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인터뷰_경기도의회 정책지원관 이은선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를 아시나요?
‘미국 NPO입주 탐방기’라는 블로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2회차로 나뉘어 실린 글이었는데, 워싱턴DC에 있는 <Open Gov Hub>와 뉴욕시에 있는 <Civic Hall>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서울시NPO지원센터(현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가 2019년 정책연수로 미국 비영리 영역의 다양한 자원을 확인하고 조사하는 차원에서 방문한 입주 협업 공간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단 내용 참조)
이러한 정책활동은 지속가능한 공익 활동을 위한 요소로 많은 시민사회가 꼽고 있는 안정적인 공간 확보라는 과제에서 비롯되었다. 2018년 「서울시 시민사회활성화 정책 제언」 보고서에 의하면, 활동가 충원보다 공간 확보가 더 어렵다는 응답이 높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중간지원조직이었던 서울시NPO지원센터는 공익 활동 공간설립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며, 2019년도에 <지속가능한 NPO공간지원모델 연구>, <NPO입주협업공간 확충 수요조사>를 하였고, 2020년에는 <NPO입주협업공간 조성을 위한 시민자산화 모델 개발 및 사업 적정성 검토 컨설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21년에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서울시 용산구 백범로 99길 40, 이하 ‘삼각지’)가 문을 열었다. 550평 규모, 지하 1층 공간에 1인 활동가와 소규모 단체가 활동할 수 있는 입주 협업 공간이 들어섰다. 사무공간과 다양한 회의실, 폰부스와 자료실, 행사를 위한 다목적 공간 등이 갖춰진 곳이었다. 지금 이곳은 NGO를 위한 입주 협업 공간이 아닌 서울시 중간 지원 조직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랜 준비와 정책활동 끝에 마련된 곳이라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나 그렇듯 ‘정책’이 ‘현실(?) 정치’로 인해 부침을 겪는다. 이번 후원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은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삼각지 입주 협업 단체로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이은선 협치지원관이다.
그는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한 공간에서 지내며 입주 단체들을 지원하고, 시민사회와 협업에 대해 고민했다. 지난해 삼각지 입주 계약이 종료되고 아카이브평화기억은 현 주소지인 종로구 ‘공익경영센터’로 이주했다. 이은선 지원관도 잠시 쉼을 찾았다. 작가 백남준의 이름을 딴 시바견 ‘남준’이와 함께 산책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도 했다. 짧은 쉼을 마치고 그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좋은 일을 찾았다. 그리고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
석 새로운 시작을 축하드려요. 새로 직장을 구하고 아카이브평화기억에 바로 회원가입을 해주셨어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제가 마음을 먹고 있었거든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회원가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삼각지에 있을 때부터요. 평화를 주제로 하는 활동에는 생각보다 단체가 많지 않고, 또 정부나 관련 기관에서 갖고 있는 방향 아래 이루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전쟁을 기억하고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사업들을 하잖아요. 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죠. 저는 상처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평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 들어보고 알려주는 역할을 아카이브평화기억이 한다고 생각했고, 그 사업도 굉장히 가치있고 매력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석 감동이네요. 삼각지에 함께 있을 때 왜 그런 얘기를 안 해 주신 거예요.
이 당연히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사업추진을 체계적으로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보았고요. 이 분야에 관심갖고 일하는 활동가를 옆에서 하루하루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뭔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이 사업이 좀 더 알려지면 사람들한테 더 많이 사랑받는 사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석 다른 단체 사정도 비슷하겠지만 아카이브평화기억도 손이 부족해서 사업을 하는데 급급해요. 홍보에 어려움도 크고요. 어떤 방법으로 알려야 할까 고민이 커요.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신 게 아니라 지원관님은 우리 단체가 등록을 하는데 공을 세운 분이잖아요. 제가 2022년에 개인 활동가로 처음 삼각지에 입주를 했어요. 1년 기간 연장을 하는데 단체를 만들어 신청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해 주셨죠. 그래서 2022년 말에 단체 등록을 하게 되었어요. 단체가 2년 동안 활동 기반을 만드는 데 옆에서 도움을 주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한 공간에서 많은 것들을 지원하고 보살펴주셨죠.
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정부, 기업과 더불어 제3섹터인 시민사회 영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3섹터가 많은 시민들이 공감하고 관심갖는 포지션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랬을 때 정부와 기업은 예산이 있지만 시민사회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한 섹터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반이 부족한 게 늘 아쉬웠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정부와 기업이 채워야 건강한 사회를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야 된다고도요.
석 그게 이제 故 박원순 시장의 정책이기도 했던 거죠.
이 시장님이 시민사회단체 출신이기도 하고, 공부도 많이 하셨고, 그래서 시민사회와 많이 협력을 했죠. 그런데 그 시간이 어떤 평가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죠. 시민사회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은 성찰 스스로 버텨 나가는 힘이잖아요. 잘못된 것은 잘 못 된 대로,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돌아보는 뼈아픈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데 못했죠. 그래서 많이 아쉽습니다.
석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궁금해요.
이 저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어요. 프랑스 파리 제8대학, 방센 샌드니 대학으로도 불러요. 미셀 푸코, 들뢰즈 이런 분들이 공부한 곳이에요. 개방적이고 예술이 특화된 대학이죠. 프랑스에 여행을 갔다가 반해서 공부하러 가게 되었어요. 저는 그 나라의 시민력(市民力)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거기는 우리가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영역에 있어서 인간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있었어요. 분위기가 우리와 다르더라고요.
사실 여행을 다니며 바로 유학을 결정한 건 아니었어요. 독립영화가 하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잠시 마포에 있는 공동체 라디오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다루는 콘텐츠가 대부분 동네 이야기와 노인, 청소년, 여성, 소수자 목소리를 다뤘어요. 그전까지 사회에 불만도 많고 비판적으로만 보고 그랬는데, 나도 뭔가 해야될 것 같은데 나한테 지식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때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석 공부를 결심하는데 활동이 좋은 동기가 되어 주었네요.
이 그때 내가 아는 불어는 봉주르(Bonjour)밖에 없었어요. 프랑스에 가서 열심히 공부했죠. 합격 통지서 받고, 교통사고가 났어요. 9월부터 학기가 시작하거든요. 학교를 안 가면 무효가 되는 거예요. 수업 시간에 앉아 있으면 몸이 좋지 않아 불어가 잘 안 들렸어요. 그래서 당시 유급되지 않고 제때 졸업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한번은 커뮤니케이션 문화 교수님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정을 설명하고 과제를 기한에 맞춰서 최대한 열심히 써서 냈어요. 형편은 없지만 내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교수님이 제게 긴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내가 수업 때 너를 기억한다.’ 그러면서 ‘너의 성실함을 기억하고, 네 사정이 이랬다는 것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과목에 점수가 안 나왔다면 정말 유급이 될 상황이었죠. 프랑스 사회는 사람을 우선 생각하는 사회인 것 같아요. 물론 인종차별이나 난민 문제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안 좋은 때도 있고 하죠. 그래도 기본은 그런 사회라는 생각을 했어요.
석 드라마 같은 이야기네요. 프랑스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공부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어진거로군요.
이 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제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몸담았던 정책사업에 대해서 후회는 없는데, 이런 게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다 보니 개인적으로 느끼는 비애가 컸어요.
석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대한 꿈은 접으셨던 거예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시고 난 다음에 더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런 활동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었던 거잖아요.
이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하고 싶어요. 밀양, 초록 물고기를 만드신 이창동 감독님도 40대에 감독을 시작하고 시나리오도 썼다고 들었어요. 내가 영화하고 싶을 때는 20대였는데, 그때는 40살이 되게 많아 보였거든요. 근데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감독이라는 거는 오히려 더 인생에 대한 철학과 자기 시야가 생긴 후에 해도 되겠다. 그럼 나도 이제 해봐야겠다. 그렇게요.
석 적극 응원합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인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이 돌아보면 그렇게 살면서 저 자신을 칭찬하는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주변과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칭찬을 안 하고 사니까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못하고 그냥 지낸 것 같아요.
석 잘했다 해줘도 될 것 같은데요. 계속 내가 당면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보다 더 나은 방향을 갖고 온 거잖아요. 그 얘기는 앞으로도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거고 그런 측면에서 전 충분히 칭찬받아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결국 나한테 근육이 생기는 거잖아요. 더 단단해지고요.
**********************
그와 이야기 나누며 삼각지에서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공간의 기억이 애틋하고 아쉽다. 바뀐 시정으로 운영이 녹록치 않았지만, 그는 입주 단체와 활동가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따뜻한 마음이 오래 남아있다. 그가 몸담았던 시정은 시민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협업이 활발했던 시절이다. 동무를 만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반려견 남준이도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 들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남준이와 함께 까페 거리로 산책에 나섰다. 잠시 멈춘 걸음, 아카이브평화기억이 그와 함께 걸으며 나아간다.
인터뷰·글 석미화
[참고]
<Open Gov Hub>는 50여개의 조직과 300여명의 활동가로 구성된 네트워크(2019년도 기준)로 2012년도에 설립되었다. 2011년에 아랍의 봄을 비롯하여 열린 정부를 주장하는 범세계적인 운동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엔총회와 함께 열린정부 파트너십을 추진하였는데, 그때부터 이 열린 정부라는 용어가 확산되었다. 당시에 협업공간(코워킹스페이스), 인큐베이팅 센터나 리소스 센터 같은 곳이 생겨났고, 비정부기관인 Global Integrity와 Development Gateway가 협력해 만든 공간이다.
https://blog.naver.com/snpo2013/222306934608
https://www.opengovhub.org/
<Civic Hall>은 시민 기술 발전과 공공 이익을 위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학습과 협력 센터로서, 시민사회단체 협업공간이자 기술중심 교육기관이다. 그 시작은 개인민주주의포럼(Personal Democracy Forum)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는데, 이 포럼은 시민사회, 민주주의, 테크놀로지의 교차점을 논의하는 장이다. <Civic Hall>에서는 시민 활동가를 국가, 도시, 기업, 공동체, 조직 안의 모든 단계에서 긴급한 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방법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혹은 팀이나 조직, 네트워크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민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기술, 관계를 제공하는 일을 기관의 미션으로 삼고 있다.
https://blog.naver.com/snpo2013/222313103570
https://www.civichall.org/about
후원회원 인터뷰_경기도의회 정책지원관 이은선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를 아시나요?
‘미국 NPO입주 탐방기’라는 블로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2회차로 나뉘어 실린 글이었는데, 워싱턴DC에 있는 <Open Gov Hub>와 뉴욕시에 있는 <Civic Hall>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서울시NPO지원센터(현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가 2019년 정책연수로 미국 비영리 영역의 다양한 자원을 확인하고 조사하는 차원에서 방문한 입주 협업 공간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단 내용 참조)
이러한 정책활동은 지속가능한 공익 활동을 위한 요소로 많은 시민사회가 꼽고 있는 안정적인 공간 확보라는 과제에서 비롯되었다. 2018년 「서울시 시민사회활성화 정책 제언」 보고서에 의하면, 활동가 충원보다 공간 확보가 더 어렵다는 응답이 높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중간지원조직이었던 서울시NPO지원센터는 공익 활동 공간설립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며, 2019년도에 <지속가능한 NPO공간지원모델 연구>, <NPO입주협업공간 확충 수요조사>를 하였고, 2020년에는 <NPO입주협업공간 조성을 위한 시민자산화 모델 개발 및 사업 적정성 검토 컨설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21년에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서울시 용산구 백범로 99길 40, 이하 ‘삼각지’)가 문을 열었다. 550평 규모, 지하 1층 공간에 1인 활동가와 소규모 단체가 활동할 수 있는 입주 협업 공간이 들어섰다. 사무공간과 다양한 회의실, 폰부스와 자료실, 행사를 위한 다목적 공간 등이 갖춰진 곳이었다. 지금 이곳은 NGO를 위한 입주 협업 공간이 아닌 서울시 중간 지원 조직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랜 준비와 정책활동 끝에 마련된 곳이라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나 그렇듯 ‘정책’이 ‘현실(?) 정치’로 인해 부침을 겪는다. 이번 후원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은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삼각지 입주 협업 단체로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이은선 협치지원관이다.
그는 아카이브평화기억 활동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한 공간에서 지내며 입주 단체들을 지원하고, 시민사회와 협업에 대해 고민했다. 지난해 삼각지 입주 계약이 종료되고 아카이브평화기억은 현 주소지인 종로구 ‘공익경영센터’로 이주했다. 이은선 지원관도 잠시 쉼을 찾았다. 작가 백남준의 이름을 딴 시바견 ‘남준’이와 함께 산책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도 했다. 짧은 쉼을 마치고 그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좋은 일을 찾았다. 그리고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
석 새로운 시작을 축하드려요. 새로 직장을 구하고 아카이브평화기억에 바로 회원가입을 해주셨어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제가 마음을 먹고 있었거든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회원가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삼각지에 있을 때부터요. 평화를 주제로 하는 활동에는 생각보다 단체가 많지 않고, 또 정부나 관련 기관에서 갖고 있는 방향 아래 이루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카이브평화기억은 전쟁을 기억하고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사업들을 하잖아요. 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죠. 저는 상처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평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 들어보고 알려주는 역할을 아카이브평화기억이 한다고 생각했고, 그 사업도 굉장히 가치있고 매력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석 감동이네요. 삼각지에 함께 있을 때 왜 그런 얘기를 안 해 주신 거예요.
이 당연히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사업추진을 체계적으로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보았고요. 이 분야에 관심갖고 일하는 활동가를 옆에서 하루하루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뭔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이 사업이 좀 더 알려지면 사람들한테 더 많이 사랑받는 사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석 다른 단체 사정도 비슷하겠지만 아카이브평화기억도 손이 부족해서 사업을 하는데 급급해요. 홍보에 어려움도 크고요. 어떤 방법으로 알려야 할까 고민이 커요.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신 게 아니라 지원관님은 우리 단체가 등록을 하는데 공을 세운 분이잖아요. 제가 2022년에 개인 활동가로 처음 삼각지에 입주를 했어요. 1년 기간 연장을 하는데 단체를 만들어 신청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해 주셨죠. 그래서 2022년 말에 단체 등록을 하게 되었어요. 단체가 2년 동안 활동 기반을 만드는 데 옆에서 도움을 주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한 공간에서 많은 것들을 지원하고 보살펴주셨죠.
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정부, 기업과 더불어 제3섹터인 시민사회 영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3섹터가 많은 시민들이 공감하고 관심갖는 포지션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랬을 때 정부와 기업은 예산이 있지만 시민사회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한 섹터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반이 부족한 게 늘 아쉬웠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정부와 기업이 채워야 건강한 사회를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야 된다고도요.
석 그게 이제 故 박원순 시장의 정책이기도 했던 거죠.
이 시장님이 시민사회단체 출신이기도 하고, 공부도 많이 하셨고, 그래서 시민사회와 많이 협력을 했죠. 그런데 그 시간이 어떤 평가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죠. 시민사회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은 성찰 스스로 버텨 나가는 힘이잖아요. 잘못된 것은 잘 못 된 대로,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돌아보는 뼈아픈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데 못했죠. 그래서 많이 아쉽습니다.
석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궁금해요.
이 저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어요. 프랑스 파리 제8대학, 방센 샌드니 대학으로도 불러요. 미셀 푸코, 들뢰즈 이런 분들이 공부한 곳이에요. 개방적이고 예술이 특화된 대학이죠. 프랑스에 여행을 갔다가 반해서 공부하러 가게 되었어요. 저는 그 나라의 시민력(市民力)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거기는 우리가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영역에 있어서 인간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있었어요. 분위기가 우리와 다르더라고요.
사실 여행을 다니며 바로 유학을 결정한 건 아니었어요. 독립영화가 하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잠시 마포에 있는 공동체 라디오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다루는 콘텐츠가 대부분 동네 이야기와 노인, 청소년, 여성, 소수자 목소리를 다뤘어요. 그전까지 사회에 불만도 많고 비판적으로만 보고 그랬는데, 나도 뭔가 해야될 것 같은데 나한테 지식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때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석 공부를 결심하는데 활동이 좋은 동기가 되어 주었네요.
이 그때 내가 아는 불어는 봉주르(Bonjour)밖에 없었어요. 프랑스에 가서 열심히 공부했죠. 합격 통지서 받고, 교통사고가 났어요. 9월부터 학기가 시작하거든요. 학교를 안 가면 무효가 되는 거예요. 수업 시간에 앉아 있으면 몸이 좋지 않아 불어가 잘 안 들렸어요. 그래서 당시 유급되지 않고 제때 졸업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한번은 커뮤니케이션 문화 교수님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정을 설명하고 과제를 기한에 맞춰서 최대한 열심히 써서 냈어요. 형편은 없지만 내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교수님이 제게 긴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내가 수업 때 너를 기억한다.’ 그러면서 ‘너의 성실함을 기억하고, 네 사정이 이랬다는 것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과목에 점수가 안 나왔다면 정말 유급이 될 상황이었죠. 프랑스 사회는 사람을 우선 생각하는 사회인 것 같아요. 물론 인종차별이나 난민 문제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안 좋은 때도 있고 하죠. 그래도 기본은 그런 사회라는 생각을 했어요.
석 드라마 같은 이야기네요. 프랑스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공부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어진거로군요.
이 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제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몸담았던 정책사업에 대해서 후회는 없는데, 이런 게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다 보니 개인적으로 느끼는 비애가 컸어요.
석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대한 꿈은 접으셨던 거예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시고 난 다음에 더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런 활동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었던 거잖아요.
이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하고 싶어요. 밀양, 초록 물고기를 만드신 이창동 감독님도 40대에 감독을 시작하고 시나리오도 썼다고 들었어요. 내가 영화하고 싶을 때는 20대였는데, 그때는 40살이 되게 많아 보였거든요. 근데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감독이라는 거는 오히려 더 인생에 대한 철학과 자기 시야가 생긴 후에 해도 되겠다. 그럼 나도 이제 해봐야겠다. 그렇게요.
석 적극 응원합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인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이 돌아보면 그렇게 살면서 저 자신을 칭찬하는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주변과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칭찬을 안 하고 사니까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못하고 그냥 지낸 것 같아요.
석 잘했다 해줘도 될 것 같은데요. 계속 내가 당면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보다 더 나은 방향을 갖고 온 거잖아요. 그 얘기는 앞으로도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거고 그런 측면에서 전 충분히 칭찬받아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결국 나한테 근육이 생기는 거잖아요. 더 단단해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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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이야기 나누며 삼각지에서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공간의 기억이 애틋하고 아쉽다. 바뀐 시정으로 운영이 녹록치 않았지만, 그는 입주 단체와 활동가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따뜻한 마음이 오래 남아있다. 그가 몸담았던 시정은 시민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협업이 활발했던 시절이다. 동무를 만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반려견 남준이도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 들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남준이와 함께 까페 거리로 산책에 나섰다. 잠시 멈춘 걸음, 아카이브평화기억이 그와 함께 걸으며 나아간다.
인터뷰·글 석미화
[참고]
<Open Gov Hub>는 50여개의 조직과 300여명의 활동가로 구성된 네트워크(2019년도 기준)로 2012년도에 설립되었다. 2011년에 아랍의 봄을 비롯하여 열린 정부를 주장하는 범세계적인 운동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엔총회와 함께 열린정부 파트너십을 추진하였는데, 그때부터 이 열린 정부라는 용어가 확산되었다. 당시에 협업공간(코워킹스페이스), 인큐베이팅 센터나 리소스 센터 같은 곳이 생겨났고, 비정부기관인 Global Integrity와 Development Gateway가 협력해 만든 공간이다.
https://blog.naver.com/snpo2013/222306934608
https://www.opengovhub.org/
<Civic Hall>은 시민 기술 발전과 공공 이익을 위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학습과 협력 센터로서, 시민사회단체 협업공간이자 기술중심 교육기관이다. 그 시작은 개인민주주의포럼(Personal Democracy Forum)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는데, 이 포럼은 시민사회, 민주주의, 테크놀로지의 교차점을 논의하는 장이다. <Civic Hall>에서는 시민 활동가를 국가, 도시, 기업, 공동체, 조직 안의 모든 단계에서 긴급한 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방법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혹은 팀이나 조직, 네트워크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민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기술, 관계를 제공하는 일을 기관의 미션으로 삼고 있다.
https://blog.naver.com/snpo2013/222313103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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