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눈과 발 사이] 휘말린 이들과의 관계를 잇는 기억 공간 - 매향리 평화역사관과 6.25월남전흔적전시관에서의 만남

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규모 있게 혹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당연한 듯 기억과 기념의 공간이 있다. 이곳을 걸으며 이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하는지 마주한다. 함께한 이들은 참전군인 구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때로는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동행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올해로 5년째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고 있다. 평화 프로젝트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전쟁을 겪은 이들과 소통하며 갈등을 마주하고, 복잡한 가운데 연루됨을 알아차리며 평화를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답사단 이름으로 붙인 ‘눈과 발 사이’는 직립한 인간이 갖는 한계와 오류를 직시하고, 관점(觀點)을 달리하여 낯설게 보자는 뜻이다. 뜨거운 날 수첩 하나 손에 쥐고 발로 걸으며 깨진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글에 비끄러매었다. 유랑하며 기억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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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역사관 전만규 관장(좌측) 6.25월남전흔적전시관 서상길 사무국장(우측) 두 사람의 해설을 듣고 있는 '눈과 발 사이' 참여자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없이는 전달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멀리까지 온 우리를 희한하게 보았다. 과거의 아픈 기억에 함께 귀 기울여주기를 바라온 마음 때문인지 '어디서 이런 젊은 사람들이 왔냐'며 신기하고 반갑게 여겼다. 이 희한함, 신기함, 반가움 자체가, 우리가 이미 서로 너무 오랜 기간 단절되어 있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이 글은 '매향리 평화역사관' 전만규 관장, '6.25·월남전흔적전시관' 서상길 사무국장과의 만남에 집중한다. 나는 그동안 평화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전국의 수많은 기념관, 역사관, 박물관에서 종종 큰 공허함을 느꼈다. 기억 공간, 추모 공간으로 불리고자 하는 많은 곳들에서 '종결되고 완성된 사건'은 있지만 자본과 권력 구조 너머 삶을 살았던 존재들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 제주 4.3,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5.18 민주화운동 등 그 무엇 하나 종결된 폭력은 없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그 시간을 감내하는 존재가 많기 때문이다. 사건이 끝나고 지금은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하여 완성된 서사로 말할 수 없다. 어쩌면 현재의 많은 서사 구조가 과거와의 단절을 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과거와 연결되기 위해선 결국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필요하다. 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일지라도, 전시 구성이 단순히 지식 정보를 나열하고 해설하는 것으로는 공감과 이해의 영역에 가까워질 수 없음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과의 만남은 일반적인 전시 해설과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 특징적으로 두 사람은 해당 전시실과 연관된 역사를 겪은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기획자 그리고 큐레이터이다. 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아니다.

또한 두 사람의 해설은 정해진 시나리오 안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서로가 응답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질문하고 대화하며 변화한다. 서로 '경청'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해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만남' 혹은 '대화'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평화를 추구하는 기억 공간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쩌면 이렇게 서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을 품은 채 함께 경청하고 대화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당사자성을 지닌 전시 해설과 대화로 '관계를 형성하는 기억'

일반적으로 전시관 관람 동선은 관람객이 입장을 하고, 비치된 전시물을 보고, 퇴장하는 선형적인 순서로 구성된다. 이 과정 안에서 많은 곳이 특별한 체험이나 워크숍을 운영하기도 하고, 도슨트 투어로도 불리는 전시 관람 해설을 포함한 시간을 마련한다. 이때, 만약 전시 해설 운영을 하는 주체가 '매향리 평화역사관'과 '6.25월남전흔적전시관'에서처럼 실제 해당 역사의 당사자인 경우, 전달되는 내용의 생생함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들이 당사자임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직간접적인 사람들과 대화해왔기 때문일까? 다른 기억 공간들과 달리, 두 사람은 폭력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한 시점에서 '종결'된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현재까지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이야기한다. 현재 진행형의 고통을, 당사자를 통해 직접 듣고 주위를 둘러보며 반추하게 된다.

사실 전만규 관장과 서상길 사무국장과의 대화는 매끄럽지 않았다. 선형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기본적인 관람 동선은 존재한다. 두 사람은 관람객들에게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일들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렇게 대화하고 질문하고 경청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다 보니, 동선이 달라지고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변형의 정도가 일반 도슨트보다 훨씬 유연하고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파편화되어 있는 사료와 기억들이 조금씩 연결되고 복잡한 맥락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단순히 정보 전달을 위한 전시 해설을 넘어 '관계를 만드는 장소'로 매개된다. 그리고 그 현장성이 평화에 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만든다. 기억과 경험을 전해 듣게 되는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더 강하게 실감하게 된다. 많은 기억 공간이 과거의 사건을 일축하며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같은 용어들은 이러한 당사자들 앞에서 결코 종결될 수 없다. 불완전하고 흔들릴지라도 허울뿐인 완결된 서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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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역사관 전만규 관장의 전시 해설 모습 역사관 내외부를 함께 걸어 다니면서 하나하나 실제 기록과의 차이를 들려주기도 하고, 수집한 자료를 직접 만지고 소리도 내어보며 본인이 경험했던 여러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하나 세심히 설명하는 모습




아카이빙되고 편집된 말끔한 사료에 앞서 '현존하는, 현존했던 삶'

앞서 말한 것처럼 전만규 관장과 서상길 사무국장 두 사람은 각 장소의 '큐레이터'이자 '증언자'이다. 각자 수십-수년간 모아온 풍부한 사료 못지않게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존재 자체가 현재 진행형의 역동성을 지닌 생생한 아카이브이다. 큐레이터의 정성과 세월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또한,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을 담은 해설 없이는 절대로 이 사료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선입견 안에서 기대하고 바랬던 이야기 너머 다른 관점과 시선이 가득하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들은 단순히 전시를 설명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현장에서 살았고, 그 기록과 물품을 모았고, 사라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평화라는 것을 함께 기념하는 수많은 기억 공간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포함하여 수많은 당사자 그리고 휘말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가갔을까.

평화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대부분 '당사자성'이 배제된 전시물을 만난다. 많은 곳의 전시 자료와 보고서들은 지금껏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맥락을 깊이 있게 조명하거나 전시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 사이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연결하기보다는 연도별로 마치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는 듯 매끄럽게 설명된 문장들로 결론을 내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두 전시관의 이야기들은 그런 연대기적 서술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께 성찰할 수 있는 풍부한 의미와 맥락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이 생생한 현존과 아카이브에 지속성과 영속성을 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들었다. 두 현장 모두 사료를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어려운 조건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6.25·월남전흔적전시관'은 그나마 새 건물 내에 보관되어 있어서 관리가 용이했지만, '매향리 평화역사관'은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특히 온습도 변화나 화재-침수, 벌레 등에 취약했다. 지금이라도 원본 복제와 함께 예방 보존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일이 필요해 보였다. 보존과 전승을 위한 민관의 복합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사람은 죽는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들이 만났던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국가 폭력에 노출된 이들 중에는 트라우마가 있거나, 피해가 생길까 봐 진술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남은 생애를 정리하기 위해 과거의 흔적이 있는 물품을 치운 경우도 많다. 매향리 마을 주민들은 계속해서 마을을 떠나갔다. 참전군인은 고령의 나이에 건강이 나빠 구술 자체가 어려운 이들이 많고, 인터뷰 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돌아가시는 경우도 많다며 서상길 사무국장은 안타까워했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삶의 흔적은 방치된 채 소멸하고 있다. 앞으로 배우고 전할 수 있는 시간은 짧고 유한하다.



편견과 단절로 발생하는 공백

참전군인을 떠올리며 '태극기 부대'를 생각하기도 한다. 흔히 보수-꼴통-불통-이기적인 노인이라는 사회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편견으로 인해 우리는 듣고 대화하고 성찰할 무수한 시간을 놓쳤다. 그리고 이미 과거사를 연속으로 구성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었다. 현실이 이러하니 전국의 국가 폭력, 평화, 전쟁과 관련한 주제의 수많은 기억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향한 감각과 물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가 없다. 극소수의 시민 단체와 연구자, 활동가들이 무리하면서까지, 대안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공유하는 실천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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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월남전흔적전시관 서상길 사무국장의 전시 해설 모습 전시 전체 동선에 맞게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던 과정에서의 기억을 들려주는 모습



학창 시절부터 우리는 전쟁, 분쟁, 폭력에 관해 수없이 배운다. 그럼에도 함께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현실의 반복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왕과 위인 그리고 영웅으로 분류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과거사를 다루는 교과서와 전시 안에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 고민할 일이 거의 없었다. 현존하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미래로 이어지도록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매듭지어진 사건의 결론과 의의만 쫓기에 급급했다.

우리가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했다고 착각'한 탓에 과거사는 어쩌면 엉망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나 정부가 아닌 개인이 시작하여 아카이브하고 기획해 쌓인 결과물 앞에서 이제라도 사람과 삶 그리고 대화에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구술과 기억을 통해 함께 응답할 수 있는 관계 만들기

우리는 보통 전시관이 무엇을 수집했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기록한 자료에만 집중한다. 사람들이 이 자료를 왜 수집했고, 어떤 인생이 담겨 있고, 어떤 가치관으로 선택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많은 전시관이 전통적으로 전자에 아주 능숙하다. 사물을 수집하고, 문서를 보존하고, 사진에 연도를 붙이고, 사건을 연표로 만들고, 연구자가 그것을 해석해서 관람객에게 전달한다.

이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기록이 없으면 기억이 왜곡되거나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과 사료는 기억에 관한 일종의 물적 기반이 된다. 하지만 기억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꺼내는 정확한 파일이 아니다. 기억하는 사람은 현재의 자신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듣는 사람의 질문에 반응하고, 때로는 자신의 기억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계가 명확하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한 삶에 다가가기 위하여 이러한 불완전한 기억과 만나야 한다.

그렇기에 전만규 관장과 서상길 사무국처럼 직접 경험을 가진 당사자가 참여하고 기획하고 해설하는 전시가 중요하다. 두 사람과의 만남은 단순히 조명받지 못했던 현장의 목소리가 제공되는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누군가가 응답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통해 누군가의 기억과 경험이 관람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가지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다.

사료와 함께 기억하고, 발화하고 경청하고 질문하고 새로운 맥락과 의의를 도출한다. 이 과정 자체가 다시 기억되고 기록되며 구성이 가능한 순환적인 피드백과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사료가 기억을 붙잡아주고, 연구는 기억에 맥락을 만들어 주고, 당사자의 목소리는 기억에 삶을 돌려주고, 경청하는 사람은 그 기억이 다음 사람에게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처럼 당사자가 지속해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당사자가 살아있는 전시물로 단순 소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반복해서 꺼내도록 강요하면서 현재에 다른 삶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평화에 관해 함께 감각할 수 있는 다양한 주체가 함께 발화해야 한다. 나누어진 경험과 체험을 어떻게 평화를 만드는 기억으로 구성하고 연결해 나갈지 함께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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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역사관 전만규 관장(좌측)과 6.25월남전흔적전시관 서상길 사무국장(우측) 전시 해설 중인 두 사람



폭력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이제는 '과거를 쉽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울지라도 '과거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입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관련하여 생애 구술사 기록 활동이 있지만 기록하고 만드는 일이 '사업을 위한 사업'으로 혹은 방치된 기록으로 머물러있는지 검토할 필요도 있다. 구술 활동이 기존의 납작한 연표나 연대기를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풍부한 맥락을 지닌 살아있는 대화를 만들기 위해 여러 기억을 수집하고 교차검증하고, 믿고, 맥락의 흔적을 쫓기 위한 실천이라는 점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관계를 잇는 기억 공간 만들기

이 글은 두 사람의 실천 과정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집중하고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이 경험한 역사 그리고 아카이빙의 과정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시되는 장소와 물품의 형태, 서술 방식도 다르다. 각각의 특징이 분명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다만, 당사자 혹은 휘말리고 만 사람과의 대화와 만남 없이는 도저히 연결되기 어려운 역사 속에서 두 사람과의 만남이 시사하는 바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사료는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지만, 사람은 그 과거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기억 공간들이 나아갈 방향성에 이 두 사람의 실천 과정을 함께 조명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이 마을에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 한 사람만이 아닌 여러 사람의 서사를 통해 어떻게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했는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배움을 통해 다양한 기억 공간에서 그 가능성을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살아온 세대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현실을 전하고자 노력해왔는지 그 치열한 경험이 우리가 앞으로 함께 나누고 이어가야 할 기억이다. 어쩌면 이러한 구술은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나눠주며 전승될 수 있는 일종의 무형유산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 전해주는 기억과 경험의 흔적이 아무리 생생하고 의미 있을지라도 내가 살았던 시간과 경험은 아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메모한 노트를 다시 읽고, 촬영한 사진을 살펴보고, 녹음한 기록을 몇 번을 들어봐도, 그 삶에 내가 온전히 가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가 닿기 위해 두 사람과의 만남 이후 떠오른 복잡한 질문과 감정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한 번 방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삶의 문제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더 절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휘말린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 다른 기억 공간에서의 경험보다도 이곳에서 더 깊이 체감된 점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들이 삶과 연결되지 못한 공허한 기억 공간에서도 만들어지길 바랬다.

매향리 역사기념관 맞은편에 있는 평화기념관을 방문했던 날, 저 아래 보이는 매향리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공허했다. 휘말린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기념 너머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잊혀진 삶의 흔적을 마주하고 기억할 수 있을 지 더 깊이 고민하고, 사람과 기억 공간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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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기념관 추모 위령비 전망대에서 촬영한 풍경 쿠니사격장 일대 그리고 농섬 일대가 한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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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발 사이] 휘말린 이들과의 관계를 잇는 기억 공간 - 매향리 평화역사관과 6.25월남전흔적전시관에서의 만남 (26.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