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눈과 발 사이]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 후 21년, '완성된 평화'와 '기념' 사이에서 - '평화역사관'에 있지만, '평화기념관'에 없는 것

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규모 있게 혹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당연한 듯 기억과 기념의 공간이 있다. 이곳을 걸으며 이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하는지 마주한다. 함께한 이들은 참전군인 구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때로는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동행했다.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올해로 5년째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고 있다. 평화 프로젝트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는 전쟁을 겪은 이들과 소통하며 갈등을 마주하고, 복잡한 가운데 연루됨을 알아차리며 평화를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연재 제목이자 답사단 이름으로 붙인 ‘눈과 발 사이’는 직립한 인간이 갖는 한계와 오류를 직시하고, 관점(觀點)을 달리하여 낯설게 보자는 뜻이다. 뜨거운 날 수첩 하나 손에 쥐고 발로 걸으며 깨진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글에 비끄러매었다. 유랑하며 기억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연재를 시작한다.




매향리 미군 폭격장은 '아시아 지역 최적의 공군 폭격장'이라 불리며 미 공군 전투기들이 폭격 훈련을 했던 곳이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쿠니 사격장'으로 기억한다. 매향리 주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폭격장은 2005년 폐쇄되었다. 폭격장이 폐쇄된 지 어느덧 21년. 그 사이 매향리에는 평화를 기억하는 두 공간이 생겼다. 하나는 '매향리평화역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매향리평화기념관'이다. 이름도 비슷한 두 공간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궁금한 마음으로 그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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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역사관 내부 공간 미군 폭격장과 매향리 투쟁, 주민들의 삶에 관해 설명해주는 전만규 관장 




매향리 투쟁의 역사


첫 방문지로 '매향리평화역사관'을 갔다. 평화역사관을 운영하는 전만규 관장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는 미군 폭격장 폐쇄 운동을 이끌며 투쟁에 앞장서 왔다. 폭격장이 폐쇄된 후에는 평화마을 건립에 힘쓰고 있다. 공간을 둘러보기 전, 미군 폭격장과 매향리 투쟁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미군이 매향리에서 폭격을 시작한 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이었다. 이후 미군 폭격장이 설치되고 폭격 훈련이 시작되면서 매향리는 사실상 전쟁터가 되었다. 전투기는 낮밤 가리지 않고 폭격 훈련을 했고, 오폭이나 불발탄 폭발로 인한 사망, 부상, 재산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전투기가 뿜어내는 굉음은 사람이 견딜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극심한 소음은 청력 손실과 같은 신체적 고통을 일으켰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면에 시달렸고, 폭력, 자살, 임신부의 유산 등이 잇따랐다.

고통 속에 살던 주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한 건 1988년부터였다. 주민들은 폭격장을 점거하고 항의 시위를 하는 등 폭격장 폐쇄 운동을 시작했다. 국가는 공권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가로막고 탄압했다. 투쟁의 동력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주민들은 계속 싸웠다.

2000년 5월 미군 전투기가 폭탄 6발을 매향리 앞바다에 떨어뜨려 마을 전체가 피해를 보았다.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매향리 폭격장 문제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2004년 주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겼다. 미군과 한국 정부는 폭격장 폐쇄를 결정했다. 54년 동안 운영된 미군 폭격장은 2005년 8월 폐쇄됐다.



매향리평화역사관에서 만난 폭탄의 변신과 쓸모

전만규 관장의 설명이 끝난 후 전시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건물 중앙에는 편지, 사진, 소식지, 공문서, 신문기사, 비디오테이프 등 매향리 투쟁에 관한 자료가 촘촘히 진열되어 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개된 폭격장 폐쇄 운동을 여러 방면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었다. 매향리 투쟁을 '평화'의 역사로 남기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평화역사관 한쪽에는 과거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과 주민들의 손때 묻은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생활사박물관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투쟁 관련 자료들이 주민들의 피해나 저항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일상을 담은 사진과 생활용품은 피해와 저항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여러 단면을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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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역사관 전시 매향리 주민들이 수거한 폭탄과 탄피가 쌓여 있다. 조명탄 탄피와 낙하산을 재활용해서 만든 생활용품도 전시되어 있다.



평화역사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벌겋게 녹슨 폭탄과 탄피였다. 폭격의 흔적은 역사관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손가락만 한 탄피와 주먹만 한 폭탄이 모래알처럼 뿌려져 있었다. 건물 안쪽에는 성인 키만 한 폭탄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앞마당에는 매화를 형상화한 440여 톤의 폭탄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순간 전쟁터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향리에 폭탄을 떨어뜨린 건 미군이었지만, 수거한 건 주민들이었다. 한때 주민들은 탄피를 주워 돈을 벌기도 했다. 탄피 재질인 구리가 비싸게 팔렸기 때문이다. 탄피 재질이 값싼 철로 바뀌고부터 수집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졌다. 폭격장이 폐쇄된 후에는 중금속으로 오염된 섬과 갯벌이 문제였다. 주민들은 장비를 동원해 섬과 갯벌에 박힌 폭탄을 수거했다. 평화역사관을 장식하고 있는 폭탄과 탄피는 그렇게 모인 것들이었다.

크고 작은 탄피는 쓸모가 있었다. 양쪽에 매달아 역기를 만들고, 양동이나 쌀통으로도 썼다. 전시장의 포탄 더미는 평화를 염원하는 거대한 상징물이자 예술 작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곳에 폭격장이 있었음을 잊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것은 54년 동안 매향리 주민들이 겪은 고통의 증거물이기도 했다.



매향리 평화기념관에는 왜 탄피 하나 없을까


평화역사관 답사를 마치고 평화기념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평화기념관은 바로 옆이니 같이 이동할까요?" 전만규 관장은 기다렸다는 듯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평화역사관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평화역사관과 평화기념관은 맞붙어 있었다.

평화기념관 야외 부지에는 전투기 두 대(F-4E, F-5E)가 전시되어 있었다. 거대한 무기들이 전시된 용산 전쟁기념관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평화기념관은 옛 미군기지로 쓰인 건물들과 새로 지은 본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시 해설을 들으며 옛 미군기지부터 둘러보았다. 공간 일부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일부는 전시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건물 벽면에 부착된 '주한미군 시선에서 본 훈련장' 지도가 눈에 띄었다. 거꾸로 뒤집힌 한반도 지도에는 26개의 미군 훈련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8곳은 지금도 '사용 중'이었다. 미군들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사격과 폭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매향리처럼 나머지 훈련장도 없어져야 한다'는 뜻일까. 혹은 '매향리는 문제가 있었지만, 나머지 훈련장은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는 뜻일까.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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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관 미군기지 전시 '주한미군 시선에서 본 훈련장' 지도. 현재 8곳이 '사용 중'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과거 기지 건물에 조성된 전시실은 주민들의 피해와 투쟁, 매향리의 변화 등 매향리 주민들의 서사를 담고 있었다. 공간이 좁은 탓인지 전시 자료는 많지 않았다. 전시실 한쪽에 있는 녹슨 폭탄 더미가 눈길을 끌었다. 겉으로 보기엔 실물 같았지만 모형이었다. 평화기념관에는 실제 폭탄과 탄피가 하나도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평화기념관에 폭탄과 탄피가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도 기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섬과 갯벌에 방치된 폭탄과 탄피를 수거했다. 그들이 수거한 건 미군 폭격장 54년의 고통이 서려 있는 마을의 유물이자 자산이었다. 평화기념관 측은 그것을 무상으로 기증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응한 이는 없었다. 국가가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 여전히 남아 있는 폭격 후유증, 위험을 무릅쓰며 수행한 노동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평화기념관은 폭탄 하나 기증받지 못한 채 전시를 열어야 했다. 평화기념관 전시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였지만 내용의 공백을 메우지는 못했다.

전시가 누락하고 있는 것들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미군과 한국 정부의 대응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었다. 폭격장 폐쇄 운동을 벌이던 시기에도 미군은 폭격장 운영을 정당화하며 폭격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 점거 농성 등 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군들은 마을 주민의 논밭에 모래와 자갈을 들이부으며 보복을 하기도 했다.

언급되지 않은 건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폭격장 폐쇄를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낙인 찍거나, 주민들을 돈이나 보상으로 회유하는 등 한국 정부가 주민들을 억압하고 포섭한 행위에 관해 언급한 자료는 없었다. 전시가 다루는 건 오로지 매향리 투쟁의 '명예로운 승리'뿐이었다.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한 국가의 흔적은 지우고 매향리 주민들의 승리 서사만 부각한 탓에 전시는 단조롭고 납작하게 보였다.

평화기념관 전시는 '폭격장이 폐쇄되고 매향리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주민들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군은 매향리를 떠났지만 폭격 훈련은 여전히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매향리를 위험으로 내몬 국가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강조되는 '평화'는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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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평화기념관을 둘러보는 탐방단 평화기념관 전시는 ‘폭격장이 폐쇄되고 매향리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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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관 본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평화기념관 본관 전경




누구를 위한 '기념'인가

매향리를 떠나는 길, 넓은 들판 사이로 우뚝 선 평화기념관 건물이 보였다. 화성시가 약 180억 원을 들여 지은 건물이다. 유명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이 건물은 매향리 주민들의 원성을 듣고 있었다. 건축가의 명성에 기대어 설계를 맡긴 화성시도 비판받고 있었다. 시는 주민들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주민들의 역사가 담긴 공간을 조성하는데 정작 당사자들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은 걸까.

평화기념관은 매향리의 평화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정작 매향리 주민들은 평화기념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럼 평화가 왔다는 말은 허풍 또는 거짓말이 아닐까. 평화기념관이 매향리의 평화를 '이미 끝난 일'로 매듭 짓는다면, 평화역사관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에 대해 묻는다. 정말 매향리에 평화가 온 것일까. 폭격장이 폐쇄된 지 21년이 지났음에도, 주민들은 여전히 폭격이 남긴 후유증과 싸우고 있다. 평화역사관과 평화기념관이 맞붙어 있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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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 후 21년, '완성된 평화'와 '기념' 사이에서 - '평화역사관'에 있지만, '평화기념관'에 없는 것 (2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