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눈과 발 사이] 매향리의 기록은 누구의 말로 읽히고 있을까 - 도착하지 않은 기억, 침묵까지도 기다리는 아카이브를 상상하는 시간

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규모 있게 혹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당연한 듯 기억과 기념의 공간이 있다. 이곳을 걸으며 이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하는지 마주한다. 함께한 이들은 참전군인 구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때로는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동행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올해로 5년째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고 있다. 평화 프로젝트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전쟁을 겪은 이들과 소통하며 갈등을 마주하고, 복잡한 가운데 연루됨을 알아차리며 평화를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연재 제목이자 답사단 이름으로 붙인 ‘눈과 발 사이’는 직립한 인간이 갖는 한계와 오류를 직시하고, 관점(觀點)을 달리하여 낯설게 보자는 뜻이다. 뜨거운 날 수첩 하나 손에 쥐고 발로 걸으며 깨진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글에 비끄러매었다. 유랑하며 기억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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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평화역사관 내부 전만규 관장의 말을 경청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리 이곳을 가득 채운 어수선함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전시(Exhibition)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전시를 규격화된 건물 안에 고정된 사물을 눈으로 관람하는 일을 떠올린다. 일정한 온도와 조도가 유지되는 전시실, 깔끔한 벽면과 유리장,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된 사물들, 그 옆에 붙은 캡션. 관람객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걸으며 사물과 설명을 읽는다.

그러나 기억과 기록을 다루는 장소에서 전시는 유리장 안의 사물과 캡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 자체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때, 관람객은 전시물뿐만 아니라 그곳의 지형과 공기, 냄새 등 몸으로 감각되는 조건을 통해서도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전시장 안에 들이고 밖으로 남길 것인가는 결국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삶을 보이게 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매향리는 그런 장소였다. 한때 서해의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1950년대 초부터 미 공군의 쿠니 폭격장으로 사용됐다. 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집과 논, 갯벌 가까이에 떨어지는 포탄과 전투기의 굉음 속에서 살아야 했다. 2000년 5월 실탄 투하 훈련 중 폭탄 여러 발이 마을 인근에 떨어져 집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다친 사건은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연대로 이어졌고, 쿠니 폭격장은 2005년 폐쇄됐다.

폭격이 멈췄다고 해서 매향리의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염된 땅과 바다, 생업의 변화, 폭격 소리가 남긴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은 지금도 이 장소의 시간 안에 놓여 있다. 매향리의 기억은 전시장 안의 여러 기록물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몸에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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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평화역사관 뒷편 '평화의 종'과 구멍 뚫린 붉은 깃발 붉은 깃발은 과거 쿠니사격장에서 폭격 훈련 중임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전만규 관장과 주민들은 이 깃발을 내리기 위해 투쟁했다.



매향리평화역사관에 들어서자 붉은 비닐천 아래의 습기가 옷자락에 들러붙었다. 공간 안으로 들어가니 기다란 원형 테이블이 보였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는 동안 티셔츠 위로 땀이 흘렀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더위 속에서 전시물 하나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러한 관람 환경 자체가 전시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구성의 서투름처럼 느껴졌다. 이곳을 전시장이라고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다. 자료들 사이에서 시선은 자꾸 멈추고 옮겨 갔다. 작품처럼 보이는 여러 형상의 오브제와 다양한 종류의 기록이 한데 놓인 공간을 과연 '전시장'이라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다.

전만규 관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관람객들에게 전시물 한 점 한 점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에 놓인 자료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전시를 위해 마련된 것들이 아니다. 폭격이 이어지던 시절 현장에서 수거된 물건도 있었고, 주민들의 피해와 사격장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모은 문서도 있었으며, 주민들의 삶과 투쟁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도 있었다.

수많은 기록이 축적된 이 공간의 취약성은 전만규 관장의 노력과 시간이 없었다면 이미 흩어지거나 사라졌을지 모를 매향리의 기억 상태를 드러내는 듯했다. 정리되지 않고 쌓인 자료들과 열악한 관람 조건은 이곳의 기억이 개인에 의지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필요와 순간 속에서 남겨진 자료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나는 누가 이 자료를 지켜 왔는지, 이 기록들이 어떤 조건에서 보관되어 왔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오랫동안 감당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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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평화역사관 내부 서로 다른 형식과 크기의 기록물들이 한데 모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미술 전시품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오브제들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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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평화역사관 내부 색이 바래고 먼지가 쌓인 기록들. 이 기록들이 놓인 취약한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기억 공간


오후에는 미리 예약해둔 도슨트를 듣기 위해 매향리평화기념관으로 향했다. 전만규 관장도 우리와 함께 했다.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 옆에는 바다와 갯벌, 낮고 평평한 생태공원이 이어졌고, 그 사이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온해 보이는 그 풍경을 보며 전만규 관장이 들려준 말이 귀에 맴돌았다. 갯벌에서 수거한 불발탄, 포탄 소리에 잠에서 깨 울던 아이들, 조업이 통제된 바다에서 생계를 이어 가야 했던 주민들의 이야기. 그의 말은 풍경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시간이 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자료만으로는 매향리에서 벌어진 일이 주민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전 매향리평화역사관을 지나온 뒤여서인지, 전시실 안의 자료들이 유리장 속 사물이나 벽면의 정보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지도 위의 사격장과 비행 경로는 창밖의 바다와 이어졌고, 포탄 조각은 갯벌과 그 주변에서 살아야 했던 주민들의 시간으로 연결되었다. 기념관의 전시가 사건의 규모와 경과를 정돈하여 보여주는 동안, 그 사건 속에서 매일 폭격 소리를 듣고 위험을 감지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은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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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니 전투기 사격장 시간표와 매향리 평화기념관 내부에서 바라본 농섬전만규 관장이 쿠니 전투기 사격장 훈련 시간표와 비행 경로를 설명하고 있다. 하늘을 가로 지르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과거에는 더 큰 굉음과 더 많은 전투기가 이 하늘을 오갔을까. 



그 빈틈은 전만규 관장이 이어서 설명해 주었다. 그는 포탄이 어디에서 수거되었는지, 그 주변에 누가 살았는지, 갯벌과 바다에서 어떤 생업이 이루어졌는지를 덧붙어 이야기했다. 나는 어느새 전만규 관장 옆에서 그가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따라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기념관 전시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사건의 경위, 자료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 주민들이 겪은 피해와 투쟁의 과정 등 전시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되거나 생략된 이야기들이 그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덧붙여졌다. 가령 훈련 횟수에 대한 문서를 보며 주민들이 매일 어떤 굉음과 위험 속에서 살았는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그 기록을 확보하려 했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은 전시실 안에 놓인 다양한 전시물을 다시 '읽히도록' 만들었다.

전시 패널이 충분히 말하지 못한 사건의 경위, 여러 자료의 배경, 주민들의 피해와 투쟁 과정은 전만규 관장 한 사람의 기억을 통해서야 비로소 연결됐다. 나는 기념관의 전시를 보고 있다기보다는 전시가 말하지 못한 것을 그의 말로 듣고 있다는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그 순간 기념관의 깔끔하고 단정한 기록이 불완전하게 보였다. 기념관은 무엇을 전면에 놓고, 무엇을 배경으로 밀어냈을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삶을 다시 불러내는 말에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고, 어떤 기억이 아직 말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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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매향리평화역사관 내부와 (오) 매향리평화기념관 내부 역사관은 포탄, 사진, 문서 등 현장 기록을 축적해 놓는 방식으로, 기념관은 연표와 패널을 통해 사건의 경과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의 말 속에 남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전만규 관장이 관람객을 여러 장소로 안내하며 매향리의 시간을 기록해 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흩어지거나 사라질 수 있었던 유물과 기억은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졌으며, 그가 없었다면 드러나지 못했을 자료와 사건도 적지 않다. 그는 기념관의 전시가 압축하거나 비워 둔 주민들의 삶을 다시 열어 보이며, 그들이 살아낸 시간과 사건을 연결한다. 그가 온 생을 바쳐 만든 매향리평화역사관은 매향리의 기억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사회적으로 관심받도록 한 중요한 매개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수집하고 보존해 온 기록은 주민 전체의 기억과 의견을 어디까지 대표할 수 있을까. 전만규 관장이 모은 자료에는 폭격과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지만, 무엇을 남기고 어떤 사건을 중심에 놓으며 어떤 순서로 설명할지는 그의 경험과 판단을 통과한다. 때문에 그의 아카이브는 '매향리 주민 전체의 기억' 그 자체라기보다, 주민 한 사람이 자신의 삶과 투쟁의 자리에서 수집하고 해석해 온 매향리의 기억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전만규 관장의 말에는 수많은 주민이 등장한다. 포탄의 출처를 설명하며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조업을 이어가야 했던 어민들, 굉음 속에서 불안을 견뎌야 했던 여성들, 투쟁에 함께했던 이들의 시간을 불러낸다. 그의 말은 기념관에서의 연표와 통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름과 경험이 한 사람의 말을 통해 언급되는 것과 각자가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말하며 기억을 공개하고 해석에 참여하는 일은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전만규 관장의 관점에서 이야기된 주민들의 기억일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말을 전하고, 그 기억을 공적인 언어로 전달해 왔다. 그것들은 기념관의 전시에서 간단하게 보여주는 개개인의 삶을 한 발짝 더 깊이 들여다보지만, 동시에 그 말 속의 주민들은 여전히 전만규 관장의 기억을 통해서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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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향리평화기념관 내부 기념관에 전시된 주민들의 인터뷰 영상. 이 영상에 담기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카이브는 무엇을 수집하고 보존할지, 무엇을 먼저 꺼내 보일지, 어떤 사건과 사람을 연결할지 결정하는 선택의 과정이다. 그 선택은 어떤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고, 다른 기억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전만규 관장의 말 역시 다양한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기록인 동시에, 목소리들을 그만의 매향리 서사로 배열한다.

나는 전만규 관장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인 얼굴을 얻은, 그의 말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폭격에 의해 바다에 나가지 못했던 어민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투쟁에서 물러난 사람들, 소송을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여러 이유로 그 때의 일을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매향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지금 누구의 목소리로 드러나는가. 누군가의 기억에서 살아나는 일과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 



도착하지 않은 기억들, 침묵조차 기다리는 아카이브 


주민들을 찾아가 과거의 일을 말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매향리는 오래전에 끝난 사건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말을 꺼내기 어려운 시간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생계와 가족을 돌보는 일이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일보다 시급했을 수 있다. 때문에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선택 역시 매향리의 기억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다.

전만규 관장이 지켜 낸 기록과 말들 사이에 아직 만나지 못한 삶들이 있다. 그 삶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어떤 언어로 남아 있을까. 그 자리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말을 보탤 수 있는 곳일 수도 있고, 익명으로 흔적만 남길 수 있는 곳일 수도 있다. 이미 있는 기록을 다른 기억으로 읽거나, 그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말이 머물 수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말하지 않기로 한 침묵 역시 그 사람이 매향리의 시간을 살아낸 방식일 수 있다.

나는 전만규 관장의 말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만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보태고, 다른 누군가는 이미 남겨진 기록에 다른 설명을 덧붙여주기를,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끝내 말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는 자리를 상상한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평화와 관련한 기억을 찾아 만나고, 소통하고, 나누는 평화활동 단체입니다. 오는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아카이브기록전 <듣는 사이: 참전군인과 만난 시민들, 5년의 기록>을 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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