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군인 최홍희/사진 석미화
최홍희 참전군인을 만나러 용산전쟁기념관 내 전쟁기념사업회 건물 4층 (사)대한국방교육진흥회 사무실을 찾았다. 이곳에는 전쟁기념관을 운영하는 사업회 사무실을 비롯해 국방 관련 연구소와 단체가 입주해 있다. 최홍희 참전군인은 1972년 6월 말 포병 장교로 월남에 갔다. 파병 당시 중위 계급이었다. 월남 다녀오면 군경력을 두 배로 쳐 준다고 하여 가게 되었고, 1973년 3월 한국군이 철수하며 1년이 못 되어 돌아왔다. 월남에서 사용하던 무기와 장비를 모두 챙겨 한국으로 보낸 후 마지막 철수 조로 귀국했다. 덜컹거리는 캐비닛, 낡은 선풍기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들고 와서 뭐라도 주워가려고 온 월남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가 그에겐 한국군 철수가 참전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가 속한 단체는 생긴 지 4년 남짓 되었고, 주로 참전군인이 모여 활동한다. 지금은 단체를 만들고 주도했던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새로 회장을 선임하고 다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활동 목적은 ‘군장병들에게 군인정신과 인성교육’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이곳에 나와 일한다. 참전군인 최홍희는 12년 군 생활과 동대장 기간까지 포함해 총 39년 군복을 입었다. 그는 지난해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 활동에 함께하며 나를 비롯해 정원, 예주, 노랭으로 구성된 팀을 만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파란 군복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와 만남은 전쟁기념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구술 활동 출판 작업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한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2층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화창한 날이라 그런지 전쟁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해병대 마크를 단 군인들이 단체 관람을 하고 줄지어 지나갔다. 멀리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들도 보였다. 그들을 보며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석미화(이하 ‘석’): 전쟁기념관에 오는 학생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이곳이 전쟁에 대해 너무 멋지게만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전쟁이란 것이 고통스럽고 폭력적인데 그런 이미지가 없잖아요. 이곳에 온 청년과 학생, 시민들이 전쟁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최홍희(이하 ‘최’): 학교가 규정으로 관람을 하도록 되어 있나 봐. 애들도 나오면 좋잖아. 안내는 해 줄거야. 그게 인제 기록식이고 옛날에 이렇게 해가지고 외국에서 도와주고 싸우느라 우리가 이렇게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런 거지. 솔직한 얘기로 뭐 모르겠어. 집에서도 집안 걱정하는 거는 어른들만 걱정하지. 내가 인제 걱정한다고 될 일이냐. 그래도 인제 내가 나이가 들어보니까 어릴 때만 해도 아이고 나라 걱정 안 했는데 인제는 진짜 걱정이 되더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와의 대화는 전쟁기념관에서 북한 김정은 이야기로, 6.25에서 월남전으로, 한국군 참전과 미군 이야기로, 경제발전과 참전 수당, 민간인 학살과 베트콩 이야기로 종횡무진했다. 그는 열심히 생각을 말해주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난 후 나의 생각을 말했다. 서로 생각의 차이가 컸다. 최홍희 참전군인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말을 이어갔다. 한 시간 반의 인터뷰 시간 중 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사진 촬영 중, 최홍희(좌)와 석미화(우)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 안지혜
왜 말하지 않냐고? 묻지 않으니까
석: 저는 좀 걱정이 있어요. 선생님의 생각을 존중해요. 선생님도 저의 생각을 존중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다를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틀린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을 하면 소통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랬을 때 저희가 작년에 만난 참전군인 분들도 선생님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은 있었지만 또 다른 결로 이야기해 주는 분들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 베트남 전쟁 문제가 참전군인은 전투 수당 얘기만 하고 시민단체는 민간인 학살 얘기만 하는 답답함이 있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가 이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고,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맨날 울고 난리지.
석: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시민들과 함께 참전군인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요. 들으면 들을수록 그분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다고 느끼거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픔도 많이 느껴져요. 뭐랄까 짠한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미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삶의 끝자락에 계신 분들이잖아요. 사실은 이분들이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이분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듣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잖아요. 우리 사회의 듣는 능력을 생각해 보는 거죠. 그랬을 때 이야기의 핵심은 제가 보기에 사실 돈은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와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것은 들을 수 없을까. 한편으로는 그게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최: 국가는 나름대로 해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제 받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시 우리가 해준 걸로 따지면 얼마나 우리가 잘 해줬는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막 월남 얘기하면 오죽 케케묵은 얘기냐고. 옛날에는 월남 얘기 나오면 그냥 그 집 아들도 월남 갔다 오고 저 집 아들도 갔다 오고 이랬어요. 근데 지금은 뭐 월남 얘기해 봐야... 어디 가서 해봐요.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이제 모르겠어. 지금 한 17만 명이 남아 있는데, 조금 지나면 한 4~5년 사이 많이 돌아가고 인원이 적어지면 나라에서 잘 대우해줘라 안 하겠냐. 그때까지는 개인이 많다 보니까. 그래도 지금 각 시도에서 주는 돈이 있어. 충청도 어디 거기는 인원이 몇 명 안 될 거 아니야. 시골에는 한 달에 50만 원인가 60만 원 준대. 내가 사는 부천은 참전군인이 2천 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정확히 모르겠어. 우리는 인원이 많아서 그런가 한 몇 년째 10만 원이야. 10만 원이 한 사람에게는 적다고 해도 그게 2천 명이면 얼마야.
석: 참전군인 어르신들은 돈 얘기밖에 안 하시더라고요. (웃음)
최: 다른 건 할 게 뭐 있어. 왜 그러냐 하면 다 나이 들었는데, 소주도 한 잔 먹고, 남한테 챙피 안 당하고, 손주들 보면 과자도 사줘야지. 그러니 돈이 중요하지.
석: 사실 참전 기간으로 따지면 인생에 1년 남짓한 기간이잖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1년이 평생 동안 굉장히 큰 의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건강하게 잘 계시면 참 다행이지만, 병을 얻은 분들도 계시고, 제대로 사회생활 못한 분도 계시고, 가족들도 어려움을 겪는 등 여러 사연이 있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국가에 더 책임을 묻고 우리를 전장으로 보낸 국가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책을 가져야 되는지를 요구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야기하다 보면 보상으로 연결이 되기도 할 텐데, 무언가 빠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전쟁에 갔다 온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할 필요는 있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런 걸 잘 모르니까 참전하셨던 분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전혀 없는 거죠. 수많은 사람이 다녀온 만큼 내 가족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이 자기한테 이해관계가 100원도 없을뿐더러 얘기해 봐야 뭐 씨알머리 먹혀?
석: 참전군인을 만나는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사람들이 많이 관심갖고 있다는 거예요. 참전군인을 만나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가족 안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요. 다만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 같이 살았는데 그분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싶고 알고 싶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같이 하는 분들이 있단 말이에요.
최: 그렇지. 그런데 예를 들어서 손주나 애들이, 야 그런 게 있었어요. 들어주면 좋지. 근데 대부분은 그런 얘기 못 꺼내지. 이제 할아버지 옛날 얘기 월남 갔다 온 거 그거 하지 말지. 그러니까 더 월남 갔다 온 사람들도 나라에서 뭐 돈 얼마 주는 거 그런 거 얘기나 하지.
석: 작년에 저희가 여러 번 뵙고 이야기 들었잖아요. 해보시면서 어떠셨어요. 다른 세대랑 긴 시간 함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거잖아요. 월남 다녀온 이야기를 그렇게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최: 원래는 별로 없는 거지. 묻지 않으니까. 군대 얘기하면 그런 걸 우리한테 말하냐 이런 식이지. 그러니까 얘기거리가 안 되는 거고, 이제 또 우리라도 참전에 대해 좋은 일만 있었다면 자랑삼아 얘기할 수도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러면 인제 그걸 이제 죄송한 얘기 좀 합시다. 그런 면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내 교육도 같이 해야 되지 않겠나. 나라에서는 뭐 한마디 없잖아.
참전군인 최홍희는 시민참여형 구술활동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그램에 함께한 후 구술 활동을 공유하는 자리,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주최하는 행사에 늘 함께해 주는 고마운 회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경험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묻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월남 얘기가 돈 얘기로만 흐르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구술활동 현장, 최홍희 참전군인과함께/사진 노랭
생각의 차이? 불편할 게 뭐 있어
석: 후원하시는 우리 단체 이름 아세요?
최: 글쎄 내가 봤는데 자세히 기억은 못하겠네.
석: 맞춰보세요. 후원까지 하시는데 이름은 아셔야죠.
최: 허허 생각 안 나.
석: 아카이브평화기억이에요. 아카이브는 기록보관소라는 뜻이고요.
최: 아이고 기억을 더듬어 주니까. 맞어. 이런 뜻이 맞어. 누가 이걸 잘 썼네. 이렇게 하는 게 없다 보니까 쉽지 않겠다 생각이 들었지. 나는 그래. 지금 하는 걸 보면 혼자 하는 게 쉽지 않다. 조직으로도 쉽지 않은 거고. 노력한 만큼은 나와야 하는데. 인제 나라도 어떤 걸 도와줄 수 있는지, 내가 도와주는 건 한계가 있고. 우리가 원래 해야 하는데. 나하고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할 일을 대신해 주는데 그러면 내가 안 해? 이제 뭐 너무 후원을 조금해서 할 말이 없지만. 하하.
석: 근데 선생님 저랑 대화하면서 느끼셨겠지만,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좀 다르잖아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그거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최: 불편할 게 뭐 있어.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거는 자기 위치에 따라서 생각이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석: 그렇다면 선생님은 저희의 생각도 이해를 해주고 계신 거네요.
최: 아니 이해 안 하면 어쩔 거야. 뭐든지 잘못된 게 있으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밝혀야지. 죽고 나면 게임 끝이야. 그러니까 그게 쉬운 건 아니잖아. 인제 좀 월남 갔다 왔던 전우들을 위해서 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나중에 역할이라도 잘해 놓으면 좋은 거 아니냐 이거지.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제발전 했는지 몰라. 젊은 세대들에게 그 역사를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해. 이제 우리 국가도 참전 노병들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고 남은 인생 웃으며 살게 해주면 좋겠어.
2023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구술 활동 공유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참전군인 최홍희
참전군인 최홍희와 5년 전 우연히 만났다.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텐데 인연을 이어준 것은 카톡이었다. 그는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가수 나훈아는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야’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며 사랑마저 카톡으로 전하는 카톡이는 세상이라는 푸념을 했는데, 나는 오히려 카톡으로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길게 만났고, 지난해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다른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소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이야기, 그를 만난 이들의 이야기, 참전군인 최홍희의 이야기는 조만간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오늘도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아침 인사를 담은 카톡이 온다. 카톡!
인터뷰 글 석미화
사진 석미화, 안지혜, 노랭
참전군인 최홍희/사진 석미화
최홍희 참전군인을 만나러 용산전쟁기념관 내 전쟁기념사업회 건물 4층 (사)대한국방교육진흥회 사무실을 찾았다. 이곳에는 전쟁기념관을 운영하는 사업회 사무실을 비롯해 국방 관련 연구소와 단체가 입주해 있다. 최홍희 참전군인은 1972년 6월 말 포병 장교로 월남에 갔다. 파병 당시 중위 계급이었다. 월남 다녀오면 군경력을 두 배로 쳐 준다고 하여 가게 되었고, 1973년 3월 한국군이 철수하며 1년이 못 되어 돌아왔다. 월남에서 사용하던 무기와 장비를 모두 챙겨 한국으로 보낸 후 마지막 철수 조로 귀국했다. 덜컹거리는 캐비닛, 낡은 선풍기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들고 와서 뭐라도 주워가려고 온 월남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가 그에겐 한국군 철수가 참전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가 속한 단체는 생긴 지 4년 남짓 되었고, 주로 참전군인이 모여 활동한다. 지금은 단체를 만들고 주도했던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새로 회장을 선임하고 다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활동 목적은 ‘군장병들에게 군인정신과 인성교육’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이곳에 나와 일한다. 참전군인 최홍희는 12년 군 생활과 동대장 기간까지 포함해 총 39년 군복을 입었다. 그는 지난해 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 활동에 함께하며 나를 비롯해 정원, 예주, 노랭으로 구성된 팀을 만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파란 군복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와 만남은 전쟁기념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구술 활동 출판 작업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한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2층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화창한 날이라 그런지 전쟁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해병대 마크를 단 군인들이 단체 관람을 하고 줄지어 지나갔다. 멀리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들도 보였다. 그들을 보며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석미화(이하 ‘석’): 전쟁기념관에 오는 학생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이곳이 전쟁에 대해 너무 멋지게만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전쟁이란 것이 고통스럽고 폭력적인데 그런 이미지가 없잖아요. 이곳에 온 청년과 학생, 시민들이 전쟁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최홍희(이하 ‘최’): 학교가 규정으로 관람을 하도록 되어 있나 봐. 애들도 나오면 좋잖아. 안내는 해 줄거야. 그게 인제 기록식이고 옛날에 이렇게 해가지고 외국에서 도와주고 싸우느라 우리가 이렇게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런 거지. 솔직한 얘기로 뭐 모르겠어. 집에서도 집안 걱정하는 거는 어른들만 걱정하지. 내가 인제 걱정한다고 될 일이냐. 그래도 인제 내가 나이가 들어보니까 어릴 때만 해도 아이고 나라 걱정 안 했는데 인제는 진짜 걱정이 되더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와의 대화는 전쟁기념관에서 북한 김정은 이야기로, 6.25에서 월남전으로, 한국군 참전과 미군 이야기로, 경제발전과 참전 수당, 민간인 학살과 베트콩 이야기로 종횡무진했다. 그는 열심히 생각을 말해주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난 후 나의 생각을 말했다. 서로 생각의 차이가 컸다. 최홍희 참전군인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말을 이어갔다. 한 시간 반의 인터뷰 시간 중 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사진 촬영 중, 최홍희(좌)와 석미화(우)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 안지혜
왜 말하지 않냐고? 묻지 않으니까
석: 저는 좀 걱정이 있어요. 선생님의 생각을 존중해요. 선생님도 저의 생각을 존중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다를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틀린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을 하면 소통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랬을 때 저희가 작년에 만난 참전군인 분들도 선생님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은 있었지만 또 다른 결로 이야기해 주는 분들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 베트남 전쟁 문제가 참전군인은 전투 수당 얘기만 하고 시민단체는 민간인 학살 얘기만 하는 답답함이 있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가 이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고,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맨날 울고 난리지.
석: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시민들과 함께 참전군인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요. 들으면 들을수록 그분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다고 느끼거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픔도 많이 느껴져요. 뭐랄까 짠한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미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삶의 끝자락에 계신 분들이잖아요. 사실은 이분들이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이분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듣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잖아요. 우리 사회의 듣는 능력을 생각해 보는 거죠. 그랬을 때 이야기의 핵심은 제가 보기에 사실 돈은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와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것은 들을 수 없을까. 한편으로는 그게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최: 국가는 나름대로 해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제 받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시 우리가 해준 걸로 따지면 얼마나 우리가 잘 해줬는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막 월남 얘기하면 오죽 케케묵은 얘기냐고. 옛날에는 월남 얘기 나오면 그냥 그 집 아들도 월남 갔다 오고 저 집 아들도 갔다 오고 이랬어요. 근데 지금은 뭐 월남 얘기해 봐야... 어디 가서 해봐요.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이제 모르겠어. 지금 한 17만 명이 남아 있는데, 조금 지나면 한 4~5년 사이 많이 돌아가고 인원이 적어지면 나라에서 잘 대우해줘라 안 하겠냐. 그때까지는 개인이 많다 보니까. 그래도 지금 각 시도에서 주는 돈이 있어. 충청도 어디 거기는 인원이 몇 명 안 될 거 아니야. 시골에는 한 달에 50만 원인가 60만 원 준대. 내가 사는 부천은 참전군인이 2천 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정확히 모르겠어. 우리는 인원이 많아서 그런가 한 몇 년째 10만 원이야. 10만 원이 한 사람에게는 적다고 해도 그게 2천 명이면 얼마야.
석: 참전군인 어르신들은 돈 얘기밖에 안 하시더라고요. (웃음)
최: 다른 건 할 게 뭐 있어. 왜 그러냐 하면 다 나이 들었는데, 소주도 한 잔 먹고, 남한테 챙피 안 당하고, 손주들 보면 과자도 사줘야지. 그러니 돈이 중요하지.
석: 사실 참전 기간으로 따지면 인생에 1년 남짓한 기간이잖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1년이 평생 동안 굉장히 큰 의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건강하게 잘 계시면 참 다행이지만, 병을 얻은 분들도 계시고, 제대로 사회생활 못한 분도 계시고, 가족들도 어려움을 겪는 등 여러 사연이 있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국가에 더 책임을 묻고 우리를 전장으로 보낸 국가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책을 가져야 되는지를 요구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야기하다 보면 보상으로 연결이 되기도 할 텐데, 무언가 빠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전쟁에 갔다 온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할 필요는 있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런 걸 잘 모르니까 참전하셨던 분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전혀 없는 거죠. 수많은 사람이 다녀온 만큼 내 가족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이 자기한테 이해관계가 100원도 없을뿐더러 얘기해 봐야 뭐 씨알머리 먹혀?
석: 참전군인을 만나는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사람들이 많이 관심갖고 있다는 거예요. 참전군인을 만나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가족 안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요. 다만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 같이 살았는데 그분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싶고 알고 싶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같이 하는 분들이 있단 말이에요.
최: 그렇지. 그런데 예를 들어서 손주나 애들이, 야 그런 게 있었어요. 들어주면 좋지. 근데 대부분은 그런 얘기 못 꺼내지. 이제 할아버지 옛날 얘기 월남 갔다 온 거 그거 하지 말지. 그러니까 더 월남 갔다 온 사람들도 나라에서 뭐 돈 얼마 주는 거 그런 거 얘기나 하지.
석: 작년에 저희가 여러 번 뵙고 이야기 들었잖아요. 해보시면서 어떠셨어요. 다른 세대랑 긴 시간 함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거잖아요. 월남 다녀온 이야기를 그렇게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최: 원래는 별로 없는 거지. 묻지 않으니까. 군대 얘기하면 그런 걸 우리한테 말하냐 이런 식이지. 그러니까 얘기거리가 안 되는 거고, 이제 또 우리라도 참전에 대해 좋은 일만 있었다면 자랑삼아 얘기할 수도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러면 인제 그걸 이제 죄송한 얘기 좀 합시다. 그런 면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내 교육도 같이 해야 되지 않겠나. 나라에서는 뭐 한마디 없잖아.
참전군인 최홍희는 시민참여형 구술활동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프로그램에 함께한 후 구술 활동을 공유하는 자리, 아카이브평화기억이 주최하는 행사에 늘 함께해 주는 고마운 회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경험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묻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월남 얘기가 돈 얘기로만 흐르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구술활동 현장, 최홍희 참전군인과함께/사진 노랭
생각의 차이? 불편할 게 뭐 있어
석: 후원하시는 우리 단체 이름 아세요?
최: 글쎄 내가 봤는데 자세히 기억은 못하겠네.
석: 맞춰보세요. 후원까지 하시는데 이름은 아셔야죠.
최: 허허 생각 안 나.
석: 아카이브평화기억이에요. 아카이브는 기록보관소라는 뜻이고요.
최: 아이고 기억을 더듬어 주니까. 맞어. 이런 뜻이 맞어. 누가 이걸 잘 썼네. 이렇게 하는 게 없다 보니까 쉽지 않겠다 생각이 들었지. 나는 그래. 지금 하는 걸 보면 혼자 하는 게 쉽지 않다. 조직으로도 쉽지 않은 거고. 노력한 만큼은 나와야 하는데. 인제 나라도 어떤 걸 도와줄 수 있는지, 내가 도와주는 건 한계가 있고. 우리가 원래 해야 하는데. 나하고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할 일을 대신해 주는데 그러면 내가 안 해? 이제 뭐 너무 후원을 조금해서 할 말이 없지만. 하하.
석: 근데 선생님 저랑 대화하면서 느끼셨겠지만,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좀 다르잖아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그거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최: 불편할 게 뭐 있어.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거는 자기 위치에 따라서 생각이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석: 그렇다면 선생님은 저희의 생각도 이해를 해주고 계신 거네요.
최: 아니 이해 안 하면 어쩔 거야. 뭐든지 잘못된 게 있으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밝혀야지. 죽고 나면 게임 끝이야. 그러니까 그게 쉬운 건 아니잖아. 인제 좀 월남 갔다 왔던 전우들을 위해서 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나중에 역할이라도 잘해 놓으면 좋은 거 아니냐 이거지.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제발전 했는지 몰라. 젊은 세대들에게 그 역사를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해. 이제 우리 국가도 참전 노병들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고 남은 인생 웃으며 살게 해주면 좋겠어.
2023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구술 활동 공유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참전군인 최홍희
참전군인 최홍희와 5년 전 우연히 만났다.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텐데 인연을 이어준 것은 카톡이었다. 그는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가수 나훈아는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야’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며 사랑마저 카톡으로 전하는 카톡이는 세상이라는 푸념을 했는데, 나는 오히려 카톡으로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길게 만났고, 지난해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다른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소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이야기, 그를 만난 이들의 이야기, 참전군인 최홍희의 이야기는 조만간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오늘도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아침 인사를 담은 카톡이 온다. 카톡!
인터뷰 글 석미화
사진 석미화, 안지혜, 노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