세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다른 과정을 겪었지만, 베트남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함께 고민한다는 게 기뻐요. 동지같은 느낌이 있고요. 일단 저는 박사 수료하고 논문을 써야 되니까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건 라이센스를 따야 뭘 말을 해도 먹히잖아요.(웃음) 그래서 일단 거기에 집중은 하되 이제 궁극적으로 고민하는 지점이 결국 평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카이브평화기억이 변화하는 과정에 함께하며 관계할 것 같아요. 답을 내리기보다는 놓친 게 없는가를 좀 더 살피는 과정이 저에게도 성장의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노랭 저에게도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웃음) 그러면 재춘님한테는 분노가 당사자성과 연관된 느낌이고, 연구자로서 바라본다는 건 좀 더 큰, 숲을 보는 느낌일까요?
재춘 큰 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제가 느끼는 분노는 어떤 한 부분이잖아요. 사적인, 가정사적인부분이죠. 이 베트남전쟁이란 우리나라 현재 상황과도 연결돼 있어요. 우리가 사는 금융, 경제 시스템의 고리를 끊어버린 계기 자체가 베트남 전쟁 때 기원했다고 하거든요.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단순히 민간인학살과 전쟁사의 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어요. 더 많이 보고 싶고, 동시에 항상 불안이 있어요. 제가 어떤 자료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방향으로 컨테스트를 짜고 텍스트를 분석해요. 근데 만약에 다른 자료가 나오면, 다른 측면이 나오면 그게 제일 무섭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건 엎어지는 거잖아요. 이걸 고려하지 않으면 반쪽짜리잖아요. 놓치는 게 생긴다는 두려움이 강해서 계속 여러 선생님들하고 교류도 하고 활동을 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열어두려 하고 있어요. 좋은 끝이란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열어놓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열어놓을 수 있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 안정적이지 않고, 편협하지 않고, 그런데 결국에는 또 자료를 수집해서 또 편협하게 볼려고 하겠죠. 저 스스로 계속 경계하면서 조금씩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노랭 저도 공감이 돼요. 저도 뭔가 계속 제가 모르는 부분에서 어떤 것을 혐오하거나 아니면 어떤 것을 놓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또 안정적인 걸 추구하고 정의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재춘 참 무겁죠. 예를 들면 이번에 참전군인 어르신이 기증해 주신 월남전 당시 사진 자료가 좀 있어요. 그거를 스캔 뜨면서 보다가 이상한 사진이 하나 있는 거예요. 베트남어로 ‘월남 군인의 가족이 사는 집’(주둔지 근처의 매춘업소로 추정)이라고 써 있고 젊은 베트남 여성과 꼬마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라이따이한이 아닌 것 같아요. 여성에겐 굉장히 수치스러울 수 있는 포즈를 취하면서 옆에 한국 군인이 총을 들고 있었어요. 그는 사병이에요. 장교가 아니라. 그런 사진을 찍은 자료가 하나 있는 거예요. 저는 라이따이한 분야를 군대의 문제로 다 뒤집어 씌우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제가 만남을 했던 장교들이나 제가 만났던 분들에 한해서는 베트남 여성과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자료를 본 이후 참전기간을 좀 세세하게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진이 찍힌 참전 시기가 72년이거든요. 그렇다면 자료를 준 분의 참전 시기와 보직, 어느 지역에서 근무했는지가 중요하게 된 거예요. 이게 더 많은 사례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자료들을 통해 생각했던 것조차 단정 내리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능성은 또 있다. 71년부터 73년 후반기 참전했던,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전투 없이 지냈던 군인들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이따이한 분들을 보면 대부분 60년대생은 본 적이 없고, 70년대 초반생이거든요. 제가 그 이전에 생각했던 한국군대는 60년대였던 거예요. 그 이후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이 좋은 이유가 고정되거나 고착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변화하잖아요. 생동하잖아요. 새로 더해지고, 문제의식이 첨예해질 수도 있고, 아닌 것 같으면 넓어지기도 하고, 그 과정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즐겁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랭 재춘님 덕분에 역사적 사실 확인이라던가, 연결된 역사들을 많이 접하게 돼요. 그래서 항상 고맙습니다. 이번 구술 활동에 재춘님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 했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녹취록을 엄청 꼼꼼하게 정리해 주셨어요. 항상 정리하신 녹취록 보면은 좀 놀라거든요. 엄청 세세하게 각주나 구술자의 행동, 분위기를 정리하세요. 그런 방식으로 구술 활동에 참여하고 계시기도 하는데 사실 이번에 구술 활동 공유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이번 활동에 참여하면서 아니면 바라보면서 새롭게 뭔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들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재춘 올해는 기록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고 분위기가 새롭게 다른 것 같아요. 안정감이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는 것 같고 반면 색깔이 너무 능숙하기도 해요. ‘조금 모른다’에서 접근했을 때 보여지는 그리고 그런 감각들이 적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역시 참여하시는 분들에 따라서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지구나를 느껴요. 아마 12월 12일날 결과물도 사뭇 다를 거 같아요. 각자의 입장이 확실하게 있어서 토론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참전군인 분들이 가지고 계신 이야기도 흥미롭게 봤어요.
노랭 맞아요.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니 분위기가 매번 달라지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현재 저희는 내부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며 참전군인을 만나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지점을 주목하여 나눌지 고민하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공유회 자리에 오셔서 풍성한 토론이 이어지면 좋겠어요.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며 든 생각이 있는데요. 이렇게 재춘님처럼 구술활동으로 인연이 쌓이고 앞으로도 연결된다면 아카이브평화기억의 활동과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어요. 많은 분들과 연결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시간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노랭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가
날이 추워지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한해가 또 지나가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한다. 구술활동공유회를 준비하고 겨울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소식지 후원 회원 인터뷰'를 핑계삼아 재춘을 만났다. 재춘은 올해로 2년째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를 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춘은 대면으로 만나기보다 온라인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날이 더욱 많다.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바쁜 일정 사이사이 우리는 회의와 세미나를 중심으로 꽤 자주 만났다. 그럼에도 단둘이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처음이다.
어린시절부터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재춘은 지금 평화에 관심이 많다.
그의 변화하는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재춘 @ 아카이브평화기억
노랭 안녕하세요. 구술공유회를 준비하며 온라인으로 자주 뵈었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그리고 재춘님을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도 간단히 소개 부탁해요.
재춘 서울에는 병원 때문에 자주 오가고 있어요. 저는 고엽제후유증으로 사망한 참전군인의 2세고요. 추정 가능한 심증을 갖고 있는 고엽제 관련 질환을 앓고 있어요. 저만 다르게 친구들처럼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지 못했고 지금은 결국 전남대 사학과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노랭 감사합니다. 재춘님과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인연은 이제 2년이 되었네요. 23년부터 2년째 구술 활동을 같이 하고 참여하고 계세요. 그리고 또 별도로 저희는 책 세미나도 같이 하고 있잖아요.
재춘 제일 재미있는 세미나예요. (웃음)
노랭 맞아요. (웃음)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을 함께하면서 저는 재춘님에 대해서도, 재춘님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럴수록 궁금해지더라고요. 전쟁과 평화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재춘 저는 원래 전쟁 자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삶과 죽음이 교차하니까요. 전쟁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많이 봤는데 전쟁영화만 많이 보고 거기 나온 장비를 항상 궁금해하는 아이였었어요. 전쟁 소설과 영화를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참전군인인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아버지가 왜 이렇게 죽어야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유를 알아 보고 싶어서 역사를 뒤늦게 공부를 하게 됐어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저에게는 전쟁과 반전이라는 키워드가 남게 되었어요. 전쟁을 반대하는 쪽이었어요. 아카이브평화기억 단체를 2023년에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평화라는 것이 결국은 근대적인 개념이잖아요. 한자어가 조어된 근대적인 언어인데요. 아카이브평화기억을 만나고 평화를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반전의 개념에서 평화를 상상하게 된 거죠. 구체적으로 활동가 선생님들은 평화를 사유하면서 행동으로 옮기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 하잖아요. 나는 거기까지는 아니었는데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영향과 감응을 받더라고요. 평화, 평화. 그렇지 우리는 근대인이니까! 우리는 근대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이 평화를 어떻게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가 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됐고 지금도 계속 상상 중이에요. 평화라는 것에 부딪히고, 아닌 거 같다고 느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고, 계속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
노랭 재춘님 덕분에 저도 알게 되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친구가 밀리터리 덕후거든요.
재춘 저도 그쪽 출신이에요.(웃음)
노랭 아 정말요? 그 친구는 군대를 갔는데 그 세계가 너무 재미있다고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재춘님은 밀리터리 덕후였다가 반전으로, 또 평화로 연결되었잖아요. 그 연결고리에 큰 기여를 한 건 무엇이었어요?
재춘 아버지의 죽음이 컸던 것 같아요. 저도 애초에는 밀리터리 덕후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는데요. 그전에는 무기들이 화려하니까 재밌었습니다. 세대론으로 따졌을 때 무기도 세대가 있어요. 무기체계가 변하는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에 베트남전쟁은 너무 흥미로운 전쟁이에요. 그러다가 이제 조금 뒤늦게 베트남전쟁 역사를 공부하면서 머리가 좀 커진 거죠.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로도 분노가 많았죠. 아버지가 고엽제 피해를 받았고, 베트남전쟁 때문에 내 몸 또한 이렇구나. 그걸 파고들어가는 과정에서 평화를 만나게 됐고 반전과 평화를 상상하게 되었죠. 아마도 끝까지 계속 상상을 할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말이에요.
2014년 베트남평화기행 푸옌성 붕따우 증오비 앞에서 @ 이재춘 제공
노랭 감사해요. 사실 묻고 싶었던 질문 중에 ‘베트남 전쟁 이슈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셨는지’가 있었는데요. 앞 질문과 연결해서 대답을 해주신 것 같아요. 덧붙여 주실 말이 있을까요?
재춘 제가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석미화 대표와 함께 2014년 여름에 평화기행을 갔었어요. ‘보여지는 것만이 사실인가’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그 여행에 참여했어요. ‘선택된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만이 사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담론’ 이외 다른 ‘이야기’들은 왜 발화되지 않을까 하는 평화기행의 틀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어요. 저는 이 이야기들의 ‘사실성’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사실’이 궁금했어요. 저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들이 있고, 그 사실들이 서로 경합하는 구조라는 생각이에요. 그 중에 선택된 이야기들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들이 있었고 평화기행 당시에 좀 힘들었거든요. 제가 체력이 그때도 약해서 스케줄도 힘들었던 것 같아요. 기행에 갔을 때는 석미화 선생님이랑 직접적으로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성격적으로 먼저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고 저는 기행에 참여한 수십 명의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근데 어느 피해 생존자분이 말씀해 주시는 자리에서 석미화 선생님의 개인사가 나오더라고요. 석미화 선생님의 외삼촌에 대한 기억들을 듣게 되었어요. 참전군인이셨다는 이야기, 한국에 돌아온 참전군인들이 마냥 잘 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랑 결이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이제 가끔 연락만 소식만 전하는 사이였는데 2023년 초에 연락이 왔어요. 참전군인을 만나는 구술활동을 하는데 참여해 보겠느냐고. 뭔진 잘 모르겠지만, 평화를 믿는다니까 반전하고 연결되잖아요. 와 재밌겠다 하고 함께했는데 시간을 그렇게 많이 들이는 줄 몰랐어요(웃음). 재미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저도 제 생각과 부딪치게 되고, 다른 선생님들 만나고, 많이 배웠어요.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고마운 기회라고 생각해요.
노랭 2023년 이전부터 긴 인연이 있었네요. 재춘 님 이야기 들으면서 생각이 든 게, 저는 할아버지가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이에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아버지랑은 좀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관계가 멀기도 하고 저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하기엔 되게 모호한 지점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재춘님은 몸으로 체감하시는 것도 있을 거 같고, 확실히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보니 조금 더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재춘님의 정체성을 해석하거나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재춘 제 질환을 발견한 게 2015년 가을이거든요. 기절을 하고 전신마비가 오고 다리를 못 쓰고 그 전부터 뇌병변이라 그런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왜냐면, 보통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걷지 못하고 못 견디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내가 뇌질환이 있고, 올라가다 보니까 아버지의 전쟁 참전에 연관된 거라는 추정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반전을 자꾸 집착했던 것 같아요. 민간인학살에도 그때는 집착을 했었고, 오롯이 그게 사실이었기를 바랐어요. 근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뭔가 단정 내리기 어렵다는 생각 말이에요. 어떤 자료가 새로 나오면 다른 측면이 드러나고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혼란스러워지는 거잖아요. 근데 그것에도 문제의식이 들었어요. 우리는 지금 베트남전쟁을 아예 고착화하려고 그러잖아요. 민간인학살만을 부각하면서 전쟁의 다른 측면이 묻혀버리는 것 말이에요. 저는 제가 베트남전쟁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전신마취를 2번, 수술을 2번 하면서 몽롱하니 약간 환상 같은 게 있었어요. 전신미취를 하고 잠에서 딱 깨면서 이제 민간인학살만이 아닌 연결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이 머리에 막 떠오르더라고요. 분명 제가 영화에서 봤던 전쟁 이미지들이겠죠. 전에 들었던 얘기나. 베트남전쟁이 머리에 새겨져 버렸어요. 어 이것을 내가 풀어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고착되진 않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좀 더 많은 자료와 많은 이야기를 흡수해서 생각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가 보는 관점이 편협하잖아요. 편협해요. 제가 거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근데 그걸 조금씩 확장하고 세련돼지기도 하고 하는 과정을 지금 계속 겪고 있어요. 그 과정 속에서 제가 겪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좀 더 학술적으로 보고자 하는 게 강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참전군인 2세이고 고엽제 관련자이자, 역사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니까. 연구자로 중심을 잡아가는데 지금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2022 전주 쿤스트서학 이재갑 사진전. 아버지와 나에 대한 전시 앞에서 @ 이재춘 제공
노랭 감사합니다. 이제 거의 마지막 질문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아카이브 영화 기억 활동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그리고 재춘 쌤의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되시나요?
재춘 스스로는 분노에서 좀 벗어나서 연구자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게 강해져 있어요. 아마 더 강화될 것 같아요. 거기 매몰되면 시야가 좁잖아요. 제가 계속 상상하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다른 선생님들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통창으로써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이 더 소중해질 것 같아요. 노랭님도 마찬가지고 세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다른 과정을 겪었지만, 베트남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함께 고민한다는 게 기뻐요. 동지같은 느낌이 있고요. 일단 저는 박사 수료하고 논문을 써야 되니까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건 라이센스를 따야 뭘 말을 해도 먹히잖아요.(웃음) 그래서 일단 거기에 집중은 하되 이제 궁극적으로 고민하는 지점이 결국 평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카이브평화기억이 변화하는 과정에 함께하며 관계할 것 같아요. 답을 내리기보다는 놓친 게 없는가를 좀 더 살피는 과정이 저에게도 성장의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노랭 저에게도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웃음) 그러면 재춘님한테는 분노가 당사자성과 연관된 느낌이고, 연구자로서 바라본다는 건 좀 더 큰, 숲을 보는 느낌일까요?
재춘 큰 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제가 느끼는 분노는 어떤 한 부분이잖아요. 사적인, 가정사적인부분이죠. 이 베트남전쟁이란 우리나라 현재 상황과도 연결돼 있어요. 우리가 사는 금융, 경제 시스템의 고리를 끊어버린 계기 자체가 베트남 전쟁 때 기원했다고 하거든요.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단순히 민간인학살과 전쟁사의 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어요. 더 많이 보고 싶고, 동시에 항상 불안이 있어요. 제가 어떤 자료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방향으로 컨테스트를 짜고 텍스트를 분석해요. 근데 만약에 다른 자료가 나오면, 다른 측면이 나오면 그게 제일 무섭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건 엎어지는 거잖아요. 이걸 고려하지 않으면 반쪽짜리잖아요. 놓치는 게 생긴다는 두려움이 강해서 계속 여러 선생님들하고 교류도 하고 활동을 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열어두려 하고 있어요. 좋은 끝이란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열어놓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열어놓을 수 있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 안정적이지 않고, 편협하지 않고, 그런데 결국에는 또 자료를 수집해서 또 편협하게 볼려고 하겠죠. 저 스스로 계속 경계하면서 조금씩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노랭 저도 공감이 돼요. 저도 뭔가 계속 제가 모르는 부분에서 어떤 것을 혐오하거나 아니면 어떤 것을 놓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또 안정적인 걸 추구하고 정의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재춘 참 무겁죠. 예를 들면 이번에 참전군인 어르신이 기증해 주신 월남전 당시 사진 자료가 좀 있어요. 그거를 스캔 뜨면서 보다가 이상한 사진이 하나 있는 거예요. 베트남어로 ‘월남 군인의 가족이 사는 집’(주둔지 근처의 매춘업소로 추정)이라고 써 있고 젊은 베트남 여성과 꼬마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라이따이한이 아닌 것 같아요. 여성에겐 굉장히 수치스러울 수 있는 포즈를 취하면서 옆에 한국 군인이 총을 들고 있었어요. 그는 사병이에요. 장교가 아니라. 그런 사진을 찍은 자료가 하나 있는 거예요. 저는 라이따이한 분야를 군대의 문제로 다 뒤집어 씌우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제가 만남을 했던 장교들이나 제가 만났던 분들에 한해서는 베트남 여성과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자료를 본 이후 참전기간을 좀 세세하게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진이 찍힌 참전 시기가 72년이거든요. 그렇다면 자료를 준 분의 참전 시기와 보직, 어느 지역에서 근무했는지가 중요하게 된 거예요. 이게 더 많은 사례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자료들을 통해 생각했던 것조차 단정 내리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능성은 또 있다. 71년부터 73년 후반기 참전했던,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전투 없이 지냈던 군인들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이따이한 분들을 보면 대부분 60년대생은 본 적이 없고, 70년대 초반생이거든요. 제가 그 이전에 생각했던 한국군대는 60년대였던 거예요. 그 이후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이 좋은 이유가 고정되거나 고착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변화하잖아요. 생동하잖아요. 새로 더해지고, 문제의식이 첨예해질 수도 있고, 아닌 것 같으면 넓어지기도 하고, 그 과정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즐겁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랭 재춘님 덕분에 역사적 사실 확인이라던가, 연결된 역사들을 많이 접하게 돼요. 그래서 항상 고맙습니다. 이번 구술 활동에 재춘님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 했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녹취록을 엄청 꼼꼼하게 정리해 주셨어요. 항상 정리하신 녹취록 보면은 좀 놀라거든요. 엄청 세세하게 각주나 구술자의 행동, 분위기를 정리하세요. 그런 방식으로 구술 활동에 참여하고 계시기도 하는데 사실 이번에 구술 활동 공유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이번 활동에 참여하면서 아니면 바라보면서 새롭게 뭔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들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재춘 올해는 기록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고 분위기가 새롭게 다른 것 같아요. 안정감이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는 것 같고 반면 색깔이 너무 능숙하기도 해요. ‘조금 모른다’에서 접근했을 때 보여지는 그리고 그런 감각들이 적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역시 참여하시는 분들에 따라서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지구나를 느껴요. 아마 12월 12일날 결과물도 사뭇 다를 거 같아요. 각자의 입장이 확실하게 있어서 토론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참전군인 분들이 가지고 계신 이야기도 흥미롭게 봤어요.
노랭 맞아요.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니 분위기가 매번 달라지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현재 저희는 내부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며 참전군인을 만나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지점을 주목하여 나눌지 고민하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공유회 자리에 오셔서 풍성한 토론이 이어지면 좋겠어요.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며 든 생각이 있는데요. 이렇게 재춘님처럼 구술활동으로 인연이 쌓이고 앞으로도 연결된다면 아카이브평화기억의 활동과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어요. 많은 분들과 연결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시간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노랭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