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사는 김연수입니다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대표
이 글은 2025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 공유회 발표글입니다。
참전군인 김연수의 요청으로 이 글에서 ‘베트남’은 ‘월남’, ‘베트남전쟁’은 ‘월남전’으로 씁니다。
부산에 사는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나러 간다.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려고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의 집은 금정구 구서동으로 지하철 1호선 구서역에서 가까웠다. 지하철역을 나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는 길에 과일가게가 보여 거봉을 한 상자 샀다. 몇 차례 약속 전화를 하며 그의 아내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활동도 거의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번 뵙자는 말을 건넨 지도 한참이라 너무 늦게 만남을 청한 것이 미안했다.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하더라도 서둘러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걱정과 달리 그는 만나자는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제야 부산으로 가지만,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은 때로부터 그의 이름은 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만남을 미룬 것이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월남전과 민간인학살의 키워드는 엉킨 실타래 같아서 어느 쪽부터 잡아 풀어야 할지 내 안에서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흔들리며 바라보겠다고 되뇌곤 하지만, 머뭇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던 듯하다. 아마도 그 한쪽 끈을 잡아 푸는 일을 미룰 수 있는 만큼 저만치 미뤄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루는 마음도 시효가 있고, 광활한 오지랖은 언젠가는 미루는 일들에 닿게 마련이다. 그는 이 월남전과 민간인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참전군인이었다. 각자 옹호하는 주장과 입장은 다르더라도 관심과 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참전군인을 만났고, 그때마다 마음을 살피며 경험과 생각을 물었던 것과 달리 그에게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직진할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와의 첫 만남은 8년 전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참전군인 김연수는 ‘월남전 민간인학살’ 관련 활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따지고 묻고 항의하는 참전군인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한베평화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에 ‘월남 피에타상(베트남 피에타상)’을 세울 무렵, 그는 이 활동에 항의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해 단체의 사업계획 등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와 관련해 캠페인과 시민평화법정 준비가 한창인 2018년을 전후로 하여 여러 차례 그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부산 서울을 오가며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는 변호사를 방문해 자신의 주장이 담긴 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마무리되고 약식 판결문을 낸 이후로도 판결문 전문이 언제쯤 완성되는지 확인하고 궁금해하는 유일한 참전군인이었다. (시민평화법정은 약식 판결문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부산에 김연수입니다.” 사무실로 걸려 오는 그의 전화는 늘 활동가들을 긴장시켰고, 그와의 통화는 1시간 남짓 길게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보통은 조용한 대화보다는 각자의 주장 속에 목소리 높여 언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그는 전화 통화로 자료 하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요구한 자료는 ‘월남전에서의 한국 군대의 죄악(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자료였다. 이것은 1999년 한겨레21 제256호에 당시 구수정 통신원이 쓴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아래 박스글 참조) 이 기사와 후속 기사들은 ‘미안해요 월남(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시민들의 자발적 캠페인을 불러왔고, 본격적인 ‘월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관한 시민사회의 진실 규명 작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구수정 통신원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정치국)에서 생산된 이 자료를 중심으로 중부 5개 성, 9개 현, 13개 사 피해 마을을 돌아보며 100여 명의 증언을 취재한다. 그리고 이 자료와 피해 마을에 대한 취재, 미국 ‘민간인보고서’(퀘이커 교도인 존슨 부부가 쓴 보고서)를 종합해 ‘제주인권학술회의 2000’에서 월남전 시기 한국군 민간인학살 통계를 발표한다. 월남전 당시의 5개 성에서 80여 건의 민간인학살이 이루어졌고 모두 9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밝힌 이 자료는 지금까지 월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통계의 기원이 되고 있다. 한국 정부나 기관의 공식적인 통계가 없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전과 관련된 민간인학살 통계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정치국) 자료에서 출발하였으며, 참전군인 김연수가 요구한 자료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시작점에 있는 것이었다.
| * 기사에서 필자는 이 자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필자는 2년 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월남전에서의 한국 군대의 죄악)’이라는 자료의 일부를 어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자료를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일방적인 보고서, 그러나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로 책상 서랍 안에 묵혀두고 있었다.” 이런 전제 아래 기사에서는 보고서에 묘사된 한국군 민간인학살의 잔인한 장면을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 문건은 문서 번호 없는 보고서 일부에 대한 필사본이고, 한국군 민간인학살과 통계뿐만 아니라 미국을 지원하는 ‘남조선 용병’(한국군)에 대한 동향도 포함하고 있다. 인용하는 내용들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군 기관지인 Q.Đ.N.D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인민군대 신문)이다. 당시 필자가 밝혔듯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일방적인 보고서’라는 점에서 이 자료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을 비롯해 사료 비판과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
당시 그의 자료 요구에 직접 방문해 열람만 가능하다는 답을 주게 되었고, 그는 자료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 옥수동에 있는 한베평화재단까지 기꺼이 찾아왔다. 동료 참전군인 한 명과 함께였다. 전화 통화로 만나다가 얼굴을 마주하면 혹시나 더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되던 첫 만남으로 기억한다. 우려와 달리 그는 사무실 한편에서 22쪽의 베트남어 필사본과 24쪽의 한국어 번역본으로 된 자료를 차분히 살펴보고 떠났다. 그 만남은 소중한 인연을 남겼다. 그때 함께 온 분이 이후로 꾸준히 소식을 주고받게 된 참전군인 최홍희다. 그는 한베평화재단과 아카이브평화기억을 후원하고,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 고마운 참전군인이다. 그의 이야기는 책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아카이브평화기억 기획, 알록출판사, 2025년 7월)에 실려있다.
다시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난 곳은 서울중앙지법 동관 559호 법정 앞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10월 12일은 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1심 첫 변론이 열리는 날이었다.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높았고 참전군인 사이에서도 실제 재판으로 이어지는 민간인학살 논쟁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좁은 재판정은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으로 하나씩 의자를 건너뛰어 앉느라 많은 인원을 수용하지 못했다. 몇 자리 안 되는 방청권을 나누고 보니 그에게 차례가 가지 않았다. 재판 방청을 위해 부산에서 멀리 올라왔을 걸음을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에게 방청권을 양보했다. 그는 이번에 나를 만나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첫 변론일 이후로 나는 그에게 1심 판결문과 항소심 판결문이 나오면 그때그때 메일로 자료를 보내주었는데, 소식과 동향을 챙기는 그가 항상 나에게 연락해 먼저 자료를 요청했다.

참전군인 김연수
거실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가 가득 쌓여 있는 방으로 갔다. 한참 만에 돌아오더니 40쪽 분량의 탄원서 한 부를 나에게 건넸다.
사건 2025다211052
피고인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탄원인 사)파월전사연구소 대표 김연수
피고인과의 관계: 사)파월전사연구소 김연수가 戰史로 소명코자 함.
2025년 3월 20일, 참전군인 김연수가 대표로 있는 사)파월전사연구소는 퐁니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항소심 당시 보조참가인 신청(2023.5.23)을 했으나 기각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상고심에는 탄원서와 함께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피해를 입을 경우 1차 재판권이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진 월남공화국에 있다는 당시 국무회의 내용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자료를 함께 제출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월남, 미국 3자 간 협정서에 따라 한국군에 의해 피해가 일어나더라도 주월한국군사령부(소청심사)에서 주월미군이 보상금액을 부담하도록 하는 소청심사제도에 의거 한국 측은 보상할 의무가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소청심사는 이 소송 피고 측의 주장이자 법리적 쟁점 중 하나인 청구권 소멸에 대한 사항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권리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며 국가 간 혹은 복수의 국가가 속한 기관 간의 합의만으로 월남 민간인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거나 그 행사를 금지⋅배제당할 순 없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월청구권협정서에도 개인(국민)에 대한 기재 자체가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당시 원칙적 방법으로 소청심사 제도가 우선 해결 방안으로 운영되었다 하더라도 월남이 월맹에 합병되면서 소청심사 업무가 폐쇄되고 이후 소청심사 절차에 의한 가능성이 사라짐에 따라 그 합의는 효력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탄원서를 살펴보니 27쪽부터 39쪽까지 그가 인용한 각종 월남전사와 약정서, 참고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 자료들을 읽고 정리하고 탄원서를 쓰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내는 탄원서를 보며 생계는 제쳐두고 밤샘하며 월남전사 연구한다고 건강까지 잃게 되었다며 남편을 타박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곁을 지키고 함께해주는 아내였다. 탄원서는 참전군인 김연수의 활동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글 말미에 탄원서 일부를 게재한다.) 그는 당시 파월선발대장이었던 이훈섭 장군의 책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읽으며 본격적으로 월남전사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을 나에게 한 권 선물로 주었다. 2012년에는 월남전사 자료 청구와 연구를 위해 국방부에 사)파월전사연구소를 등록했다. 그는 왜 이렇게 월남전사 연구에 진심일까? 나는 생각나는대로 투박하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김연수
“나는… 뭐냐 하면 내가 왜 월남전에 갔는지? 우리가 뭘 얻어 왔는지? 이제 이런 게 자꾸 궁금해지니까… 또 전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지.”
그는 경남 창녕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2사단 17연대에 배치받아 군복무 중 월남 차출 명령을 받았다. 원래는 파견가기로 한 인원(전우)이 있었는데 대신하여 1967년 갑작스레 월남전에 가게 되었다. 배치받은 곳은 주월한국군사령부(맹호부대와 주특기는 비공개)였고, 주월사 경비 업무를 하게 되었다. 13개월의 파견 기간을 마치고 1969년에 귀국해 곧바로 전역했다며 월남전 참전 경험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그는 몸이 아픈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아내 말을 듣고 보니 퐁니사건 때문에 서울을 다녀가는 시기에도 건강 문제로 어려움이 컸으리라 생각되었다. 이미 49세에 심장 이상이 발견되었고, 98년에 관상동맥 우회술, 2024년에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런 중에도 월남전참전자회 중앙회에서 민간인학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에게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에 방안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김연수
“민간인학살을 했다 하더라도 소청심사제도가 있었는데. 그분(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이 그런 절차를 안 밟고 이제 와서 요구하면은 과거에 그 법을 소급해서 줄 수도 없잖아요. 이런 맹랑한 사건이 돼 있으니까 그거는 서로 양보할 건 십분 양보하고 그래서 뭔가 그 지역 발전이라든지 안 그러면 이걸 압축을 시켜서 정말로 이제 뭔가 우리 한국군이 피해를 입혔다 이런 것이 확인되면 그 사람들한테 한정해서 보상을 하는 거는 이해가 가지만 지금 현재 막무가내 풀어놔 가지고 한 사람이 만약에 승소하면 그다음에 계속 소송이 들어오면은 이거는 끝이 없고. 1만 명 이상 들어올 거로 돼 있다고. 이리되면은 이거는 우리 한국 정부에서도 풀기 힘든 그런 문제라고.”
그는 소청심사제도로 인해 한국은 피해보상의 의무가 없다는 것, 법적으로 흑백을 가리는 것보다 피해에 대한 국가적 지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1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해자의 줄소송이 이어질 것에 대한 부담을 우려했다. 그런 주장은 그가 민간인학살 위원장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석미화
“(민간인학살 위원장이니까) 이런 입장을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중앙회)에 다른 분들하고 의견을 나누시면 그분들도 동의를 하시나요?”
김연수
“그런 사람들과 얘기해 봐야 안 돼. 안 되지.”
석미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서도 그렇고, 아예 민간인학살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연수
“그 사람들은 이제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려고 그러지… 참전군인들은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그냥 뭐 손드는 거… 이것만 했지. 뭐냐 하면 민간인학살을 안 했다 뭐 여러 가지 그런 것 많이 냈지.”
석미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중앙회) 의견은 무조건 반대와 부정이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이 문제는 참전군인·단체의 반대 목소리 속에서 사회적으로 관심받게 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참전자 단체는 공법단체로 조직적으로 모여 있기도 한데. 위 단체의 민간인학살 위원장을 하셨다고 하여 말씀을 드려보는 거예요. 참전단체 안에서 이 논의를 제대로 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김연수
“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석미화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진실 규명 법안을 20대 21대 때 발의를 했어요. 이번 22대 국회는 그 법안에 참전군인 인권 침해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포함시켰어요. 그러니까 참전군인(단체)은 참전수당 문제 등 본인의 명예, 국가유공자로서의 지위 획득에 대한 것 등에 관심이 크고 실질적으로 이 전쟁이 남긴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갖지 않더라는 거죠. 그게 참 안타깝고요.”
김연수
“그런 거는 월남전사를 연구해 가지고 축적된 자료에 의해서 같이 병행해야 되는데. 지금 현재 우리가 월남전에서 뭘 했는지 진실을 밝혀야 되는데… 민간인학살에 대한 것은 일부만 가지고 흔드니까… 한국 정부에서도 잘 이해가 안 가고. 또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해도 국회 산 넘기 어려워요.”

그와 나는 주제 하나에 서로의 입장을 계속 이야기해 나갔다. 내가 참전군인의 인권 침해와 월남전사에 대한 정보공개를 이야기하니 그는 본인이 갖고 있는 146명의 자살자 명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국가기록원에는 30년이 넘었음에도 월남전사와 관련해 비공개로 된 자료가 있다고 했다. 참전군인 김연수는 마지막으로 국가보훈처에 가칭 사)월남전사연구소를 등록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나에게는 자신이 운영하던 사)파월전사연구소를 가져가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이 전쟁에 대해 연구하고 활동하는 노고를 알아봐 주는 고마운 말이었다.
그렇게 참전군인 김연수와 월남전 민간인학살이라는 주제를 사이에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 사이에서 이 주제에 대한 참전단체의 입장이 왜 사회적으로 강하게 표출되는지 짐작해 본다. 참전군인·단체에게는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참전수당, 보훈연금, 가족 승계와 국립묘지 안장, 고엽제 등급과 같은 사안이 더 중요한 관심사다. 개별자로서의 참전군인에게 민간인학살 주제는 다양한 색깔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무관심한 경우도 많다. 우리는 이 주제가 모든 참전군인에게 첨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쩌다 관심이 큰 참전군인을 만나더라도 서로의 주장과 주장이 부딪혀 대화는 미궁에 빠지기 일쑤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반응과 목소리를 살피기 전에 진실 규명과 정의라는 당위가 소통을 가로막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참전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주제는 그들을 성찰하도록 만들거나 진실을 밀어붙이는 따위의 일만도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이어야 할까? 풀어야 할 매듭의 실마리를 찾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운동까지 연루되어 온 시간 사이에서 실타래는 단지 한 가닥이 아니므로.
[참고]
* 참전군인 김연수가 응우옌티탄 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일부
사건 2025다211052
피고인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탄원인 사)파월전사연구소 대표 김연수
피고인과의 관계: 사)파월전사연구소 김연수가 戰史로 소명코자 함.
2. 그러나 한국군을 월남전에 파병하는 목적은 월남전쟁을 지원하는 것인데 주월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또는 비전투 간에 있어 월남 국민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이 보상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월남 국민의 원성을 듣게 되고 우리의 파병 목적에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주월미군측 대표와 월남군측 대표에게 강조하였다. 한국은 재정 형편상 그러한 보상을 담당할 능력이 없어서 예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현지에서 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진지하게 주월 미군 측 대표와 월남군 측 대표에게 설명하였다.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한․월간, 한․미간 업무협의를 마친 한국군 연락장교단이 귀국할 무렵, 미월 양측이 모두 「한국측에서는 피해보상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비전투시에 월남 민간인에 끼친 손해배상은 한․미간 약정서(추가사항)에 따라 주월 미군 측이 별도로 재원을 마련해서 지원하도록 미월 양측과 합의가 되었으므로 월남전쟁 시기 주월한국군 소청사무소에서 월남 민간인이 입은 피해 금액을 조사하고, 주월 미군이 부담하여 신청된 사건별로 피해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6. 대한민국정부와 월남공화국정부간의 군대구성원에 의한 공무수행중의 인명피해 및 정부재산 손실에 대한 청구권협정의 체결을 위한 국무회의 상정안 제안설명서
외무부 조약과 1966. 12. 29일
국군의 월남 파병으로 인하여 파생될수 있는 제반 청구권문제는
가. 주월국군구성원의 공무수행중에 발생하는 인명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정부재산에 대한 손해나 상실에 대한 청구권문제 그리고
나. 주월국군의 비공무수행중의 제삼자에 대한 피해 즉 주월군대 구성원의 직무외의 불법행위로 인한 민사상의 손해배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국방부 주관으로 현지 사령관의 합의로서 처리된바, 즉 비전투 소청사건의 처리에 관한 1966. 6. 20일자 한․미보충실무약정서로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약술하면 주월한국군사령관 밑에 한국군 법무장교로 구성된 소청사무소를 두고 제3자 즉 월남 민간인의 소청사건을 심리하고 청구액을 결정하여 해결하는바 이 청구권 해결 재원은 전적으로 주월미군사령부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자의 경우 즉 정부 및 군대 재산의 손해나 상실에 대한 정부간의 청구권과 군대 구성원의 공무수행 중에 발생한 상해나 사망에 대한 정부간의 청구권 해결 문제가 현안의 문제로 되어 있었던바, 이것을 한․월양국정부간의 협정체결의 대상으로 판단되어 관계부처와 협의하여 우리 측 안을 작성하고 월남 측에 제시하여 월남정부와 완전한 합의를 본 바 있습니다.
여기에 제안된 동 협정을 정식 체결함으로써 청구권 문제에 관한 완전한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상의 지점을 참작하시어 심의 의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산에 사는 김연수입니다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대표
이 글은 2025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 공유회 발표글입니다。
참전군인 김연수의 요청으로 이 글에서 ‘베트남’은 ‘월남’, ‘베트남전쟁’은 ‘월남전’으로 씁니다。
부산에 사는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나러 간다.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려고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의 집은 금정구 구서동으로 지하철 1호선 구서역에서 가까웠다. 지하철역을 나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는 길에 과일가게가 보여 거봉을 한 상자 샀다. 몇 차례 약속 전화를 하며 그의 아내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활동도 거의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번 뵙자는 말을 건넨 지도 한참이라 너무 늦게 만남을 청한 것이 미안했다.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하더라도 서둘러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걱정과 달리 그는 만나자는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제야 부산으로 가지만,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은 때로부터 그의 이름은 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만남을 미룬 것이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월남전과 민간인학살의 키워드는 엉킨 실타래 같아서 어느 쪽부터 잡아 풀어야 할지 내 안에서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흔들리며 바라보겠다고 되뇌곤 하지만, 머뭇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던 듯하다. 아마도 그 한쪽 끈을 잡아 푸는 일을 미룰 수 있는 만큼 저만치 미뤄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루는 마음도 시효가 있고, 광활한 오지랖은 언젠가는 미루는 일들에 닿게 마련이다. 그는 이 월남전과 민간인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참전군인이었다. 각자 옹호하는 주장과 입장은 다르더라도 관심과 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참전군인을 만났고, 그때마다 마음을 살피며 경험과 생각을 물었던 것과 달리 그에게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직진할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와의 첫 만남은 8년 전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참전군인 김연수는 ‘월남전 민간인학살’ 관련 활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따지고 묻고 항의하는 참전군인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한베평화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에 ‘월남 피에타상(베트남 피에타상)’을 세울 무렵, 그는 이 활동에 항의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해 단체의 사업계획 등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와 관련해 캠페인과 시민평화법정 준비가 한창인 2018년을 전후로 하여 여러 차례 그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부산 서울을 오가며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는 변호사를 방문해 자신의 주장이 담긴 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마무리되고 약식 판결문을 낸 이후로도 판결문 전문이 언제쯤 완성되는지 확인하고 궁금해하는 유일한 참전군인이었다. (시민평화법정은 약식 판결문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부산에 김연수입니다.” 사무실로 걸려 오는 그의 전화는 늘 활동가들을 긴장시켰고, 그와의 통화는 1시간 남짓 길게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보통은 조용한 대화보다는 각자의 주장 속에 목소리 높여 언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그는 전화 통화로 자료 하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요구한 자료는 ‘월남전에서의 한국 군대의 죄악(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자료였다. 이것은 1999년 한겨레21 제256호에 당시 구수정 통신원이 쓴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아래 박스글 참조) 이 기사와 후속 기사들은 ‘미안해요 월남(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시민들의 자발적 캠페인을 불러왔고, 본격적인 ‘월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관한 시민사회의 진실 규명 작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구수정 통신원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정치국)에서 생산된 이 자료를 중심으로 중부 5개 성, 9개 현, 13개 사 피해 마을을 돌아보며 100여 명의 증언을 취재한다. 그리고 이 자료와 피해 마을에 대한 취재, 미국 ‘민간인보고서’(퀘이커 교도인 존슨 부부가 쓴 보고서)를 종합해 ‘제주인권학술회의 2000’에서 월남전 시기 한국군 민간인학살 통계를 발표한다. 월남전 당시의 5개 성에서 80여 건의 민간인학살이 이루어졌고 모두 9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밝힌 이 자료는 지금까지 월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통계의 기원이 되고 있다. 한국 정부나 기관의 공식적인 통계가 없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전과 관련된 민간인학살 통계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정치국) 자료에서 출발하였으며, 참전군인 김연수가 요구한 자료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시작점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자료 요구에 직접 방문해 열람만 가능하다는 답을 주게 되었고, 그는 자료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 옥수동에 있는 한베평화재단까지 기꺼이 찾아왔다. 동료 참전군인 한 명과 함께였다. 전화 통화로 만나다가 얼굴을 마주하면 혹시나 더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되던 첫 만남으로 기억한다. 우려와 달리 그는 사무실 한편에서 22쪽의 베트남어 필사본과 24쪽의 한국어 번역본으로 된 자료를 차분히 살펴보고 떠났다. 그 만남은 소중한 인연을 남겼다. 그때 함께 온 분이 이후로 꾸준히 소식을 주고받게 된 참전군인 최홍희다. 그는 한베평화재단과 아카이브평화기억을 후원하고,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 고마운 참전군인이다. 그의 이야기는 책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아카이브평화기억 기획, 알록출판사, 2025년 7월)에 실려있다.
다시 참전군인 김연수를 만난 곳은 서울중앙지법 동관 559호 법정 앞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10월 12일은 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1심 첫 변론이 열리는 날이었다.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높았고 참전군인 사이에서도 실제 재판으로 이어지는 민간인학살 논쟁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좁은 재판정은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으로 하나씩 의자를 건너뛰어 앉느라 많은 인원을 수용하지 못했다. 몇 자리 안 되는 방청권을 나누고 보니 그에게 차례가 가지 않았다. 재판 방청을 위해 부산에서 멀리 올라왔을 걸음을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에게 방청권을 양보했다. 그는 이번에 나를 만나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첫 변론일 이후로 나는 그에게 1심 판결문과 항소심 판결문이 나오면 그때그때 메일로 자료를 보내주었는데, 소식과 동향을 챙기는 그가 항상 나에게 연락해 먼저 자료를 요청했다.
참전군인 김연수
거실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가 가득 쌓여 있는 방으로 갔다. 한참 만에 돌아오더니 40쪽 분량의 탄원서 한 부를 나에게 건넸다.
사건 2025다211052
피고인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탄원인 사)파월전사연구소 대표 김연수
피고인과의 관계: 사)파월전사연구소 김연수가 戰史로 소명코자 함.
2025년 3월 20일, 참전군인 김연수가 대표로 있는 사)파월전사연구소는 퐁니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항소심 당시 보조참가인 신청(2023.5.23)을 했으나 기각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상고심에는 탄원서와 함께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피해를 입을 경우 1차 재판권이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진 월남공화국에 있다는 당시 국무회의 내용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자료를 함께 제출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월남, 미국 3자 간 협정서에 따라 한국군에 의해 피해가 일어나더라도 주월한국군사령부(소청심사)에서 주월미군이 보상금액을 부담하도록 하는 소청심사제도에 의거 한국 측은 보상할 의무가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소청심사는 이 소송 피고 측의 주장이자 법리적 쟁점 중 하나인 청구권 소멸에 대한 사항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권리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며 국가 간 혹은 복수의 국가가 속한 기관 간의 합의만으로 월남 민간인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거나 그 행사를 금지⋅배제당할 순 없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월청구권협정서에도 개인(국민)에 대한 기재 자체가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당시 원칙적 방법으로 소청심사 제도가 우선 해결 방안으로 운영되었다 하더라도 월남이 월맹에 합병되면서 소청심사 업무가 폐쇄되고 이후 소청심사 절차에 의한 가능성이 사라짐에 따라 그 합의는 효력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탄원서를 살펴보니 27쪽부터 39쪽까지 그가 인용한 각종 월남전사와 약정서, 참고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 자료들을 읽고 정리하고 탄원서를 쓰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내는 탄원서를 보며 생계는 제쳐두고 밤샘하며 월남전사 연구한다고 건강까지 잃게 되었다며 남편을 타박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곁을 지키고 함께해주는 아내였다. 탄원서는 참전군인 김연수의 활동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글 말미에 탄원서 일부를 게재한다.) 그는 당시 파월선발대장이었던 이훈섭 장군의 책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읽으며 본격적으로 월남전사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을 나에게 한 권 선물로 주었다. 2012년에는 월남전사 자료 청구와 연구를 위해 국방부에 사)파월전사연구소를 등록했다. 그는 왜 이렇게 월남전사 연구에 진심일까? 나는 생각나는대로 투박하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김연수
“나는… 뭐냐 하면 내가 왜 월남전에 갔는지? 우리가 뭘 얻어 왔는지? 이제 이런 게 자꾸 궁금해지니까… 또 전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지.”
그는 경남 창녕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2사단 17연대에 배치받아 군복무 중 월남 차출 명령을 받았다. 원래는 파견가기로 한 인원(전우)이 있었는데 대신하여 1967년 갑작스레 월남전에 가게 되었다. 배치받은 곳은 주월한국군사령부(맹호부대와 주특기는 비공개)였고, 주월사 경비 업무를 하게 되었다. 13개월의 파견 기간을 마치고 1969년에 귀국해 곧바로 전역했다며 월남전 참전 경험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그는 몸이 아픈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아내 말을 듣고 보니 퐁니사건 때문에 서울을 다녀가는 시기에도 건강 문제로 어려움이 컸으리라 생각되었다. 이미 49세에 심장 이상이 발견되었고, 98년에 관상동맥 우회술, 2024년에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런 중에도 월남전참전자회 중앙회에서 민간인학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에게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에 방안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김연수
“민간인학살을 했다 하더라도 소청심사제도가 있었는데. 그분(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이 그런 절차를 안 밟고 이제 와서 요구하면은 과거에 그 법을 소급해서 줄 수도 없잖아요. 이런 맹랑한 사건이 돼 있으니까 그거는 서로 양보할 건 십분 양보하고 그래서 뭔가 그 지역 발전이라든지 안 그러면 이걸 압축을 시켜서 정말로 이제 뭔가 우리 한국군이 피해를 입혔다 이런 것이 확인되면 그 사람들한테 한정해서 보상을 하는 거는 이해가 가지만 지금 현재 막무가내 풀어놔 가지고 한 사람이 만약에 승소하면 그다음에 계속 소송이 들어오면은 이거는 끝이 없고. 1만 명 이상 들어올 거로 돼 있다고. 이리되면은 이거는 우리 한국 정부에서도 풀기 힘든 그런 문제라고.”
그는 소청심사제도로 인해 한국은 피해보상의 의무가 없다는 것, 법적으로 흑백을 가리는 것보다 피해에 대한 국가적 지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1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해자의 줄소송이 이어질 것에 대한 부담을 우려했다. 그런 주장은 그가 민간인학살 위원장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석미화
“(민간인학살 위원장이니까) 이런 입장을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중앙회)에 다른 분들하고 의견을 나누시면 그분들도 동의를 하시나요?”
김연수
“그런 사람들과 얘기해 봐야 안 돼. 안 되지.”
석미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서도 그렇고, 아예 민간인학살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연수
“그 사람들은 이제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려고 그러지… 참전군인들은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그냥 뭐 손드는 거… 이것만 했지. 뭐냐 하면 민간인학살을 안 했다 뭐 여러 가지 그런 것 많이 냈지.”
석미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중앙회) 의견은 무조건 반대와 부정이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이 문제는 참전군인·단체의 반대 목소리 속에서 사회적으로 관심받게 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참전자 단체는 공법단체로 조직적으로 모여 있기도 한데. 위 단체의 민간인학살 위원장을 하셨다고 하여 말씀을 드려보는 거예요. 참전단체 안에서 이 논의를 제대로 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김연수
“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석미화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진실 규명 법안을 20대 21대 때 발의를 했어요. 이번 22대 국회는 그 법안에 참전군인 인권 침해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포함시켰어요. 그러니까 참전군인(단체)은 참전수당 문제 등 본인의 명예, 국가유공자로서의 지위 획득에 대한 것 등에 관심이 크고 실질적으로 이 전쟁이 남긴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갖지 않더라는 거죠. 그게 참 안타깝고요.”
김연수
“그런 거는 월남전사를 연구해 가지고 축적된 자료에 의해서 같이 병행해야 되는데. 지금 현재 우리가 월남전에서 뭘 했는지 진실을 밝혀야 되는데… 민간인학살에 대한 것은 일부만 가지고 흔드니까… 한국 정부에서도 잘 이해가 안 가고. 또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해도 국회 산 넘기 어려워요.”
그와 나는 주제 하나에 서로의 입장을 계속 이야기해 나갔다. 내가 참전군인의 인권 침해와 월남전사에 대한 정보공개를 이야기하니 그는 본인이 갖고 있는 146명의 자살자 명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국가기록원에는 30년이 넘었음에도 월남전사와 관련해 비공개로 된 자료가 있다고 했다. 참전군인 김연수는 마지막으로 국가보훈처에 가칭 사)월남전사연구소를 등록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나에게는 자신이 운영하던 사)파월전사연구소를 가져가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이 전쟁에 대해 연구하고 활동하는 노고를 알아봐 주는 고마운 말이었다.
그렇게 참전군인 김연수와 월남전 민간인학살이라는 주제를 사이에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 사이에서 이 주제에 대한 참전단체의 입장이 왜 사회적으로 강하게 표출되는지 짐작해 본다. 참전군인·단체에게는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참전수당, 보훈연금, 가족 승계와 국립묘지 안장, 고엽제 등급과 같은 사안이 더 중요한 관심사다. 개별자로서의 참전군인에게 민간인학살 주제는 다양한 색깔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무관심한 경우도 많다. 우리는 이 주제가 모든 참전군인에게 첨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쩌다 관심이 큰 참전군인을 만나더라도 서로의 주장과 주장이 부딪혀 대화는 미궁에 빠지기 일쑤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반응과 목소리를 살피기 전에 진실 규명과 정의라는 당위가 소통을 가로막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참전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주제는 그들을 성찰하도록 만들거나 진실을 밀어붙이는 따위의 일만도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이어야 할까? 풀어야 할 매듭의 실마리를 찾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운동까지 연루되어 온 시간 사이에서 실타래는 단지 한 가닥이 아니므로.
[참고]
* 참전군인 김연수가 응우옌티탄 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일부
사건 2025다211052
피고인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탄원인 사)파월전사연구소 대표 김연수
피고인과의 관계: 사)파월전사연구소 김연수가 戰史로 소명코자 함.
2. 그러나 한국군을 월남전에 파병하는 목적은 월남전쟁을 지원하는 것인데 주월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또는 비전투 간에 있어 월남 국민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이 보상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월남 국민의 원성을 듣게 되고 우리의 파병 목적에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주월미군측 대표와 월남군측 대표에게 강조하였다. 한국은 재정 형편상 그러한 보상을 담당할 능력이 없어서 예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현지에서 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진지하게 주월 미군 측 대표와 월남군 측 대표에게 설명하였다.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한․월간, 한․미간 업무협의를 마친 한국군 연락장교단이 귀국할 무렵, 미월 양측이 모두 「한국측에서는 피해보상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비전투시에 월남 민간인에 끼친 손해배상은 한․미간 약정서(추가사항)에 따라 주월 미군 측이 별도로 재원을 마련해서 지원하도록 미월 양측과 합의가 되었으므로 월남전쟁 시기 주월한국군 소청사무소에서 월남 민간인이 입은 피해 금액을 조사하고, 주월 미군이 부담하여 신청된 사건별로 피해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6. 대한민국정부와 월남공화국정부간의 군대구성원에 의한 공무수행중의 인명피해 및 정부재산 손실에 대한 청구권협정의 체결을 위한 국무회의 상정안 제안설명서
외무부 조약과 1966. 12. 29일
국군의 월남 파병으로 인하여 파생될수 있는 제반 청구권문제는
가. 주월국군구성원의 공무수행중에 발생하는 인명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정부재산에 대한 손해나 상실에 대한 청구권문제 그리고
나. 주월국군의 비공무수행중의 제삼자에 대한 피해 즉 주월군대 구성원의 직무외의 불법행위로 인한 민사상의 손해배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국방부 주관으로 현지 사령관의 합의로서 처리된바, 즉 비전투 소청사건의 처리에 관한 1966. 6. 20일자 한․미보충실무약정서로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약술하면 주월한국군사령관 밑에 한국군 법무장교로 구성된 소청사무소를 두고 제3자 즉 월남 민간인의 소청사건을 심리하고 청구액을 결정하여 해결하는바 이 청구권 해결 재원은 전적으로 주월미군사령부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자의 경우 즉 정부 및 군대 재산의 손해나 상실에 대한 정부간의 청구권과 군대 구성원의 공무수행 중에 발생한 상해나 사망에 대한 정부간의 청구권 해결 문제가 현안의 문제로 되어 있었던바, 이것을 한․월양국정부간의 협정체결의 대상으로 판단되어 관계부처와 협의하여 우리 측 안을 작성하고 월남 측에 제시하여 월남정부와 완전한 합의를 본 바 있습니다.
여기에 제안된 동 협정을 정식 체결함으로써 청구권 문제에 관한 완전한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상의 지점을 참작하시어 심의 의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