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억 이야기[공론장 후기글] “‘병사인 자기’와 ‘시민인 자기’” : 김선우

내가 군복무를 하던 중 부대에서 탈영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긴 연휴의 마지막 날에 한 병사가 돌연 사라졌다. 한 시간 이내에 찾지 못하면 탈영으로 입건된다고 대대장이 말했다. 모든 대대원이 흩어져서 영내를 돌아다녔다. 진짜 탈영인가, 이제 어떻게 되나… 그런 말을 옆 사람과 주고받은 것 치고는 허무하게 ‘실종자’를 찾았다. 내가 최초 발견자였다. 발견이라고 하기 미안할 정도로 맞은편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실종자’를 우연히 마주쳤다. 어떤 긴장감이나 다급함도 없이 잠깐 산책 다녀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는 나지막이 “담배 피워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앞질러 갔다. 탈영을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그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이후에 그린캠프(‘관심병사’를 관리하는 교육대)에 입소했다는 얘기만 들었다. 무사히 전역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중한 휴식 시간을 빼앗겼다는 짜증과 약간의 연민 속에서 군대와 군인은 영원한 자베르와 장발장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라고 그날 일기에 적었다. 어찌 되었든 이 소동은 작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사소하고 아무런 반향도 남기지 않은 ‘탈영병’들은 ‘폐급’ 운운하는 말들 속에서 풍문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한국에서 탈영은 정신이상, 부적응, 책임회피 등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군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군기사고일 뿐이다. 모리타 가즈키 선생님이 논문 「’돌아온 탕자’」(부제 생략)를 통해 보여준 ‘반성하는 탈영병’들,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무장탈영병’ 등은 ‘탈영병’의 존재를 갱생 혹은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국가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다. 모리타 선생님은 탈영에서 정치성을 지우려는 국가의 전략을 의식하면서, 국가 서사의 바깥을 조명한다. 이것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군 내부 폭력에 대응하고 벗어나려는 탈영병, 군내 저항자로서의 탈영병 등 탈영병의 다양한 군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탕자’들의 사적이고 사사로운 탈영 행위에 정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가의 강제적인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점에서 탈영은 정치적 행위다. 그리고 그들 행위에 진지하게 응답하려는 사회, 모리타 선생님의 표현대로 ‘도주권(逃走圈)’ 속에서 정치적 상징성(‘반전탈영병’ 등)을 지니게 된다. 즉 국가가 제시하는 전형적인 탈영병 이미지에 맞서 탈영의 다의성과 정치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무장/탈영’이라는 말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모리타 선생님은 1965년 전후로 ‘도망병’보다 ‘탈영병’의 사용 빈도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상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도망’이 비겁함, 공포,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느낌이라면 ‘탈영’은 무언가 수상한 의도를 가지고 군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다. ‘도망병’이 그의 비겁함, 무책임함, 군대의 ‘수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탈영병’은 그것이 심각한 ‘범죄’임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도망병’에서 ‘탈영병’으로의 명칭 변화는 ‘도주권’의 소멸과 맥을 같이했을 것이다. 도주권 안에서 도망병들은 그럭저럭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탈영병’(=범죄자)일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범죄자를 돕는 것도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대와 징병제는 ‘사회’를 정복함으로써 더욱 강력해졌다.


모리타 선생님은 1970년 전후로 ‘무장탈영병’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장탈영병에 대해 언론과 사진기자들이 활발하게 보도한 것이 한 원인이지 않을까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당시의 몇몇 신문 기사를 보면 총기난사자나 탈영병이 ‘월남 참전 군인’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정신착란’, ‘평소에도 성격이 거칠었다’ 등 사고자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당시 군 정신의학이 활발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군 당국자들도 월남전과 ‘정신착란’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장탈영’의 이면에는 베트남전쟁이 있었지만 둘의 연관성은 부정되어야 했다. 전쟁이라는 맥락이 지워지면서 이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처럼 묘사된 것이 아닐까? ‘무장탈영병’이라는 단어 자체는 우발적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탈영병’의 계보가 지금에 와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명한 것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 군인이 되라는 명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침투하기까지 긴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징병제가 보편화되고 더욱 ‘국가’를 의심하지 않게 된 현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탈영병과 부적응자는 정신이상이나 이기심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들은 군인이 되지 못한 몸과 마음, 군인됨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는 심성, 군사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시민인 자기”를 드러낸다.


그런데 모리타 선생님이 논문에서 언급한 “시민인 자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규율’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아니, 오히려 어떤 규율 속에서 우리는 ‘시민’이 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정치적’임을 선언하는 일만큼이나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도 중요해진다. 한국에서는 ‘자유’만큼이나 공적인 것, 헌신, 규율, 복종 같은 말들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군인됨’에 대비되는 ‘시민됨’은 ‘좋은 것’만을 가리키는 건 아닐 수도 있다. “탈영의 정치성과 저항으로서의 가능성”을 논의할 때 그 정치성을 담보하거나 정치가 향하게 될 ‘시민인 자기’가 무엇인지, 어떤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분명 이것도 자명하게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질문의 출발점은 “’병사인 자기’와 ‘시민인 자기’가 길항하는 순간”(「’돌아온 탕자’」) 속에서 생기는 탈영병과 부적응자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으로 남은 이들에게는 해석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아무런 반향을 남기지 못하고 풍문으로만 남은 이들은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계속 고민하고 싶은 문제다. 



김선우

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2024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 강연 “병사들의 ‘도망’: 탈영의 정치성과 저항으로서의 가능성”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