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산과 마을길, 보도블럭 사이에도 푸른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평화우체국에도 봄바람이 분다. 이번 호에 우리 단체 후원회원 이야기로 봄소식을 전한다. 첫 번 째 주인공은 ‘교육공동체 벗’ 편집자 풀씨다.
‘풀씨’는 ‘두루두루 특별하지 않은 풀잎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멋진 별명이다. 성미산마을 카페 베로키오에서 풀씨를 만났다.
풀씨는 농사를 학교 교육에 접목해 생태 전환을 꿈꾸고, 개인의 삶에도 생태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농’에 관심 갖고 활동하고 있다.
흙을 좋아해요?
노랭 안녕하세요! 여러 현장에서 풀씨를 많이 만나뵈었는데 이렇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처음인 것 같아요. ‘평화우체국’ 소식지를 보시는 분들께 풀씨를 소개해 주세요!
- 풀씨 그렇죠. 참 어렵네요. 늘 소개 하는 문구로 소개할게요. 교육 전문지 ‘오늘의 교육’을 만드는 ‘교육공동체 벗’ (이하 ‘벗’)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는 풀씨입니다. (웃음)
노랭 벗에서는 오늘의교육을 발행하며 다양한 이슈를 다룬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카이브평화기억에서 활동하며 ‘오늘의교육’에 글을 싣기도 했는데요. 평소에도 다양한 사회 이슈를 찾아보거나 만나시나요? 풀씨의 관심사도 궁금해요!
- 풀씨 개인의 관심사나 영역은 어쨌든 한계가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벗에서도 사무국에서 일하는 분들이 저마다 다양하니까 그분들을 통해 다양한 의제가 모여요. 다만 벗은 교육 전문이니까. 교육을 내세워서 베트남전쟁도 그렇고 또 소수자 문제, 동물권, 제도 그 밖에 여러 가지들을 다루죠. 저의 관심사는 지금은 교육농이에요. 교육농이란 농사를 통해서 학교 교육을 바꿔보려는 시도예요. 학교에서 텃밭을 하면서 텃밭을 통해서 생태적 감성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 자체를 생태적으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들을 밟아가는 것에 가장 크게 관심을 둔다고 하고 있죠. 그래봐야 별건 없어요. 주말에 농장에 가서 같이 모이는 초등 중등 교사분들과 농사짓고, 교육농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생태적 삶에 대해 고민하고, 학교 텃밭에 모여서 학생들하고 같이 즐겁게 농사짓고 요리해 먹기도 해요. 이것도 역시 관계라서 농사를 짓는 작물과 흙 속에도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있잖아요. 모든 존재들이 생명을 이루고 흙을 만들어내고 또다시 생명을 피워내니까요.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무언가를 해치게 될 수는있지만 최소화시켜 나가면서 공존, 공생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농사를 짓는 게 중요하죠.
- 풀씨 좋죠. 근데 직업적으로 교사는 교육이라는 농사를 짓지만 이게 개인의 삶으로 보면 또 다른 것 같아요. 우리는 생물적으로 늙어가잖아요. 이런 흐름과 또 잘 맞는 게 농사이기도 해요. 한참 에너지가 왕성할 때는 ‘흙 따위’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나이 먹어가면 구수한 흙 냄새를 맡으면서 막 기운을 얻고 작은 생명들을 키워가면서 보람을 느끼고 하니까요. 그래서 치유 정원이라든가 또는 실버 정원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은 해요. 노랭은 이제 막 거기서 기운을 얻진 않겠죠?
노랭 저도 흙은 좋아해요. 아직 젊지만.(웃음) 조금 더 본격적으로 질문을 드려볼게요. 우리 단체는 베트남전쟁의 기억과 역사를 매개로 평화 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풀씨는 베트남전쟁 이슈에 대해 관심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 풀씨 연두(석미화 대표)와의 인연이 있었어요. 언제 만났더라, 베트남 평화기행을 갔다 오고 나서 청와대 앞에서 일인 시위할 때가 있었어요. 일인시위를 참여하면서 연두를 만나고 그다음에 ‘교육공동체 벗’ 회원들과의 평화기행을 1년 동안 함께 준비하기도 했죠. 주로 공부 모임을 했어요. 그리고 베트남을 다녀왔죠. 4박5일 다녀왔나. 기행을 다녀오면서는 그 생각을 했어요. 피해자분들도 1년 동안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텐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나는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하미 위령비에 연꽃 그려진 데 거기에 보면서 나와 동년의 갓난아이들 이름이 적혀있었어요. 나는 운이 좋아서 한국에 태어났지 사실 어린 나이 때는 뭐 아무것도 모르는 거니까요. 운이 좋아서 살아 남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사실 우리 한국의 역사도 그렇고 이후에 벌어지는 참사도 있잖아요. 청년들도 다 운이 좋아서 살아난 사람들이구나 싶어요.
나는 운이 좋았죠
노랭 맞아요. 일상적인 공간에서 참사가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운으로 이렇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현실이 맞나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전의 풀씨의 활동과 아카이브 평화기억 단체의 활동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크게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의제들도 조금은 다르고요. 그랬을 때 풀씨는 어떻게 우리 단체를 후원하게 되셨나요?
- 풀씨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의 확장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배우는 것 같아요. 친구 사귀는 것도 같아요. 좋은 친구랑 사귀게 되고 또 친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하는 거죠. 거기에 동의를 하면 시간을 같이 할 수 있을 때 같이 하는 거고,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해요. 연두와 이야기를 나누면 과거의 과오를 기억하고 그때 피해자들의 배상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규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풀리지 않는 것도 있긴 했거든요. 참전군인 류진성 선생님이 재판에서 이야기를 하셨었잖아요. 우리는 참전한 군인들을 결론적으로 ‘국가폭력의 피해자’라는 연구 용어로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주위에도, 노랭 주위에도 계신 분들인 거예요. 이분들이 베트남을 다녀와서 그 얘기를 평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셨는데 왜 그랬을까? 이분들의 삶에서 참전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분들의 인생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소위 ‘가스통 할배’ 이렇게만 바라봤던 것들에서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제 연두가 고민했던 것이 나한테 다가오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또 참전군인은 전투 현장에서는 살인자였지만 사실은 그렇게 만든 세력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돌봐주려 하지 않았어요. 미국은 트라우마 센터에서 군인들의 멘탈을 보살폈다는데 한국은 그런 지원이 없었으니 갔다 왔던 분들이 엄청나게 왜곡된 경로로 나이를 먹겠구나 생각이 드는 거예요. 보살핀다라는 말이 정확할까 모르겠네요. 그들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평화의 방향으로 국민들의 경험을 변환해내는 그런 과정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연두가 단체 활동을 통해서 그걸 이어서 간다고 했을 때 저는 꼭 필요한 활동이다라고 생각을 했죠. 기록해내는 일들이 아직까지는 없어서 그부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응원하는 거죠.
노랭 맞아요. 우리 곁에 있죠. 저는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기도 한데요, 풀씨의 장인 어른이 참전군인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풀씨 이게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닌 거예요. 장인어른이 월남에 다녀왔다는 말씀을 하셨어도 ‘어 다녀오셨구나’ 그냥 흘려 듣는 거지 궁금해하진 않았어요. 아마 지금 얘기를 들었으면 꼬치꼬치 캐묻고 이야기도 더 나눠봤을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던 거죠.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오고, 일인시위도 하고, 피해자 손해 배상 문제도 보고, 참전군인 이야기도 듣는 과정을 통해 장인어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참 안타깝다 생각을 하죠. 제가 이런 생각을 하지만 아내는 "아버지가 이야기해줬을 것 같아? " 절대 안 해주셨을 거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웃음). 그럴수록 얘기를 듣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카이브평화기억도 구술을 듣는 작업이 보통 작업이 아니겠다 생각해요. 작년에 1년 과정에서 참 애썼겠다. 힘들었겠다. 사람 만나는 것이 상대방 태도에 따라 다르고 그분들의 숨어있는 감정 기복이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어렵죠. 계속 어렵긴 하겠다 생각이 들어요.
노랭 그렇죠. 그리고 시간적인 한계도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 2월에 열린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공유회 때 오셨잖아요. 우리 단체에서 2022년도에 익산 금마 초등학교 졸업생 중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났어요. 활동을 마무리하고 난 후 1년 넘어 올해 초 쯤에 다시 찾아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건강하고 활기차게 종일 얘기해 주셨던 어르신이 다시 뵈니 건강이 많이 나빠지신 거예요. 잠깐 만나는 것도 힘들어하시고 그래서 되게 마음이 안 좋았어요. 1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구나. 시간이 되게 체감되기도 하고 지금 참전 군인분들의 나이대와 상황이 느껴지더라고요.
- 풀씨 그러니까요. 이게 참 그런데 그나마 몇 번이라도 만나서 얘기 듣는 게 다행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노랭 할아버지 얘기를 들은 건 정말 다행이에요. 장인어른은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이 되셨는데 일찍 쓰러지셨어요. 60살 환갑 때 쓰러지셔서 10년 앓다 돌아가셨죠. 근데 띄엄띄엄 들은 이야기는 베트남에 갔는데 당신이 행정병으로 갔고, 그래서 그런 거 잘 모른다, 그래서 고엽제 피해 받은 것도 없다고 하셨어요. 근데 모르는 거죠. 알 수가 없어.
응원해요. 인간의 마음으로
노랭 맞아요. 알 수가 없어요. 풀씨는 우리 단체에서 주최한 구술 공유회, 상영회 등 회원 행사에 많이 발걸음 해 주시잖아요. 그런 자리를 준비하고 난 이후의 얘기를 들을 기회는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 풀씨 응원하는 거죠. 그렇잖아요. ‘우리가 발표하니까 와주세요’ 그러면 그 자리에 가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말만 안 시키면 돼요(웃음). 별 건 없어요. 당신들이 열심히 했으니 인간의 마음으로 응원하러 가요. 어쨌든 여력이 돼서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은 거죠.
노랭 어떠세요? 풀씨가 제일 처음 오셨던 공유회는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중간 발표회 였을까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나 생각이 있으시면 공유해 주세요!
- 풀씨 이것 자체가 그냥 처음 활동이라서 활동의 방향이 만들어 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단체의 활동들이 모여지면 ‘이렇게 가면 되겠구나’ 하는 길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연구자들이야 길을 정해놓고 가지만 지금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려고 애쓰는 거잖아요. 그것을 나누기 위해 중간 발표를 하는 과정들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을 하며 공유회에 가요. 그런데도 꾸준하게 1년 동안 노력을 해서 발표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이 들죠. 그런 점에서 발표회에 가는 게 응원인 거고, 그리고 그게 작년, 올해, 내년 이렇게 쌓이게 되면 앞으로의 방향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노랭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 활동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해 주세요.
- 풀씨 제가 생각할 때에는 어쨌든 기록이라는 것은 의미를 부여해서 의미의 두께를 쌓아 올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 횟수가 얼마 안 돼서 얇지만, 단체가 오래 활동하다 보면 의미가 계속 두텁게 쌓여갈 수 있고 두께만큼 나눌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지리라고 생각을 해요. 다만 이제 이 작업 자체가 물리적인 한계가 있고 또 과정도 어렵기에 늘 순탄치만은 않을 텐테요. 순탄치 않을 때는 언제든지 회원들한테 도움을 요청하세요. 회원들 중에서 도울 수 있는 이들도 있고, 그러다보면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앞으로 기록에 두께를 잘 만들어 가자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2024.03.18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베로키오 카페에서 풀씨와 노랭
기대와 긴장, 반반의 마음으로 시작한 인터뷰였지만, 마치고 나니 활동에 대한 응원을 가득 받은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풀씨가 아카이브평화기억이 마련한 자리에 함께하는 마음이 ‘응원’의 마음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풀씨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시각을 달리 또 다양하게 해야 할 필요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군인을 보살피지 않은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나누어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풀씨의 이야기에 나 또한 공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가스통할배’와 ‘가족’이라는 분리된 참전군인의 이미지 속에서 괴리를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곱씹어보다 보니 그렇다면 가족과 연관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얘기’로 참전군인을 만나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참전군인과의 만남은 역사적, 사회적인 맥락이 존재하기에, ‘가족’과의 연결고리로만 만날 수 있는 의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다양한 위치와 당사자성 아래 우리 활동과 연결된 이들의 이야기를 두루 만나고 싶다. 앞으로 지속되는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풀씨와의 만남은 나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남겼다. 더불어 즐겁고 유쾌한 만남이었기에 인터뷰 현장의 비언어적인 분위기를 담을 수 없어 아쉬움이 든다. 글자에 담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인터뷰 글 노랭
봄이다. 산과 마을길, 보도블럭 사이에도 푸른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평화우체국에도 봄바람이 분다. 이번 호에 우리 단체 후원회원 이야기로 봄소식을 전한다. 첫 번 째 주인공은 ‘교육공동체 벗’ 편집자 풀씨다.
‘풀씨’는 ‘두루두루 특별하지 않은 풀잎들’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멋진 별명이다. 성미산마을 카페 베로키오에서 풀씨를 만났다.
풀씨는 농사를 학교 교육에 접목해 생태 전환을 꿈꾸고, 개인의 삶에도 생태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농’에 관심 갖고 활동하고 있다.
흙을 좋아해요?
노랭 안녕하세요! 여러 현장에서 풀씨를 많이 만나뵈었는데 이렇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처음인 것 같아요. ‘평화우체국’ 소식지를 보시는 분들께 풀씨를 소개해 주세요!
노랭 벗에서는 오늘의교육을 발행하며 다양한 이슈를 다룬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카이브평화기억에서 활동하며 ‘오늘의교육’에 글을 싣기도 했는데요. 평소에도 다양한 사회 이슈를 찾아보거나 만나시나요? 풀씨의 관심사도 궁금해요!
노랭 저도 흙은 좋아해요. 아직 젊지만.(웃음) 조금 더 본격적으로 질문을 드려볼게요. 우리 단체는 베트남전쟁의 기억과 역사를 매개로 평화 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풀씨는 베트남전쟁 이슈에 대해 관심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나는 운이 좋았죠
노랭 맞아요. 일상적인 공간에서 참사가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운으로 이렇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현실이 맞나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전의 풀씨의 활동과 아카이브 평화기억 단체의 활동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크게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의제들도 조금은 다르고요. 그랬을 때 풀씨는 어떻게 우리 단체를 후원하게 되셨나요?
노랭 맞아요. 우리 곁에 있죠. 저는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기도 한데요, 풀씨의 장인 어른이 참전군인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노랭 그렇죠. 그리고 시간적인 한계도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 2월에 열린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공유회 때 오셨잖아요. 우리 단체에서 2022년도에 익산 금마 초등학교 졸업생 중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났어요. 활동을 마무리하고 난 후 1년 넘어 올해 초 쯤에 다시 찾아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건강하고 활기차게 종일 얘기해 주셨던 어르신이 다시 뵈니 건강이 많이 나빠지신 거예요. 잠깐 만나는 것도 힘들어하시고 그래서 되게 마음이 안 좋았어요. 1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구나. 시간이 되게 체감되기도 하고 지금 참전 군인분들의 나이대와 상황이 느껴지더라고요.
응원해요. 인간의 마음으로
노랭 맞아요. 알 수가 없어요. 풀씨는 우리 단체에서 주최한 구술 공유회, 상영회 등 회원 행사에 많이 발걸음 해 주시잖아요. 그런 자리를 준비하고 난 이후의 얘기를 들을 기회는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노랭 어떠세요? 풀씨가 제일 처음 오셨던 공유회는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중간 발표회 였을까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나 생각이 있으시면 공유해 주세요!
노랭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 활동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해 주세요.
2024.03.18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베로키오 카페에서 풀씨와 노랭
기대와 긴장, 반반의 마음으로 시작한 인터뷰였지만, 마치고 나니 활동에 대한 응원을 가득 받은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풀씨가 아카이브평화기억이 마련한 자리에 함께하는 마음이 ‘응원’의 마음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풀씨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시각을 달리 또 다양하게 해야 할 필요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군인을 보살피지 않은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나누어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풀씨의 이야기에 나 또한 공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가스통할배’와 ‘가족’이라는 분리된 참전군인의 이미지 속에서 괴리를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곱씹어보다 보니 그렇다면 가족과 연관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얘기’로 참전군인을 만나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참전군인과의 만남은 역사적, 사회적인 맥락이 존재하기에, ‘가족’과의 연결고리로만 만날 수 있는 의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다양한 위치와 당사자성 아래 우리 활동과 연결된 이들의 이야기를 두루 만나고 싶다. 앞으로 지속되는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풀씨와의 만남은 나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남겼다. 더불어 즐겁고 유쾌한 만남이었기에 인터뷰 현장의 비언어적인 분위기를 담을 수 없어 아쉬움이 든다. 글자에 담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인터뷰 글 노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