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오경열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책 출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책에 담을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뒤로 1년 만이다. 긴 준비기간을 거쳐 인쇄가 2주 앞으로 다가오며 구술자와 원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그는 꼼꼼히 원고를 검토해 주었고, 회신한 원고는 이전 것보다 더 생생히 전장의 고통과 상처를 표현하고 있었다. 덧댄 의견에는 원치 않았던 전쟁 동원과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국가는 병사들의 의사와 선택의 기회를 박탈하고 달러를 버는 미국의 용병으로 전장에 보냈다. 살아서 돌아온 이후에도 국가는 전쟁터에서 겪었던 참전 병사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병사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책임지지 않는 데 대해 분노했다. 자신이 겪은 일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였다.
오경열은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월남을 다녀왔다. 만 18세가 되기 전 군에 입대하고, 신병훈련과 통신교육 후 자대배치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월남 차출 명령을 받았다. 원치 않은 파병이었다. 거부할 수 없이 떠밀려 간 전장에서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해 들었다. 참전군인과 전장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그 모든 서사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20사단 전방에 배치된 이후 병역을 마칠 때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제대하고서도 고통에서 헤어나는 일은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역 후 전쟁과 군대의 기억을 잊기 위해 고달픈 노동을 했고, 차츰 안정이 된 후에는 전기 기술을 배워 중동 건설 현장에 가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에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투옥과 고문으로 고초를 겪고, 이후 평생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는다. 지금은 스스로를 자연인이라고 소개하는 오경열은 판소리를 가르치던 어머니를 따라 소리꾼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의 말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전쟁, 평화, 동원, 군대, 국가에 대한 생각은 한 사람의 참전군인이 갖고 있는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전쟁터의 병사가 갖는 마음이 되곤 한다.
책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너머에서 만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목소리』 에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2023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에서 말하고 들은 이들이 책의 주인공이다. 어쩌면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한 조각으로만 접했을 이야기가 온전히 여러 사람의 말과 귀와 손에서 탄생했다. 참전군인 오경열의 이야기도 그렇게 책에 담겨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난 후 22대 국회에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및 파병군인에 대한 인권침해 등 진실규명법’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이 법안은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하여 발생한 민간인 피해와 파병군인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고 우리 사회가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베트남전쟁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고자 추진하고 있는 법안이다. 나는 6월 19일에 열리는 국회토론회에 법안과 관련하여 ‘베트남전 파병군인의 전쟁 동원과 귀환 이후,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에 대한 발제를 준비하고 있다. 이 자리에 토론자로 함께해 그의 경험을 나눠줄 것을 제안했다. 참전군인 오경열은 여러 가지 요청에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곧이어 토론회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석미화
월남에 차출되어 가시게 된 거잖아요.
오경열
저는 그렇게 갔죠.
석미화
전쟁 동원에 대해서 사실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그 동원의 과정에 비자발적이고 강제의 방식이 있다고 하면 국가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같은 경우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동원이 되었고, 전쟁터에서 부조리를 겪었고, 되돌아왔을 때도 귀환 병사에 대한 배려나 관심 없이 극한의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선생님은 그 과정을 잘 극복하셨지만, 안타까운 경우도 많이 있고요.
오경열
자살한 사람이 많아요. 귀환병들 총기 사고가 많았어요. 그때 그런 부분들은 군에서 덮어버렸거든요. 다 사고사로.
석미화
전장에서도 ‘사고사’가 많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사고사’를 ‘전사’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는 거죠. 예우와 보상으로 덮어버리기엔 이건 명백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인 거죠. 생명을 잃었잖아요. 이제 와서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죠. 지금껏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 여러 사례를 많이 접했어요.
오경열
그분들은 이미 죽었고, 군에서 안는 부담이 크니까 전사로 돌리는 거죠. 맞아요.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다 전사자로 돌려서 왔을 거란 말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귀국하는 병사들이 포탄 분해 작업하다가 터져가지고 죽는 걸 봤거든요. 포탄을 분해하면 신주가 나와요. 그게 여기 가져오면 비싸게 팔리니까. 포탄을 분해하다가 폭발해서 죽고 그래요. 저는 그런 게 싫어서 그냥 더플백 하나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들고 왔어요. 저는 그랬지만 사람들이 귀국할 때 집에 뭐라도 하나 더 보탬 되는 걸 가져가려고 그러니까. 총을 일부러 쏴서 탄피 모으고 포탄 분해하고 그래가지고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만들어서 가져가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들도 있고 그래요. 굉장히 허망하게 죽은 거죠. 그런 것도 관리부실은 맞죠.
귀환병들 총기사고가 많았어요.
전장에서 허망하게 죽은 이들도 많아요.
석미화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관리부실로 발생한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거죠. 제가 들었던 사례는 훈련 중에 크레모아 스위치 박스를 연결하지 않고 모의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걸 연결한 채로 눌러버려서 다 죽었다고 해요. 제가 참전군인을 수백 명을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수십 명 수준에서 만났는데도 이런 얘기가 한없이 나옵니다.
오경열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이제 나도 기억이 자꾸 희미해져 가더라고요. 비전투병으로 참전한 사람들은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전투병들은 경험하거나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 뭐랄까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전부 다른 증언들이 나와요. 제 얘기를 해보면.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석미화
진실을 규명하는 게 지금에 와서 불가능한 일이 될지라도 전쟁 동원과 전쟁터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요.

오경열
팔레스타인 학살,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인명 경시 풍조가 너무 심해진 것 같아요. 지금 5만 3천 명 이상이 가자에서 학살됐는데, 가해자들에 대한 어떤 응징도 없고 또 거기에 대한 국제기구의 역할이 없어서 굉장히 가슴이 아파요.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하고 있는 행태가 너무 분노스러운 거죠. 재래식 전쟁에서도 그렇게 비참했는데, 요즘 같은 첨단 무기를 민간인들한테 사용하면서 무기 실험하고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조명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죠.
석미화
베트남전쟁은 과거의 전쟁이잖아요. 그 전쟁 얘기를 지금 가져와서 하는 의미는 결국은 지금도 일어나는 그런 전쟁들이 사라져야 되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거든요. 이 전쟁이 국가 발전이라든가 자유 수호라는 이데올로기적인 기억만 남아있다 보니까, 그렇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는 것을 얘기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민간인 학살 문제도 있을 것이고, 또 참전군인이 겪었던 전쟁 경험도 있을 것이고요. 우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런 얘기들을 길어 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경열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은 평화 운동을 해야 해요. 참전군인으로서 그러니까 이제 평화 운동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나서서 전 세계 전쟁 종식과 억압 이런 부분들에 대한 항의도 하고.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서 명예를 회복해야지.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평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전군인 안에도 더 많죠.
베트남 피해자분들에게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가 가슴아프게 바라보고
반성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해야죠.
석미화
오는 6월 중순에 국회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선생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가 참석하는 자리이니 만큼 참전군인이 자리하는 위치가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그 위치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민간인학살에 대해 성찰적 시각을 갖고 계시고, 전쟁 동원의 경험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 나누어주실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오경열
가해라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도착해서 행동을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이제 그 전쟁터의 한 일원이에요. 그렇기때문에 가해자일 수밖에 없죠. 참석하는 베트남 피해자분들에게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가 상당히 가슴 아프게 그 상황들을 바라보고 반성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긴 해야죠.
석미화
베트남 피해자분들이 참전군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될 거예요. 제가 토론회 현장에 대해 미리 말씀드려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들에게 참전군인 안에도 위로와 지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이제 곧 나올 책에 대해 어떤 바램이나 기대가 있으신가요?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너머에서 만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목소리』
(아카이브평화기억 기획, 2025년, 알록출판사)
세상에 나오다
오경열
(책이) 쉬웠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얘기들을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하기가 힘들거든요.
석미화
그게 가장 어려운 지점이에요.
오경열
근데 이 사람들(참전군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그대로 딱 그 틀 안에서 고정돼 있잖아요.
이제 우리들의 생각이나 표현들은 아주 미숙해요. 글을 써보지 않았고 표현대로 얘기를 하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의식은 상당히 우리 때보다 더 발전돼 있고 또 지능적으로 앞서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좀 걱정돼요.
석미화
제가 보기엔 그 간극을 메워주는 게 바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청자들한테 있다고 보거든요. 듣는 이들이 청년과 젊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의 시선도 이 안에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좀 더 공감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될 것 같아요.
2년 전 참전군인 오경열과 함께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며 ‘불빛’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다. 전시관 입구 정면에 펼쳐진 부산항 제3부두 수송선과 대대적인 환송식 사진 끄트머리에 눈길조차 닿지 않는 산동네를 가리키며 ‘불빛’으로 그 시대의 가난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좀 새롭습니다. 예에. 지금 53년 전 기억이라, 그때 당시 여기가 영도나 그 근처일 거예요. 그런데 너무 낙후됐잖아요. 당시에 다 산동네죠. 새벽에 도착하니까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 얼마나 화려한지. 너무너무 화려해요. 그래서 다들 넋이 빠지죠. 그냥 훈련만 받다가 와서 이런 걸 보니까. 동네에 전부 가로등 불빛 같은 게 조금씩 켜있는데 너무 산동네인 거죠. 그런 것들이 그 당시에 우리 현주소 같았어요. 우리나라의 가난한 현실이 그렇게 보이는 거죠. 배에서...”
그가 말하는 자리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가난과 전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활자와 사진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도를 가지고 있다. 독자들도 그의 온도를 책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책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램은 보다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세상으로 나올 책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마주한 이야기가 그렇게 끊임없이 세상을 만나길 기대해 본다.
인터뷰 글 석미화 / 사진 노랭
후원회원 오경열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책 출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책에 담을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뒤로 1년 만이다. 긴 준비기간을 거쳐 인쇄가 2주 앞으로 다가오며 구술자와 원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그는 꼼꼼히 원고를 검토해 주었고, 회신한 원고는 이전 것보다 더 생생히 전장의 고통과 상처를 표현하고 있었다. 덧댄 의견에는 원치 않았던 전쟁 동원과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국가는 병사들의 의사와 선택의 기회를 박탈하고 달러를 버는 미국의 용병으로 전장에 보냈다. 살아서 돌아온 이후에도 국가는 전쟁터에서 겪었던 참전 병사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병사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책임지지 않는 데 대해 분노했다. 자신이 겪은 일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였다.
오경열은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월남을 다녀왔다. 만 18세가 되기 전 군에 입대하고, 신병훈련과 통신교육 후 자대배치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월남 차출 명령을 받았다. 원치 않은 파병이었다. 거부할 수 없이 떠밀려 간 전장에서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해 들었다. 참전군인과 전장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그 모든 서사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20사단 전방에 배치된 이후 병역을 마칠 때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제대하고서도 고통에서 헤어나는 일은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역 후 전쟁과 군대의 기억을 잊기 위해 고달픈 노동을 했고, 차츰 안정이 된 후에는 전기 기술을 배워 중동 건설 현장에 가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에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투옥과 고문으로 고초를 겪고, 이후 평생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는다. 지금은 스스로를 자연인이라고 소개하는 오경열은 판소리를 가르치던 어머니를 따라 소리꾼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의 말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전쟁, 평화, 동원, 군대, 국가에 대한 생각은 한 사람의 참전군인이 갖고 있는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전쟁터의 병사가 갖는 마음이 되곤 한다.
책 『전쟁에 동원된 남자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너머에서 만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목소리』 에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2023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에서 말하고 들은 이들이 책의 주인공이다. 어쩌면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한 조각으로만 접했을 이야기가 온전히 여러 사람의 말과 귀와 손에서 탄생했다. 참전군인 오경열의 이야기도 그렇게 책에 담겨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난 후 22대 국회에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및 파병군인에 대한 인권침해 등 진실규명법’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이 법안은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하여 발생한 민간인 피해와 파병군인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고 우리 사회가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베트남전쟁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고자 추진하고 있는 법안이다. 나는 6월 19일에 열리는 국회토론회에 법안과 관련하여 ‘베트남전 파병군인의 전쟁 동원과 귀환 이후,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에 대한 발제를 준비하고 있다. 이 자리에 토론자로 함께해 그의 경험을 나눠줄 것을 제안했다. 참전군인 오경열은 여러 가지 요청에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곧이어 토론회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석미화
월남에 차출되어 가시게 된 거잖아요.
오경열
저는 그렇게 갔죠.
석미화
전쟁 동원에 대해서 사실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그 동원의 과정에 비자발적이고 강제의 방식이 있다고 하면 국가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같은 경우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동원이 되었고, 전쟁터에서 부조리를 겪었고, 되돌아왔을 때도 귀환 병사에 대한 배려나 관심 없이 극한의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선생님은 그 과정을 잘 극복하셨지만, 안타까운 경우도 많이 있고요.
오경열
자살한 사람이 많아요. 귀환병들 총기 사고가 많았어요. 그때 그런 부분들은 군에서 덮어버렸거든요. 다 사고사로.
석미화
전장에서도 ‘사고사’가 많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사고사’를 ‘전사’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는 거죠. 예우와 보상으로 덮어버리기엔 이건 명백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인 거죠. 생명을 잃었잖아요. 이제 와서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죠. 지금껏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 여러 사례를 많이 접했어요.
오경열
그분들은 이미 죽었고, 군에서 안는 부담이 크니까 전사로 돌리는 거죠. 맞아요.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다 전사자로 돌려서 왔을 거란 말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귀국하는 병사들이 포탄 분해 작업하다가 터져가지고 죽는 걸 봤거든요. 포탄을 분해하면 신주가 나와요. 그게 여기 가져오면 비싸게 팔리니까. 포탄을 분해하다가 폭발해서 죽고 그래요. 저는 그런 게 싫어서 그냥 더플백 하나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들고 왔어요. 저는 그랬지만 사람들이 귀국할 때 집에 뭐라도 하나 더 보탬 되는 걸 가져가려고 그러니까. 총을 일부러 쏴서 탄피 모으고 포탄 분해하고 그래가지고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만들어서 가져가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들도 있고 그래요. 굉장히 허망하게 죽은 거죠. 그런 것도 관리부실은 맞죠.
석미화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관리부실로 발생한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거죠. 제가 들었던 사례는 훈련 중에 크레모아 스위치 박스를 연결하지 않고 모의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걸 연결한 채로 눌러버려서 다 죽었다고 해요. 제가 참전군인을 수백 명을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수십 명 수준에서 만났는데도 이런 얘기가 한없이 나옵니다.
오경열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이제 나도 기억이 자꾸 희미해져 가더라고요. 비전투병으로 참전한 사람들은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전투병들은 경험하거나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 뭐랄까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전부 다른 증언들이 나와요. 제 얘기를 해보면.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석미화
진실을 규명하는 게 지금에 와서 불가능한 일이 될지라도 전쟁 동원과 전쟁터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요.
오경열
팔레스타인 학살,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인명 경시 풍조가 너무 심해진 것 같아요. 지금 5만 3천 명 이상이 가자에서 학살됐는데, 가해자들에 대한 어떤 응징도 없고 또 거기에 대한 국제기구의 역할이 없어서 굉장히 가슴이 아파요.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하고 있는 행태가 너무 분노스러운 거죠. 재래식 전쟁에서도 그렇게 비참했는데, 요즘 같은 첨단 무기를 민간인들한테 사용하면서 무기 실험하고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조명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죠.
석미화
베트남전쟁은 과거의 전쟁이잖아요. 그 전쟁 얘기를 지금 가져와서 하는 의미는 결국은 지금도 일어나는 그런 전쟁들이 사라져야 되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거든요. 이 전쟁이 국가 발전이라든가 자유 수호라는 이데올로기적인 기억만 남아있다 보니까, 그렇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는 것을 얘기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민간인 학살 문제도 있을 것이고, 또 참전군인이 겪었던 전쟁 경험도 있을 것이고요. 우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런 얘기들을 길어 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경열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은 평화 운동을 해야 해요. 참전군인으로서 그러니까 이제 평화 운동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나서서 전 세계 전쟁 종식과 억압 이런 부분들에 대한 항의도 하고.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서 명예를 회복해야지.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평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전군인 안에도 더 많죠.
석미화
오는 6월 중순에 국회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선생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가 참석하는 자리이니 만큼 참전군인이 자리하는 위치가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그 위치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민간인학살에 대해 성찰적 시각을 갖고 계시고, 전쟁 동원의 경험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 나누어주실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오경열
가해라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도착해서 행동을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이제 그 전쟁터의 한 일원이에요. 그렇기때문에 가해자일 수밖에 없죠. 참석하는 베트남 피해자분들에게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가 상당히 가슴 아프게 그 상황들을 바라보고 반성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긴 해야죠.
석미화
베트남 피해자분들이 참전군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될 거예요. 제가 토론회 현장에 대해 미리 말씀드려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들에게 참전군인 안에도 위로와 지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이제 곧 나올 책에 대해 어떤 바램이나 기대가 있으신가요?
오경열
(책이) 쉬웠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얘기들을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하기가 힘들거든요.
석미화
그게 가장 어려운 지점이에요.
오경열
근데 이 사람들(참전군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그대로 딱 그 틀 안에서 고정돼 있잖아요.
이제 우리들의 생각이나 표현들은 아주 미숙해요. 글을 써보지 않았고 표현대로 얘기를 하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의식은 상당히 우리 때보다 더 발전돼 있고 또 지능적으로 앞서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좀 걱정돼요.
석미화
제가 보기엔 그 간극을 메워주는 게 바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청자들한테 있다고 보거든요. 듣는 이들이 청년과 젊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의 시선도 이 안에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좀 더 공감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될 것 같아요.
2년 전 참전군인 오경열과 함께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며 ‘불빛’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다. 전시관 입구 정면에 펼쳐진 부산항 제3부두 수송선과 대대적인 환송식 사진 끄트머리에 눈길조차 닿지 않는 산동네를 가리키며 ‘불빛’으로 그 시대의 가난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좀 새롭습니다. 예에. 지금 53년 전 기억이라, 그때 당시 여기가 영도나 그 근처일 거예요. 그런데 너무 낙후됐잖아요. 당시에 다 산동네죠. 새벽에 도착하니까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 얼마나 화려한지. 너무너무 화려해요. 그래서 다들 넋이 빠지죠. 그냥 훈련만 받다가 와서 이런 걸 보니까. 동네에 전부 가로등 불빛 같은 게 조금씩 켜있는데 너무 산동네인 거죠. 그런 것들이 그 당시에 우리 현주소 같았어요. 우리나라의 가난한 현실이 그렇게 보이는 거죠. 배에서...”
그가 말하는 자리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가난과 전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활자와 사진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도를 가지고 있다. 독자들도 그의 온도를 책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책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램은 보다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세상으로 나올 책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마주한 이야기가 그렇게 끊임없이 세상을 만나길 기대해 본다.
인터뷰 글 석미화 / 사진 노랭