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눈과 발 사이] 전쟁 기념의 현주소, 오음리를 가다 - 전쟁에 관한 국가 주도 기념물은 기록인가 정치 프로파간다인가 ②

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규모 있게 혹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당연한 듯 기억과 기념의 공간이 있다. 이곳을 걸으며 이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하는지 마주한다. 함께한 이들은 참전군인 구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때로는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동행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올해로 5년째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고 있다. 평화 프로젝트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전쟁을 겪은 이들과 소통하며 갈등을 마주하고, 복잡한 가운데 연루됨을 알아차리며 평화를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답사단 이름으로 붙인 ‘눈과 발 사이’는 직립한 인간이 갖는 한계와 오류를 직시하고, 관점(觀點)을 달리하여 낯설게 보자는 뜻이다. 뜨거운 날 수첩 하나 손에 쥐고 발로 걸으며 깨진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글에 비끄러매었다. 유랑하며 기억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연재를 시작한다.



답사 당일(6월 20일) 오후에 아카이브평화기억 동료들과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화천군 오음리에 소재한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아래 만남의 장)'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비가 개어 기념관 뒤편 죽엽산 정상에는 안개구름이 걸려 있었다.

적막하게 가라앉은 시간 때문인지 장소가 주는 고요함이 있었다. 그곳을 찾은 다른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호젓한 자연휴양림처럼 생긴 이곳은 분위기와 달리 1966년 4월부터 월남 파병 전에 참전군인이 한 달 동안 실전 훈련을 받던 곳이다. 지금은 춘천 신북읍 유포리에서 화천 간용면 간척리까지 터널이 관통되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196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아흔 아홉 굽이 험준한 고갯길 너머 월남파병훈련장


참전군인 허단(맹호 26연대 혜산진부대 공작대로 1968~1970 파병)은 1968년 겨울에 훈련장을 찾아가던 때를 "둘러보아도 둘러보아도 굽이친 첩첩 산맥뿐"이었다고 기억했다. 전시관에는 오음리로 오는 장면을 "그 옛날 춘천역에 내린 용사들은 털털거리는 트럭에 올라 뽀얀 먼지를 날리며 아흔아홉 굽이 배후령"을 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길에서 2009년 한 해에도 추락사고로 3명이 죽고 17명이 중경상을 입을 정도였고 이런 사고는 매년 되풀이되었다. 훈련을 마치고 춘천역까지 갈 때도 겨울이면 눈 쌓인 위험한 고개를 걸어서 넘었다고 한다.(<강원일보> 2010.02.02., 오피니언).

당시 훈련장은 도송리, 오음1리·2리, 간척3리, 용호리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만남의 장은 그중에서 화천군 간동면 죽엽산길 즉, 우리가 오음리라고 부르는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다. 오음리를 방문한 참전군인에 따라 지형이 생소하다고 말하는 것은 훈련 장소가 모두 오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6년 4월부터 베트남전쟁 기간에 수십만 명의 참전군인들이 이곳 훈련장을 거쳐 갔다.

답사 당일 우리는 나동주 참전군인과 동행했는데 그는 훈련 중에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슬로건은 들어보지 못했고, 고엽제(다이옥신)에 관해서도 전혀 교육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민간인을 억압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교육은 받았다고 했다. 훈련이 일반 부대보다 더 혹독하게 진행되어서 힘들게 느껴졌었다고 말했다. 그는 훈련 중 3명이 탈영했고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붙잡혔을 거라고 회상했다. 나는 아직 20대였을 청년들을 생각했다.



아오자이와 야자수 vs 부비트랩과 구찌터널

(재현되어 있는) 구찌터널 입구로 들어가기 직전에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이 환영 인사를 하는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서 있다. 처마가 있는 곳으로 들어서자 부비트랩 전시 코너가 보였다. 휴양림 같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리 상자 안 수제 부비트랩은 조악해 보였지만 살육에 사용되는 전쟁 도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가슴이 덜컥했다. 무기 설명만 있는 전시를 보고 과연 평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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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비트랩 전시코너 구찌터널로 가는 입구에 아오자이 차림의 베트남 여성의 인형이 서 있고, 바로 뒤편에 부비트랩 전시 코너가 있다. 



전시 코너를 지나 구찌터널 입구 바닥에 영어로 베트남이라고 쓰여 있어서 좀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연이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군이 총을 겨누는 앞에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투항하는 실물 크기 인형이 있었으나 문제가 되자 철거되었다. 터널 안에는 몇 군데 공간에 작전회의실이나 무기제작소, 병사침실 등을 재현해 놓았다. 재현된 사람 크기의 인형들 모습은 옷도 낡고 비루해 보였다. 앞서 본 부비트랩 유리 상자도 더럽고 많이 낡아 보였다. 야외에 설치된 것이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가 쌓인 탓도 있을 것이지만 평소 관리가 부실하다는 인상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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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마을의 조형물들 2008년 개관 초기에 전시되었던 재현물과 철거 후 모습이다. 왼쪽 사진은 윤충로 논문(「한국의 베트남전쟁 기념과 기억의 정치」 <사회와 역사> 제86집, 한국사회사학회, 2010, 173쪽)에서 인용하였다. 오른쪽 사진은 터널 입구의 한국군 재현물로 2019년 촬영, 가운데 사진 화살 표시에 두 조형물이 위치하였으며 자세히 보면 철거 흔적이 남아 있다.



실제 구찌터널은 웅크리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작은 크기지만 오음리는 일반인이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크게 만들었다. 만남의 장 팸플릿에서도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생각하면 구찌터널을 "색다른 볼거리"로 제공하는 것은 전쟁과 평화를 사유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인식과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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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터널 입구와 내부 (왼쪽부터 순서대로) 오음리 월남마을에 재현해 놓은 구찌터널 입구, 실제 베트남 구찌 터널 입구, 오음리 터널 내부와 재현물, 실제 베트남 구찌터널 내부와 재현물. 둘의 재현 방식에서 인식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가난한 베트남 전통가옥과 폭력적 재현

이곳을 찾는 일반인에게 또 하나 '볼거리'로 제공되는 것은 베트남 전통가옥일 것이다. 구찌터널을 빠져나오면 근처에 베트남 전통가옥 몇 채가 옹기종기 서 있다. "참전용사들에게 베트남 파병 때의 향수를 일깨워 주고"자 만든 공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베트남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억새풀이나 짚, 대나무 등"으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이곳에 베트남 전통가옥을 만든 의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의 일상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베트남 국적 결혼이민자를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는 시대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주택일까? 언젠가 한국 사람들이 분노한 뉴스가 있다. 1907년 도쿄권업박람회 수정관에 조선인 남녀 두 사람을 전시하여 일본인 관람객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했다는 내용이다. 만일 어딘가에서 한국인의 생활을 이해한다면서 굳이 낡고 초라한 초가를 전통가옥으로 소개한다면 우리는 어떨까? 역지사지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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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된 베트남 전통마을 사진은 현장에서 본 것보다 정갈하게 보일 수 있다. 돼지가 회색인 것은 흑색에 먼지가 쌓여서이다. 20여년 전 개관 때는 베트남에서 천연 야자를 들여와 가옥을 지었으나 더 이상 수입이 어려워져서 개보수할 때는 인조 야자잎으로 바꿀 계획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이 있었다.




평화와 통일을 실천하는 기념물이 되기 위해서는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에서 적지 않은 기념탑을 보고 왔는데 오음리에도 세 개의 기념탑이 있었다. 첫째, 월남(越南) 참전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평화수호참전기념탑'이 있다. 기념탑 상단부가 뭉툭하게 잘린 형상이라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당초에는 독수리를 밟고 올라선 인물상이 비둘기를 날리는 형상이 있었다. 2015년 초 우익단체 등이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밟고 서 있는 것에 대해 항의하여 철거되었다고 한다.

둘째, 오전에 답사한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의 '월남전참전기념탑'(2017.10.14.건립)에는 춘천지역 출신 전사자와 국가유공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면 오음리의 '월남전참전강원도전사자명비'(2020.6.30.건립)에는 춘천을 포함해 강원도 출신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들 두 석비의 전사자 명단을 교차 비교해 보니 각 2명씩 총 4명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었다. 기록의 문제인지 행정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셋째, 월남파병용사추모비(2002.12. 건립)가 있다. 한 장소에 시간 차를 두고 건립된 기념탑을 돌아보며, 기념물을 자꾸 늘린다고 기념이 깊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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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전참전강원도전사자명비와 월남파병용사추모비 이들 기념물은 월남참전기념관 옆 바람버뎅이 쉼터 앞을 지나 조금만 걸어가면 있다. 



춘천이든 오음리든 월남전 참전 기념에는 "우리 민족의 긍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위엄" "우방에 대한 보답"이라는 취지의 표현이 들어 있다. 베트남전쟁 관련 추모비나 기념탑은 21세기 들어서도 전국에서 꾸준히 건립되고 있는데 이러한 해석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세기가 바뀌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사유와 인식이 깊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진정으로 평화와 통일을 실천하는 전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월남(越南) 참전기념관에서 만난 '파병용사'의 속내

월남참전기념관 1, 2층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월남파병용사' 와 만났나. 영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안케전투를 회상한 참전군인이 있었다. 그는 "지루하고 무섭고 어두웠던 15일간의 전투"였다면서 "전사자료를 찾아보면 너무나 축소 은폐되어 있는 아군의 피해"를 지적하며 "과연 승리한 전투"였는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한국군의 활약에 묻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러 기념관에서 쉽게 만날 수는 없겠지만, 기념관을 방문한다면 당신도 자신만의 '파병용사'를 찾아보시라.

월남참전기념관 전시도 전체적으로 용산전쟁기념관의 베트남전쟁 전시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조금 인상적인 표현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파병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룬 점인데 베트남의 통일에 따른 남베트남 정부 소멸에 대해 "파병의 명분에 손상을 입은 것"이긴 하지만 "한국정부가 얻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얻은 후였기 때문에 파병의 의미 자체가 변절되거나 퇴색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어떻게든 긍정적인 평가로 끝맺으려는 글은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처럼 느껴졌다.

1991년 일본인 친구와 함께 '현대어학숙(現代語学塾)'에서 열린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미국 문서 공개에 따라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요청보다 먼저 베트남전 파병을 제안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월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자 온 국민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오음리 기념관에는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이 강요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전시관에서 본 또 하나의 인상적인 전시 내용이었다. 나머지 설명은 대부분 1960, 70년대 정치 프로파간다에 머물러 있었다.

이곳 전시관에서도 통킹만 사건처럼 전시 서술에 여러 오류나 문제가 방치되고 있다. 낯선 용어도 관람객의 이해를 방해한다.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미국화라는 말은 침략전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입장이 빚어낸 말이다.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군은 명백히 침략군이다. 그렇다면 미군에게 참전을 제안해서 이루어진 한국군의 참전 역시 침략인가?

전시관 곳곳에서 제안하는 평화와 통일, 자유, 교류와 공감 등은 슬로건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전쟁을 경제발전이나 국익, 국위 선양 같은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한다면 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에서 우리는 평화와 교류, 공감을 후세대에게 어떻게 실천하도록 가르칠 것인가. 베트남전쟁이든 한국전쟁이든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서서 사유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베트남전쟁에서 "청룡·맹호부대의 눈부신 활약"이라고만 기억하지 않고 전쟁에서의 군인의 '활약'은 인간을 살육하는 행위라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만 기록할 것이 아니라 전쟁에 동원된 청년들의 죽음과 전쟁 이후의 삶까지도 기억해야 한다.



오음리 월남파병훈련장이 평화를 상상하는 공간이 되려면

어쩌면 애초에 만남의 장을 '통일 안보 관광자원'이라는 상업화로 계획한 것은 잘못된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전쟁 관련 장소성을 띠는 기념 장소는 이곳 오음리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이나 각 지역의 추모비나 기념비와 달리 오음리만의 기억의 장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만남의 장 측에서는 "참전용사들이 고엽제 등 파병의 후유증을 잠시라도 털어 버리고 마음 놓고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만들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이와 관련된 시설은 없다. 병영체험을 위한 숙박시설과 훈련체험관 대신 고엽제 문제나 PTSD를 겪는 참전군인을 위한 치유센터가 만들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정 영웅전이 아니라 누구든 참전군인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기록센터가 들어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시설이야말로 참전군인들에게 필요한 시설이 아니었을까.

2008년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베트남 참전군인이 살아 있었을 것이다. 전시물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점차 필승의 신념으로 바뀌어 갔다"는 관 주도의 프로파간다는 있지만 이 일대가 후방 기지로서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조명은 거의 없다. 이곳을 만들면서 병사들의 훈련장 경험을 더 많이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당시 청년들은 어떤 심정으로 파병을 결심하고 그들에게 오음리 훈련장은 어떤 경험이며 의미였는지, 다각적인 콘텐츠 제작이 아쉽다.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오히려 평화를 상상하는데 좋은 소재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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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념의 현주소, 오음리를 가다 - 전쟁에 관한 국가 주도 기념물은 기록인가 정치 프로파간다인가 ② (26.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