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공유회 후기글] 반쪽 아버지의 반쪽 월남 기록 - 딸의 눈으로 본 베트남전 참전군인 정해곤의 인생

얼굴 반쪽의 반점

 

아버지는 얼굴 반쪽을 차지하고 있는 반점 때문에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많이 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고교 입시의 탈락이었다.

6녀 2남, 8남매를 키우시던 조부모님은 큰 아들은 큰 도시로 유학을 보내주셨지만 작은 아들은 고교 진학을 하지 말고 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학비 걱정 없는 국립 학교에 보란 듯이 합격해 집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목포 국립해양고등학교도 면접에서 떨어졌고, 사범학교(초등교원 양성기관) 입시에서도 낙방하셨다.

성적이 좋아서 서류 심사는 통과했지만,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셨다고 한다. 면접에서는 매번 얼굴이 왜 그러냐는 질문을 받았고, 인상이 중요한데 점 때문에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얼굴에 점만 없었으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고로 당시 사범학교는 3년제 고등학교의 일종이었는데, 국비 지원을 받아서 학비가 없었으며 졸업과 동시에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초급대학인 교육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3번을 반복해서 읽었던 책 ‘백범일지’에서 얻은 “얼굴보다 마음가짐, 심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은 아버지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얼굴에 큰 점이 있지만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면 인정을 받을 것이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참전군인 정해곤과 딸 정희정. 사회적기업 한강 사무실에서.


실력으로 취업한 방첩부대를 탈출한 이유

 

중학교 졸업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고교 입시에 도전했으나 낙방한 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주경야독, 스스로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자 공부를 많이 했고 필체가 좋은 아버지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방첩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셨다. 공문서의 한자 표기를 잘 읽어내고 문서 작성도 잘하셨기 때문에 신원조회 업무를 위한 필수요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고교 재학 시절부터 시작해 졸업 후에도 계속 방첩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갈수록 염증을 느끼게 된다.

방첩부대의 신원조회 업무란 취업 예정자의 검증 시스템으로 친인척 중 간첩이나 납북자 등 소위 ‘빨갱이’를 색출해 불이익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죄인의 죄를 가족에게도 함께 묻는 연좌제 성격의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불이익을 면하게 해주겠다며 신원조회 과정에서 뒷돈과 뇌물을 받는 방첩대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뒷돈을 받지 않고 청렴하게 일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부조리가 만연한 곳을 탈출하고 싶었던 아버지가 선택한 곳이 군대였고, 월남전이었다.

참고로 방첩부대는 현재의 국군방첩사령부이다. 국군방첩사령부는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을 주도한 조직으로 헌정 역사상 최초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 불법 침입했다.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간 전쟁터

 

다들 기피하던 월남전 파병을 자원한 아버지는 주변에서 머리가 돈 것 아니냐,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갈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집안에 아들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보상금도 받을 수 있으니 가족을 위해 나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1942년생 아버지는 1966년 4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정훈학교를 거쳐 부대에 배치된다. ‘정훈’이란 군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이념 교육 및 군사 선전, 대외 보도 따위에 관한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정훈학교에서 관련 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월남전에 파병된 뒤 비둘기부대에 배치되었고, 부대의 공보물 제작 업무를 맡게 되셨다. 다행히도 비둘기부대는 전투부대가 아니었고, 학교와 진료소 등을 지어주는 건설 지원단이었다.

그러다보니 1967년 10월부터 1969년 초까지 17개월간 아버지가 만든 ‘비둘기부대 화보’에는 전쟁의 참상이 아니라 새로 지어진 건물과 위문공연 등 밝은 이야기들이 주로 실려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반쪽 아버지의 반쪽 월남 기록이라고 정했다.

 


딸 정희정은 아버지와 구술활동을 잇고 현장에 늘 함께해주었다.


참전군인과 대화가 중요한 이유

 

2024년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시민참여형 구술활동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타인들과 함께 들어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흘려듣곤 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감동적인 글과 영상으로 정리해 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딸인 나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였다. 그들은 나와 아버지의 대화가 정말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 대화는 단지 가족 간의 대화가 아니라고 의미 부여를 해줬다.

난쏘라는 별명을 가진 시민이 나와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뒤 쓴 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사회는 참전군인과 대화해야 한다. 그로부터 그들이 행했던, 아니 국가가 그들을 매개로 하여 저지른 행위에 대한 지금의, 우리의 책임을 찾아가기 위해서. 그것은 벌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행위로 인해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잃은 것을 찾아야, 찾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에게 묻고 서로가 답이길 기대해야 한다.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거짓 정보를 전파하는 극우 유튜브 방송을 계속 들으시면서 본인과 정치색이 다른 정치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을 ‘빨갱이’라고 욕하시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 아버지는 딸인 내게도 ‘좌빨’이라고, 우리나라가 공산화되면 큰일이니 정신 차리라고,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목소리 높여 화를 내다가 어느 한쪽이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며 문 쾅 닫고 들어가야 끝이 난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자고 서로 약속을 하지만, 한집에 살고 있다 보니 종종 싸움이 붙는다.

그러나 귀여운 손녀딸의 말 한마디에 아버지가 마음의 문을 열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대통령을 지키러 간 아버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16년, 내 동생들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촛불시위에 자주 참여했다. 나도 동생의 가족들을 광화문 거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홀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하셨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아버지의 서랍 속에서 발견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아버지와 얼굴 맞대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 즈음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유치원생 손녀딸이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요?”

부모 손 잡고 촛불시위에 즐겁게 참여하던 아이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부모에게서 전해 듣고 궁금증이 생겼던 모양이다.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당황한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소위 ‘태극기 부대’인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손녀딸들에게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맹랑한’ 질문을 던진 손녀딸과 어린 자녀들을 촛불시위에 데리고 나간 동생들을 혼내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상황이 연출되면 어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다가 아버지가 손녀딸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누가 좋으냐?”

나를 비롯해 모든 가족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손녀딸의 입술에 주목했다. 유치원생 손녀딸은 귀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할아버지가 좋아요.”

상상하지 못했던 응답이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게 한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답이었다. 아버지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애교 많던 수다쟁이 유치원생 손녀딸은 이제 말이 없는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요즘은 좋아하는 가수 아이유 응원봉을 들고 부모와 함께 탄핵 찬성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요즘 아버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통령이 또 탄핵을 당하게 되자 다시 대통령을 지키러 거리로 나가신다.

지난 주말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거리에서 목격했다.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후다닥 몸을 피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거리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하지 않았다.

만약 손녀딸이 할아버지의 모습을 거리에서 보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할아버지는 윤석열 대통령이 왜 좋아요?”라고 물었을까?

불편해도 피하지 말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또 나눠봐야겠다. 건강 관리를 잘하고 계시는 아버지, 치매에 걸리시지 않아 대화가 가능한 아버지가 참 감사하다.

 

글 정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