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 사람 함정희를 만났다. 그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에서 활동하는 환경운동가이자 아카이브평화기억 회원이다. 지난해에는 시민참여형 참전군인 구술활동에 함께하며 참전군인을 만난 이야기를 글로 쓰고 공유회 자리(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 공유회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에서 발표도 했다. 1년의 시간은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한 해가 끝날 무렵, 광화문에서 만나 탄핵 집회에 목소리를 보탠 후 익선동 까페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2024년 12월 28일 광화문 탄핵집회에서
[현장] 시민참여형구술활동 공유회
석미화
한강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소개해 주세요.
함정희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은 2018년 8월 선유도에서 창립하여 한강 곳곳에서 생태를 복원하고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강둑에 가두거나, 따로 흐르는 강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흐르는 생명의 한강, 새와 물고기가 같이 살고 수달이 헤엄칠 수 있도록 강줄기 따라 초록의 숲이 어우러진 한강, 모래톱에서 아이들과 같이 즐겁게 노는 한강, 그런 한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환경 운동을 해왔던 분이 대표를 맡고 있어요. 지금은 여의샛강 생태공원, 생다진천, 중랑천 그리고 여주와 고양에 지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이 강답게 흐르고 강과 더불어 시민이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석미화
생태 속에서 문화를 확산하고 만들어가는 게 한강의 주요한 사업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함정희
네 맞아요. 청계천하고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 그 두 물이 만나서 본류로 가는 곳에 우리가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양서류나 파충류가 없는 거예요. 개구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양서류 파충류는 먹이 사슬의 중간 단계에 있는 생물인데 이게 없으니까 생물 다양성이 많지 않은 거죠. 근데 거기에 수달이 살고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수달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을 했어요.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연못도 파 놨어요. 그랬는데 여기에 놀랍게도 맹꽁이가 들어오고 청개구리가 들어와서 서식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맹꽁이가 나타난 덕분에 여길 개발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의 활동은 생물다양성을 통해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개발 논리로 쉽게 강과 땅을 파헤칠 수 없도록 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곳이 많이 알려졌고 1년 뒤에는 원앙도 나타났어요. 여기가 서울에 있는 철새보호구역 세 군데 중 두 군데가 모여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은 이곳에 철새 보호구역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리고 어떻게 철새를 보호하는지도 모르고요. 그런 것들에 대해 인식을 개선하는 캠페인도 벌여요. 원앙 축제를 열어서 철새 보호 구역이라는 것도 알리고. 점점 홍보가 되면서 기관의 협조를 끌어내면 어느 정도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생태 문화 프로그램도 열심히 준비해서 진행했어요. 시민을 양성해서 활동가를 키워내기도 하고요.
석미화
언제부터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함정희
글쎼...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시골 정서가 있어서 그런가. 그냥 자연이 좋더라고요.
석미화
자연을 좋아하는 것과 일로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함정희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는데, 직접 현장에서 이런 걸 보면서 마음들이 자꾸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공존이라든지 생태적 감수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에 관심갖게 되고, 또 그것이 파괴되는 것에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기도 하고요. 계속 이 길을 걷다 보니까 되돌아가지는 못하겠고, 좀 더 발전시키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종교가 있어요. 늘 그런 기도를 늘 해요. 내가 하는 일을 사업과 일로서만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 교회에서는 인사를 할 때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해요.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향한 걸음을 걸어라, 하나님의 은총에 이끌리어 살자, 내 주위를 돌아보고 약자의 편에 서서 평화를 위한 걸음을 걸으라고 하죠. 사실 그런 마음이 있지만 어느 순간에 일을 하다 보면 성과 중심이고 하다 보면 또 까맣게 잊고 막 해치우곤 해요. 그랬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교회에 가서 그런 초심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요.
석미화
2024년은 생명과 평화를 함께한 한 해였네요.
함정희
아 그런가요? 설마요. 제가 말로는 그렇게 했어도 그렇게 살았을까요?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참전군인 구술활동에 함께 했잖아요. 참여하고 나니 어떠신가요? 지난해 말에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아요.
함정희
난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한 불편함이 아직도 있어요.
석미화
지난해 구술 활동 후기로 쓴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몇 년 전 작업했던 「일곱 시」 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잖아요.
몇 해 전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웹툰을 작업한 적이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베트남전에 대한 여러 자료와 강연을 들은 후 나는 팜티호아 할머니 일생을 담은 이야기를
작업했다. 베트남 한국군 피해자들은 한국 군인들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했다.
내 기억은 그렇게 월남 참전 한국 군인들의 이야기를 베트남 피해자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베트남 피해자의 시선으로 먼저 한국군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월남전 참전군인들에 대해 선입견을 품고 있었고 그 시선으로 구술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정OO 어르신의 편향된 생각과 나와 상충하는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했다.
반면에 정OO 어르신은 나를 거부감 없이 받아 주실까 걱정도 했다.
이렇게 구술작업은 시작되었다.
함정희, 구술공유회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 자료집 중에서
함정희
그냥 솔직한 것뿐이에요. 내가 느꼈던 것을 그냥 다 얘기한 것뿐이에요. 참전군인 어르신을 소개만 하려다가 나도 그냥 구술 작업을 한번 해볼까 이런 마음에서 글도 쓰고 배워보고 싶었으니까요. 이걸 계기로 뭐라도 하나를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했는데 역시나 일에 치이면서 소홀할 수밖에 없고 집중을 못하는구나 느꼈고. 그 과정에서도 참전군인을 만나는데 내가 확증 편향적인 사람이었구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석미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함정희
그러니까 참전군인을 가해자로서만 보고 생각을 했고. 왜냐하면 처음 만난 것이 베트남 하미마을 팜티호아의 삶이었잖아요. 그 작업을 하며 계속 피해자 입장으로만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참전군인은 다 가해자성이 있는 사람들이겠구나 생각하고 만났는데.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어르신이 가진 반공사상이나 시대에 뒤틀린 삶들이 보이잖아요. 그러면서 저분도 하나의 피해자로 보게 된 거죠. 참전군인 어르신이 이야기하는 내내 전쟁 경험을 뿌듯하게 생각하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모습, 우리 삼촌 같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저 삶도 모순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모두가 국가 권력의 피해자가 아닌가. 이용당한 사람들인 것이지. 이분들 하나하나를 가해자로만 보면 안 되겠구나 생각을 했고. 이제 그게 활동 후반에는 어떤 느낌이었냐면 내가 어떤 표현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참 나쁘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삼촌의 삶도 보게 되면서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는 마음이 아팠지요. 이게 내 이야기로 생각하니까 더 아픈 거야. 팜티호아든, 참전군인 어르신이든, 삼촌이든.
석미화
「일곱 시」 책 작업을 하며 베트남 하미마을 이야기를 열심히 물어봤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왜 삼촌을 떠올리지 않았어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함정희
그때는 우리 삼촌도 그냥 참전했던 사람이야 라고 했는데. 거기까지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삼촌은 집에 못 오고 매일 밖으로 맴맴 돌고 마지막에 죽음 소식만 알려 왔어요. 차라리 내가 만난 참전군인 어르신처럼 그냥 빨간 모자 쓰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그냥 오히려 더 잘 살았을 것 같은데 왜 혼자 저러고 살았을까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때는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했어요. 참전군인 어르신 이야기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죠. 삼촌은 어떻게 월남을 가게 됐지? 그때도 외가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경제적인 거를 삼촌이 해결하려고 갔던 모양인데. 나중에 언니가 해 준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벌어온 돈은 둘째 삼촌이 썼다고 해요.
석미화
삼촌이 몇 명이에요?
함정희
순서는 모르겠는데 큰삼촌, 엄마, 둘째 삼촌, 그다음에 막내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거죠.
석미화
그 책 「일곱 시」에 그림을 그릴 때와 지금은 뭐가 달라졌어요?
함정희
그때는 사실 삼촌에 대해서 깊이 생각 안 했지만 참전군인 어르신 만나고서는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거지만 오버랩이 됐어요. 그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어르신은 되게 자신감 있고, 그리고 모임도 하고 어디에서 회장직도 맡고 어쨌든 당당하게 살아가시잖아요. 근데 삼촌은 정반대였거든요. 그런데서부터 느껴지는 거죠. 그때 삼촌이 그랬던 게 이래서였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바쁜 중에도 뭔가 연결점을 갖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뭔가 이렇게 만드신 건가 싶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이제는 삼촌들도 다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 계신데 외삼촌 얘기를 물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세요. 얘기해 줄 사람도 이제 없는데 그나마 삼촌의 그 죽음이 억울했는지 나한테 오셔서 좀 기억해 주라고 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죠. 좀 마음이 아팠어요. 그 과정에서 나한테는 삼촌 생각이 많이 떠올랐어요.

후원회원 함정희와 구술활동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석미화
앞으로 활동을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함정희
장담은 못하겠지만 참전군인 중에 또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어요.
석미화
이번에 구술활동에 참여하며 여러 관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책을 만들었던 그때 당시에는 팜티호아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봤다면 지금은 삼촌의 눈과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의 눈으로도 전쟁을 바라보게 된 거잖아요. 저는 사람이 더 넓고 깊게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달려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함정희
나한테는 그런 생태적인 감수성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아 평화에 대한 공부는 나름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근데 그게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스며들어 진정성 있게 생명과 평화를 말하고 싶거든요. 좋은 경험으로 남은 것 같아요. 근데 나는 아직도 이게 얼떨떨한 부분도 있는데. 내가 이거 잘한 거야? 제대로 한 거야 제대로 좀 할 걸 이런 후회가 있어요.
석미화
이 활동이 대단한 연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활동을 하면서 다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만났을 때 그 존재로부터 내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라고 봐요. 그랬을 때 선생님이 생각할 수 있는 걸 생각했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예전에 만든 웹툰 책 「일곱 시」 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삼촌을 떠올리고, 내가 만난 참전군인에 대해 생각한거죠. 아까 확증 편향에 대해 얘기했는데 만약 확증 편향에 매몰돼 있는 사람이라면 귀를 닫지 않았을까요?
함정희
그것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참전군인 어르신이 나한테 (전도코인에 대한) 문자를 보냈을 때,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해 버렸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걸 받아주고 싶고 그러니까
석미화
조금은 이해하게 됐으니까. 동의하지 않지만.
함정희
그렇죠.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하게 된 거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몇 해 전 작업했던 「일곱 시」 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전쟁으로 소박한 일상이 파괴되고 무거운 삶을 감내하며 살아간 민간인학살의 피해자
팜티호아의 삶도 다시 보았다. 정훈병으로 참전해 누구보다도 뛰어난 정리와 기록을 남기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삶을 살아가시는 정OO 어르신 삶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가족의 품으로도 돌아오지 못하고 혼자 쓸쓸한 생을 마친 외삼촌의 삶도
생각해보았다. 모두 다른 삶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가 폭력에 내몰렸던 사람들이고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 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어딘가 모순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세 사람의 삶으로 알게 되었다.
몇 번을 쓰고 지우며 그래도 제출해야 하는 시간에 나의 구술작업이 왜 필요했는지 조금 더 깨닫는다.
기록은 기억이고 또 나의 몫이라는 것을.
함정희, 구술공유회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 자료집 중에서
사진·인터뷰·글 석미화
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 사람 함정희를 만났다. 그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에서 활동하는 환경운동가이자 아카이브평화기억 회원이다. 지난해에는 시민참여형 참전군인 구술활동에 함께하며 참전군인을 만난 이야기를 글로 쓰고 공유회 자리(아카이브평화기억 구술활동 공유회 ‘그의 전쟁 가방을 열다’)에서 발표도 했다. 1년의 시간은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한 해가 끝날 무렵, 광화문에서 만나 탄핵 집회에 목소리를 보탠 후 익선동 까페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2024년 12월 28일 광화문 탄핵집회에서
[현장] 시민참여형구술활동 공유회
석미화
한강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소개해 주세요.
함정희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은 2018년 8월 선유도에서 창립하여 한강 곳곳에서 생태를 복원하고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강둑에 가두거나, 따로 흐르는 강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흐르는 생명의 한강, 새와 물고기가 같이 살고 수달이 헤엄칠 수 있도록 강줄기 따라 초록의 숲이 어우러진 한강, 모래톱에서 아이들과 같이 즐겁게 노는 한강, 그런 한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환경 운동을 해왔던 분이 대표를 맡고 있어요. 지금은 여의샛강 생태공원, 생다진천, 중랑천 그리고 여주와 고양에 지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이 강답게 흐르고 강과 더불어 시민이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석미화
생태 속에서 문화를 확산하고 만들어가는 게 한강의 주요한 사업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함정희
네 맞아요. 청계천하고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 그 두 물이 만나서 본류로 가는 곳에 우리가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양서류나 파충류가 없는 거예요. 개구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양서류 파충류는 먹이 사슬의 중간 단계에 있는 생물인데 이게 없으니까 생물 다양성이 많지 않은 거죠. 근데 거기에 수달이 살고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수달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을 했어요.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연못도 파 놨어요. 그랬는데 여기에 놀랍게도 맹꽁이가 들어오고 청개구리가 들어와서 서식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맹꽁이가 나타난 덕분에 여길 개발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의 활동은 생물다양성을 통해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개발 논리로 쉽게 강과 땅을 파헤칠 수 없도록 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곳이 많이 알려졌고 1년 뒤에는 원앙도 나타났어요. 여기가 서울에 있는 철새보호구역 세 군데 중 두 군데가 모여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은 이곳에 철새 보호구역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리고 어떻게 철새를 보호하는지도 모르고요. 그런 것들에 대해 인식을 개선하는 캠페인도 벌여요. 원앙 축제를 열어서 철새 보호 구역이라는 것도 알리고. 점점 홍보가 되면서 기관의 협조를 끌어내면 어느 정도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생태 문화 프로그램도 열심히 준비해서 진행했어요. 시민을 양성해서 활동가를 키워내기도 하고요.
석미화
언제부터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함정희
글쎼...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시골 정서가 있어서 그런가. 그냥 자연이 좋더라고요.
석미화
자연을 좋아하는 것과 일로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함정희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는데, 직접 현장에서 이런 걸 보면서 마음들이 자꾸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공존이라든지 생태적 감수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에 관심갖게 되고, 또 그것이 파괴되는 것에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기도 하고요. 계속 이 길을 걷다 보니까 되돌아가지는 못하겠고, 좀 더 발전시키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종교가 있어요. 늘 그런 기도를 늘 해요. 내가 하는 일을 사업과 일로서만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 교회에서는 인사를 할 때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해요.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향한 걸음을 걸어라, 하나님의 은총에 이끌리어 살자, 내 주위를 돌아보고 약자의 편에 서서 평화를 위한 걸음을 걸으라고 하죠. 사실 그런 마음이 있지만 어느 순간에 일을 하다 보면 성과 중심이고 하다 보면 또 까맣게 잊고 막 해치우곤 해요. 그랬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교회에 가서 그런 초심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요.
석미화
2024년은 생명과 평화를 함께한 한 해였네요.
함정희
아 그런가요? 설마요. 제가 말로는 그렇게 했어도 그렇게 살았을까요?
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참전군인 구술활동에 함께 했잖아요. 참여하고 나니 어떠신가요? 지난해 말에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아요.
함정희
난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한 불편함이 아직도 있어요.
석미화
지난해 구술 활동 후기로 쓴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몇 년 전 작업했던 「일곱 시」 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잖아요.
함정희
그냥 솔직한 것뿐이에요. 내가 느꼈던 것을 그냥 다 얘기한 것뿐이에요. 참전군인 어르신을 소개만 하려다가 나도 그냥 구술 작업을 한번 해볼까 이런 마음에서 글도 쓰고 배워보고 싶었으니까요. 이걸 계기로 뭐라도 하나를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했는데 역시나 일에 치이면서 소홀할 수밖에 없고 집중을 못하는구나 느꼈고. 그 과정에서도 참전군인을 만나는데 내가 확증 편향적인 사람이었구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석미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함정희
그러니까 참전군인을 가해자로서만 보고 생각을 했고. 왜냐하면 처음 만난 것이 베트남 하미마을 팜티호아의 삶이었잖아요. 그 작업을 하며 계속 피해자 입장으로만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참전군인은 다 가해자성이 있는 사람들이겠구나 생각하고 만났는데.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어르신이 가진 반공사상이나 시대에 뒤틀린 삶들이 보이잖아요. 그러면서 저분도 하나의 피해자로 보게 된 거죠. 참전군인 어르신이 이야기하는 내내 전쟁 경험을 뿌듯하게 생각하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모습, 우리 삼촌 같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저 삶도 모순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모두가 국가 권력의 피해자가 아닌가. 이용당한 사람들인 것이지. 이분들 하나하나를 가해자로만 보면 안 되겠구나 생각을 했고. 이제 그게 활동 후반에는 어떤 느낌이었냐면 내가 어떤 표현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참 나쁘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삼촌의 삶도 보게 되면서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는 마음이 아팠지요. 이게 내 이야기로 생각하니까 더 아픈 거야. 팜티호아든, 참전군인 어르신이든, 삼촌이든.
석미화
「일곱 시」 책 작업을 하며 베트남 하미마을 이야기를 열심히 물어봤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왜 삼촌을 떠올리지 않았어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함정희
그때는 우리 삼촌도 그냥 참전했던 사람이야 라고 했는데. 거기까지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삼촌은 집에 못 오고 매일 밖으로 맴맴 돌고 마지막에 죽음 소식만 알려 왔어요. 차라리 내가 만난 참전군인 어르신처럼 그냥 빨간 모자 쓰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그냥 오히려 더 잘 살았을 것 같은데 왜 혼자 저러고 살았을까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때는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했어요. 참전군인 어르신 이야기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죠. 삼촌은 어떻게 월남을 가게 됐지? 그때도 외가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경제적인 거를 삼촌이 해결하려고 갔던 모양인데. 나중에 언니가 해 준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벌어온 돈은 둘째 삼촌이 썼다고 해요.
석미화
삼촌이 몇 명이에요?
함정희
순서는 모르겠는데 큰삼촌, 엄마, 둘째 삼촌, 그다음에 막내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거죠.
석미화
그 책 「일곱 시」에 그림을 그릴 때와 지금은 뭐가 달라졌어요?
함정희
그때는 사실 삼촌에 대해서 깊이 생각 안 했지만 참전군인 어르신 만나고서는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거지만 오버랩이 됐어요. 그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어르신은 되게 자신감 있고, 그리고 모임도 하고 어디에서 회장직도 맡고 어쨌든 당당하게 살아가시잖아요. 근데 삼촌은 정반대였거든요. 그런데서부터 느껴지는 거죠. 그때 삼촌이 그랬던 게 이래서였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바쁜 중에도 뭔가 연결점을 갖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뭔가 이렇게 만드신 건가 싶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이제는 삼촌들도 다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 계신데 외삼촌 얘기를 물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세요. 얘기해 줄 사람도 이제 없는데 그나마 삼촌의 그 죽음이 억울했는지 나한테 오셔서 좀 기억해 주라고 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죠. 좀 마음이 아팠어요. 그 과정에서 나한테는 삼촌 생각이 많이 떠올랐어요.
후원회원 함정희와 구술활동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석미화
앞으로 활동을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함정희
장담은 못하겠지만 참전군인 중에 또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어요.
석미화
이번에 구술활동에 참여하며 여러 관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책을 만들었던 그때 당시에는 팜티호아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봤다면 지금은 삼촌의 눈과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의 눈으로도 전쟁을 바라보게 된 거잖아요. 저는 사람이 더 넓고 깊게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달려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함정희
나한테는 그런 생태적인 감수성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아 평화에 대한 공부는 나름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근데 그게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스며들어 진정성 있게 생명과 평화를 말하고 싶거든요. 좋은 경험으로 남은 것 같아요. 근데 나는 아직도 이게 얼떨떨한 부분도 있는데. 내가 이거 잘한 거야? 제대로 한 거야 제대로 좀 할 걸 이런 후회가 있어요.
석미화
이 활동이 대단한 연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활동을 하면서 다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만났을 때 그 존재로부터 내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라고 봐요. 그랬을 때 선생님이 생각할 수 있는 걸 생각했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예전에 만든 웹툰 책 「일곱 시」 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삼촌을 떠올리고, 내가 만난 참전군인에 대해 생각한거죠. 아까 확증 편향에 대해 얘기했는데 만약 확증 편향에 매몰돼 있는 사람이라면 귀를 닫지 않았을까요?
함정희
그것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참전군인 어르신이 나한테 (전도코인에 대한) 문자를 보냈을 때,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해 버렸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걸 받아주고 싶고 그러니까
석미화
조금은 이해하게 됐으니까. 동의하지 않지만.
함정희
그렇죠.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하게 된 거죠.
사진·인터뷰·글 석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